필자가 꼭 아홉 달 동안 갇혀 있었던 서울 구치소를 찾은 두 아들이 면회시간에 나에게 독거감방의 구조며 하루의 생활일정에 대해서 종종 물었다. 독일에서 낳고 자랐기 때문에 한국의 생활풍습도 낯설기도 했지만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 긴장된 시간을 특수한 공간 속에서 보내고 있는 아버지의 생활환경이 더욱 궁금했을 것이다.
 |
|
| ▲ 송두율 교수 | |
‘감옥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붙은 ‘감시와 처벌’이라는 저술을 통해 근대에 있어서 앎과 힘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를 파헤친 미셸 푸코(M Foucault)조차도 프랑스의 감옥 안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었다.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그는 미국 인디애나주의 아티카시에 있는 감옥의 내부를 직접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사회학에서 이른바 ‘총체적 제도’라고 불리는 이러한 공간은 구치소나 교도소외에도 병원 특히 정신병원, 병영, 학교 등을 의미한다. 이 모든 제도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심각하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졌다. 법률위반행위나 그에 대한 혐의로 구속된 사람, 병자나 정신이상자, 군복무자, 학생들을 일반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엄격한 규율을 통해서 통제하는 과정 중에는 인권유린사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이는 내부로부터 또 다른 반항적인 폭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로 인해 가끔 세간을 놀라게 하는 엄청난 사건도 발생한다. 한국에서는 남미처럼 재소자의 대대적인 폭동은 없지만 군대나 학교 또는 재활원 같은 곳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건은 많다.
특히 규율과 통제는 기본적으로 몸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데 고문과 체벌은 그의 대표적 예이다. 군사정권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여러 가지로 재소자를 위한 조건들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구치소에는 아직도 징벌방이 따로 있다.
구치소내의 규정을 어기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재소자를 일정기간동안 이 방 속에 가두어 놓고 면회와 운동시간도 제한한다. 인적이나 물적으로 열악한 조건에서 교도관이 너무나 많은 재소자를 상대하다 보니 재소자 매 개인이 안고 있는 사연에 관심을 갖고 대화라도 나눌 수 있는 여유는 전혀 없다. 사회로부터 일단 배제되고 또 격리된 집단을 배려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상황이 어렵다고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다.
범죄자와 정신병자는 대개 ‘비정상’이나 ‘비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들이 사는 사회로부터 격리 수용되는 것은 정당하며, 때로는 이들을 영원히 추방시켜도 된다는 주장이 있다. 이렇게 정상과 비정상,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으로 나누어보는 이분법적 시각은 동성애자, 외국노동자 등에게도 적용된다. 특히 냉전적 사고구조 속에서 이른바 ‘빨갱이’를 죽여도 죄가 될 수 없다는 논리도 이러한 시각에서만 성립 가능하다. 이렇게 조건반사처럼 작동하는 선별과 배제의 논리는 주로 집단적 기억과 관습에 의존한다.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고 이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법학이나 임상심리학과 같은 지식체계 없이는 그러한 배제의 구조도 견고하게 유지될 수 없다.
그러한 지식체계를 또 대중화시키는 정보매체가 지배하는 오늘날 그러한 배제에 대한 저항은 저항가요를 반복해서 부르는 식으로는 성공될 수 없다. 때로는 싸우는 대상이 하도 한심하기 때문에 싸우는 자신마저도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전투적 자세를 취하지 않고서는 가령 감옥과 정신병원의 비인간적이며 폭력적인 구조와 싸울 수 없었다고 푸코는 술회한 적이 있다.
그는 또 진리라는 이름 밑에서 법이나 관습이 어떤 선을 그어 그 선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고 항상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고 또 우리를 처벌하지만 그의 진정한 의도는 기존의 권력체계 유지에 있다고 고발한다. 생산적인 것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유목민의 것이다. 흐르는 물이 썩지 않는 것처럼 이제는 우리 자신도 과거의 관습과 법이 정한 테두리 밖으로 나와 오늘의 세계가 필요로 하는 보편적인 사회적 약속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 모두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