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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발견 : 프로이트와 그 이후 - 정장진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범박한 의미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개념으로서 혹은 하나의 체계로서의 무의식은 발음하는 순간부터 인식론 상의 심각한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무의식에 대해 말하는 의식의 무의식에 대한 인식을 상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의식은 홀로 존재하지 못하며 의식의 모든 층위에 있어서의 활동과 표리 관계를 이루고 있는 의식의 일부이자 동시에 반대물이기도 한 것이다. 의식 없이는 무의식도 없다. 사람이 죽었는데 혹은 뇌사 상태인데 무의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의식이 없을 때 무의식도 없다. 하지만 개체가 아니라 개체들의 관련과 그 관련의 집단적·역사적 추이, 즉 계통이 문제일 경우 무의식은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정신분석은 이 지점에서 형이상학을 향해 겨누었던 칼날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정신분석이 의학이라는 정밀하고 임상적인 세계의 유혹을 받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따라서 무의식의 발견자로 인정되는 프로이트의 업적은, 흔히 말해지는 것과는 달리, 위에서 거칠게 구분해 본 형이상학과 의학 혹은 개체와 계통의 갈등을 견디어 낸 방식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즉 굳이 말한다면 그의 업적은 무의식의 발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을 의식의 단계로 혹은 의식을 무의식의 단계로 확대한 것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이트 이전에 무의식이 의식과 맺고 있던 관계와 프로이트 이후에 달라진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로이트 이전의 무의식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에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존재의 뿌리 부분에서 움직이는 비이성적인 힘이었다. 자연 만물을 지배하는 이 힘의 정점에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지성을 압도하는 의지의 프리마를 믿었던 쇼펜하우어의 인간관이었다. 한편 칼 구스타프 카루스는 감정을 무의식이 의식에게 하는 고백이라고 정의했고, 후일 E. 폰 하르트만은 그의 저서 『무의식의 철학』에서 무의식이 보편적 영혼을 표상한다는 헤겔식의 일종의 범신론을 편다. 이러한 심리주의는 물질에까지 심리를 적용하는 우스꽝스러움을 보였지만 신경 계통과 유전적 요인들의 영향이 명백해진 오늘날, 물질의 심리론을 편 이들의 주장은 웃을 일만은 아니다. 당시의 실증주의와 자연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무의식은 보편성을 획득해야만 했던 것이다.

형이상학자들의 무의식에 대한 접근은 곧 이어 의학자들의 경험을 통해 구체성을 띠고 입증된다. 특히 먼저 주목을 받았던 것이 히스테리 증상이다. 왜냐하면 외부로 가장 다양하고도 가시적인 방식으로 표현됨으로써 무의식의 불가해한 속성을 잘 드러내 주는 질병이 히스테리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유행한 것이 최면 요법이었다. 특히 이름이 거론될 만한 의사들로서는 피에르 자네, 비네, 리보와 샤르코를 꼽아야 할 것이다. 샤르코는 히스테리가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정신병이라는 것을 최초로 입증해 보인 인물이었고 후일 프로이트도 유학을 와 공부를 하게 되는 유명한 <살페트리에르 학파>의 창시자였다. 또한 낭시 학파도 함께 거론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무의식의 정신적 존재와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자동성을 입증했을 뿐 이 현상의 규모와 내용을 밝혀 낼 수 없었고, 특히 그 기원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비록 샤르코는 암시 및 히스테리의 정신적 기원과의 관련성 및 자동 기술을 입증했지만 언어와 언어 치료의 가능성에 대한 발견은 프로이트의 몫으로 남는다. 피에르 자네의 경우에도 디소시아시옹dissociation, 즉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라든가 잠재적인 고정 관념 등 매우 중요한 개념을 발견해 내기는 했지만 샤르코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기원과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둔감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1885년 파리의 살페트리에르로 유학을 온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와 최면 요법의 실체를 직접 확인한다. 특히 4년 후 프랑스를 다시 찾은 프로이트는 낭시에서 매우 소중한 발견을 하게 된다. 즉 그는 『나의 삶과 정신분석학』이란 책 속에서 스스로 회상한 바 있듯이, 최면이 풀렸을 때 환자가 최면 상태에서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해 완전한 무지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통해 프로이트는 의식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무의식에 대해 확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 결정적인 사건은 빈의 의사 브로이어와의 만남이다. 신경증 환자들의 증세들이 과거의 사건과 관련되어 있고 언어를 통한 과거 회상이 종종 치료 효과를 낸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에 덧붙여 프로이트 자신의 자기 분석의 중요성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 자기 분석의 경험은 프로이트로 하여금 평생 동안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견지할 수 있게 한 동력이었다. 이는 그 유명한 플리스와의 서신 교환에서 단초를 보이기 시작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발견이나 꿈의 해석, 나아가서는 문학 작품을 비롯한 예술 작품에 대한 해석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문화적 정신분석학과도 관련된다. 자기 분석과 아울러 지적되어야 할 것이 오이디푸스와 햄릿 혹은 독일 낭만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프로이트의 인문적 교양이다.

이러한
분석 과정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유아기의 성의 존재와 성의 억압이란 두 가지 개념이다. 많은 비난이 쏟아진 이 두 개념은 우리가 흔히 리비도라는 말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정리된다. 환자들의 정신 질환의 대부분이 성경험과 관련되었다는 것은 실증적으로 입증이 되었으며 나아가 이 두 개념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에 있어 무의식, 전의식, 의식의 표면적 구분으로 이루어진 일차 구조에서 자아, 초자아, 이드로 구성된 새로운 의식의 구조를 가정하게 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이 문화적 현상에 대한 분석 도구로 사용되는 길을 터놓기도 한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나 다윈의 진화론에 비견되는 일대 혁명이었다.

프로이트 이후의 무의식
신체에 대한 열등 의식 개념을 무의식의 중심 테마로 간주한 아들러Alfred Adler는 프로이트로부터 제일 먼저 떨어져 나간 사람이다. 그러나 니체를 연상시키는 권력에의 의지와 보상 심리 등이 육체의 이미지에 대한 열등 의식과 맺고 있는 상관 관계는 무의식적인 현상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논리적이다. 또한 이는 이미 프로이트의 글에서, 특히 꿈이나 상징에 대한 해석에서 언급되었던 무의식적 표상 행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로 프로이트로부터 멀어진 사람은 스위스 인인 융Carl Gustav Jung이었다. 종교적 상징과 영혼의 존재를 믿었던 융은 형이상학과 종교적 열정을 무의식과 연결시키면서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발원지로 여겼던 성의 역할을 완화시킨다. 융은 무의식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원형 개념을 필요로 하게 했고 그의 집단 심리학은 이러한 구도에서 발생하게 된다. 융의 무의식이 문학이나 신화 분석, 나아가서는 인류학 등에서 흔히 차용되는 이유의 일단도 여기에 있다.

위의 두 사람에 비해 오토 랑크Otto Rank는 문학 분야에서 탁월한 분석을 보여준 학자다. 그의 탄생 콤플렉스는 프로이트의 리비도를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영국으로 귀화한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은 자신의 아이을 포함해 어린아이들, 특히 오이디푸스 기 이전의 시기, 즉 구강기와 항문기의 유아들을 분석의 중심 대상으로 삼는다. 클라인은 프로이트의 리비도와 파괴 충동을 결합시켜 이로부터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의 개념을 창안해 낸다. 따라서 클라인은 무의식의 상징 체계에 대한 분석보다는 환상과 상상적인 것에 보다 많은 연구를 할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꼽아야 할 인물이 있다면 자크 라캉Jacques Lacan일 것이다. 프랑스 인들에게도 난해하기로 소문이 난 이 철학자 겸 정신과 의사인 라캉은 이른바 구조주의로 통칭되는 50~ 60년대의 지적 풍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라캉의 첫번째 문제 제기는 거울 단계라는 개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개념은 거울에 비친 상과 육체의 완결된 이미지 사이에 관련된 환상을 총칭하는 시기로 대략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기간이 이 시기이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라캉식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개념은 후일 상상계, 상징계, 현실계 등의 구분으로 세분화되기에 이른다. 이 작업은 이른바 프로이트로의 복귀, 혹은 프로이트 다시 읽기로 불리는 과정으로서 구조주의, 특히 언어학의 영향 아래에서 프로이트를 다시 읽는 과정이기도 하다.

시니피앙, 시니피에의 개념 차용에서 엿볼 수 있듯이 라캉의 언어학에 대한 의존은 상당한 것이었다. 라캉의 모든 개념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정신 분석적 응용에서 유래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고 말했을 때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자의적 만남은, 다시 말해 마그리트의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나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가 일러주듯 사물 그 자체와 언어 사이에는, 하등의 필연적 관계가 없다. 한국어로는 사과이지만 프랑스 어로는 폼이고 영어로는 애플인 것이다. 최초의 결핍 상태로부터 시작되는 욕망과 대상 사이의 끝없는 불일치는 정신분석에 와서는 은유와 환유의 메커니즘으로 해석된다. 라캉의 <상징계>는 궁극적으로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집단적이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확고 부동한 규범과 규약의 총체로서의 언어를 지칭하며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라고 했을 때에도 대문자로 표기되는 <타자>란 요컨대 욕망과 충족 사이의 운명적인 괴리를 만든 원 존재로서의 언어를 지칭한다. 이러한 언어의 초월성은 프로이트의 삼각형, 즉 아버지, 어머니, 아이의 관계 속에 각자의 위치와 기능을 부여하는 별도의 존재로 언어를 가정하게 했다. 이로 인해 어머니나 아이와 쌍을 이루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를 아버지이게 하는 지고의 존재로서의 이마고, 즉 아버지의 이름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라캉은 <상징적 거세>라고 불렀다. 실제로 아이의 언어 습득과 욕망의 관계에서 볼 때 이미 그 자체로 괴리인 언어는 이렇게 진정한 대상을 찾지 못하는 욕망과 대상 사이의 괴리와 동형 동질의 것이다.

맺는말
무의식은 프로이트 이전부터 존재했었다. 하지만 그것의 있음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며 진원지와 구조가 알려지게 된 것은 더 더욱 최근의 일이다. 프로이트 이전의 시대의 무의식이 관념론에 침윤된 비분석적인 개념이었다면 프로이트는 이를 정신 질환의 임상적 경험과 자신의 체험을 통해 분석하고 개념화의 초석을 놓았다. 형이상학을 거부했지만 프로이트는 두 차례에 걸쳐 메타 심리학의 정치한 구조를 가정했고 이는 후일 라캉에 와서 언어학의 도움을 받아 비종교적 신학의 모습을 띠고 나타나게 된다. 프로이트와 그 이후의 정신분석가들은 융과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기독교의 강력하고도 완벽한 체계 속에서 <신은 죽었다>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부정인 <신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글쓴이 정장진은 고려대학교 불어불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파리 8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와 덕성여대 대학원에 출강중이다. 역서로 『뉴욕 스케치』, 『붉은 수레바퀴』, 『성탄절 이야기』, 『연인』,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예술과 정신분석』 등이 있고 저서로 비평 에세이 『두 개의 소설 혹은 두 개의 거짓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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