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알고싶다 > 네그리, <제국> 中 '인간의 죽음 이후의 인본주의'

인상깊은 부분이라 생각되어 페이퍼로 남긴다. 혹시 푸코의 철학에 생소한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 몇 마디 앞에 써 두겠다. 레비-스트로스의 계보를 이어가는 철학자들은 인간을 자연의 법칙에 용해시키는 세계관 위에서 작업하게 된다. 흔히 구조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미셸 푸코도 그러하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 등의 그의 저작에서 인간을 사회-문화적인 구조의 생산물로 본다. 이를테면 근대인은 근대적 위계 질서 하에서 그들의 생활 양식(아비투스)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것은 베르그송 등 실존주의자들의 사상과는 달리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철학이다. 네그리가 지적하고 있는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네그리의 말대로 푸코는 <성의 역사> 이후 반인본주의적인 인본주의를 역설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찬찬히 뜯어보도록 하자. 그리고 푸코와 스피노자를 연계해서 알아두면 좋겠다. 스피노자는 익히 알려진대로 범신론자이다. 돌멩이나 시냇물을 인간과 굳이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 스피노자의 철학 속에서는 우주 만물이 곧 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윤리학은 자연의 윤리학, 바로 우주의 에티카이다. 스피노자도 인간을 자연 법칙에 용해시켰다. 그의 철학에서 내재성이란, 개념, 언어, 이념 등의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들 속에서 구성된다는 의미에서 쓰인 용어이다. 외부에서 부과된 어떤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글의 흐름에서 내재성과 초월성은 반대로 쓰이는 개념이다.

[  성의 역사에 관한 미셸 푸코의 마지막 저작들은 르네상스 인본주의를 활성화했던 동일한 혁명적 충동을 다시 한번 살려낸다. 윤리적인 자기에의 배려는 자기 창조의 구성 권력으로 재등장한다. 우리에게 <인간>의 죽음에 대해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던 저자, 자신의 전생애 동안 반인본주의의 기치를 들었던 사상가가 어떻게 마침내 인본주의 전통의 이러한 중심 교리들을 옹호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푸코가 자신과 모순되거나 자신의 초기 입장을 뒤집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담론의 지속성에 매우 집착했다. 오히려 푸코는 자신의 마지막 저작에서 역설적이고 긴급한 질문을 던진다. 즉, <인간>의 죽음 이후의 인본주의란 무엇인가? 혹은 반인본주의적인(혹은 탈인간적인) 인본주의란 무엇인가? 

하지만 이러한 질문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두 개의 뚜렷한 인본주의 관념 간의 용어상의 혼동에서 생긴 외관상의 역설일 뿐이다. 1960년대의 푸코와 알튀세르에게 매우 중요한 기획이었던 반인본주의는 스피노자가 300년 전에 싸웠던 전투와 효과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이해를 제국 속의 제국[고립된 영토]이라고 비난했다. 달리 말하자면, 스피노자는 전체로서 자연의 법칙과는 다른 인간 본성에 관한 어떤 법칙도 허용하기를 거부했다. 도나 하러웨이는 인간, 동물, 기계 사이에 우리가 설정하는 장벽들을 무너뜨리자고 주장하면서, 우리 시대에 스피노자의 기획을 수행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려 한다면,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은 정확히 <인간>의 죽음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인본주의는 우리가 쿠사노에서부터 마르실리우스까지 앞에서 개괄한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혁명 정신과 충돌할 필요는 없다. 사실상 이러한 반인본주의는 직접적으로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세속화 기획을, 보다 정확히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내재성의 구도의 발견을 뒤따른다. 두 기획들은 초월성에 대한 공격에 근거해 있다. 자연을 넘어선 권력을 신에게 부여하는 종교적인 사상과, 자연을 넘어선 그 동일한 권력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근대의 "세속적인" 사상 사이에 엄밀한 지속성이 있다. 신의 초월성은 간단히 <인간>으로 이전된다. <인간> 이전의 신처럼,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고 자연을 넘어서 존재하는 이러한 <인간>은 내재성의 철학에서 자리를 갖지 못한다. 신처럼, 이러한 초월적인 <인간> 모습도 재빨리 사회적 위계와 지배를 부과하는 데에 이른다. 그렇다면 모든 초월성에 대한 거부로 인식되는 반인본주의를 결코 활력의 부정과, 즉 근대적 전통의 혁명적 흐름을 고무하는 창조적인 생활력에 대한 부정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초월성에 대한 거부는 이러한 내재적 권력, 아나키적인 철학 기반, 즉 "신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푸코의 마지막 저작들에서의 인본주의를 모순적인 것으로, 심지어 그가 20년 전에 주장한 <인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조차 보지 말아야 한다. 일단 우리가 우리의 탈인간적 신체와 정신을 인식한다면, 일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유인원과 사이보그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활력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즉, 모든 자연을 활성화하고 우리의 잠재력을 현실화하듯이 우리를 활성화하는 창조적 역능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인간>의 죽음 이후의 인본주의이다. 즉, 푸코가 "자기에 대한 자기의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 즉 자기 자신과 우리의 세계를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지속적인 구성 기획이다.  ]  

인간에게 순수한 금맥과도 같은 자유로운 의지가 없다고 해서 맥빠지신 분들, 기운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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