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이성은 왜 ‘광기’를 몰아냈는가


△ 이진경 서울산업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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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기 문화밖으로 떠밀린 뒤 문화의 중심인 비극의식 상실”

  • 푸코 ‘광기의 역사’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빈번하게 광기가 등장한다. 악마적 힘에 사로잡힌 맥베스 부인의 광기, 질투에 눈 먼 오델로의 광기, 낙담한 리어왕의 광기, 그리고 모르는 게 좋았을 진실을 본 햄릿의 광기 등등. 대부분 광기는 비극적 경험으로 다루어진다. 그것은 ‘정상인’들을, 혹은 그들의 질서를 위협하는 것이란 점에서 저 멀리 떼어두고픈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세상의 어떤 비밀을 담고 있거나 비밀을 엿본데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왕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본 햄릿이 미쳐가듯이.

    그러나 반대로 희극적인 광기들도 있다. 리어왕의 어릿광대, 좀더 강하게는 소설과 세상을 하나의 연속체로 경험하는 돈키호테의 광기. 혹은 성직자들의 추한 비밀을 들추어내는 에라스무스의 ‘우신’(광인을 뜻하는 독일어 ‘Narr’는 바보란 뜻도 포함한다). 이들은 풍자를 통해서든, 아니면 풍자에 의해서든 가벼운 웃음을 수반하는 광기들이다.

    아마도 정반대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모습은 서구의 르네상스인들이 경험했던 광기의 두 형상일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어느 경우든 광인들이 갇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수용소라는 유형의 공간에도, 혹은 침묵이라는 무형의 공간에도. 오히려 이 시기 광인은 ‘이동공간의 포로’였다. ‘바보들의 배’를 타고 물 위를 순례하든, 아니면 어딘가 모를 곳에서 와서 모를 곳으로 가는, 혹은 말을 타고 방랑을 하는 이동이 광인들을 다루는 일반적 방식이었다.

    푸코가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르는 17~18세기에 이르면 이들은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직역하면 ‘종합병원’이라고 불러야 할 구빈원이 대대적으로 만들어지는데, 광인들은 이제 부랑자, 빈민, 범죄자 등등과 더불어 감금된다. 물론 그 중 일부는 시립병원에 수용되어 ‘치료’를 받게 되지만, 대부분은 도덕적인 죄악을 뒤집어쓰고 왕의 봉인장이나 치안감독관의 요청, 혹은 친척이나 이웃사람 등의 공모에 의해 갇히게 된다. 광기는 세상의 비밀이 아니라 인간 안에 존재하는 어떤 동물성과 연결되었고, 그것은 같은 인간의 수치를 야기하는 추문이 되었다. 하지만 은폐되어야 할 그것은 거꾸로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전시되기도 했다. 마치 동물처럼, 혹은 사람들의 즐거움을 야기하는 추문처럼.

    18세기 말을 지나면서 감금된 자들의 대대적인 석방이 행해졌다. 물론 광인과 죄인들은 여전히 갇혀 있어야 했다. 광인과 함께 갇히는 ‘이중의 처벌’을 비난하는 죄인들로부터 광인은 분리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광기는 이제 이성 아닌 무엇이 아니라, 이제 막 이성의 문턱에 도달한, 그래서 한시바삐 인간이 되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하지만 ‘인간’의 이름으로 행해진 진단이나 치료는 광기의 비밀을 알려는 어떤 의도와도 무관하게, 다만 광인들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 정상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관찰과 조처들의 집합이 된다. 고문이나 처벌 등을 통해서 그나마 행해지던 광기와의 대화는 끝나고, 보상과 처벌의 체제 안에서 광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알아서 정상적으로 행동하게 하려는 조련의 기술이 그것을 대신하게 된다.


    △  광기에 대한 이성의 횡포를 폭로한 <광기의 역사>는 자신과 다른 것을 타자화하여 물리치는 제국주의의 모습에 대한 폭로이기도 했다. 사진은 지난해 1월 세계교회회의(WCC)가 인도에서 연 제4회 세계사회포럼 기간에 벌어진 제국주의 반대 시위 장면. 비누 알렉스 촬영.

    침묵의 ‘고고학’

    이로써 광기는 절대적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의사가 광인을 대신해서 광기에 대해, 광인에 대해 말한다. 광인 역시 말하지만 그 말은 들리지 않는다. <터미네이터 2>의 시작 부분에서 정신병원에서 갇힌 사라 코너는 미래세계의 진실에 대해 말하지만, 그리고 또 다른 터미네이터가 올테니 그것에 대비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 말은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과대망상’이라고 불리는, 광기의 한 증상일 뿐인 것이다. 이성의 담지자만이, 의사나 간호사만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광기를 서술하는 모든 말들은 이제 정신의학의 용어들을 빌어야 한다. 그 용어들로 자신을 말하려 하는 한, 이미 그것은 의학적 이성이 대신 말하는 광기, 그 이성 안의 광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광기는 이제 자신을 표현할 언어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절대적 침묵 속에 갇힌 광기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 침묵 속에서 광기를 ‘발굴’하는 것,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가 하고자 하는 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자신의 작업을 그는 ‘침묵의 고고학’이라고 명명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대립물을 침묵 속에 가두고 ‘타자화’하는(쉽게 말하면, 배제하고 억압하는) 이성의 권력이 드러난다. 이성은 논리적 자명성을 통해 설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타자를 때론 수용소 안에, 때론 병원 안에, 혹은 거대한 침묵 속에 가두고 억압함으로써 작동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푸코는 광기란 이성이라는 절대적 타당성의 바깥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다르게 다루어지고 다른 관계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말했던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또 다른 보편성을 주장하는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이른바 ‘이성의 보편성’을 그것의 '타자‘와의 상이한 관계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형식으로 다루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를 위해 푸코는 광기에 대한 4가지 상이한 ’의식‘이 어떻게 상이한 배치를 만들면서 상이한 역사를 직조하는가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역사‘란, 이성이 그 타자와 다른 관계 속으로, 다른 배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란 점에서, 미래의 시제를 갖는 희망의 이름이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광기의 역사>가 광기에 대한 무책임한 예찬이라는 오랜된 비난은, 두께만큼이나 두터운 이 저작의 치밀한 진지함을 날려 보내기엔 너무 무력하고 거친 것이다.

    물론 광기의 소리를 전하는 푸코 자신의 언어는 이성의 언어가 아닌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성의 언어를 통하지 않는, 광기의 언어 자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데리다의 반론으로 인해 유명해진 이 논란은, 이성과 광기의 대립이 역사적이라는 푸코의 주장과 역사 ‘이전의’ 어떤 근본적인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는 데리다의 주장으로 소급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스웨덴 웁살라 대학의 방대한 자료들을 뒤져서 ‘발굴’해낸 광기의 역사를 꿰뚫어 뒤집기엔 데리다의 비판은 너무도 얇고 너무도 ‘철학적’이다.

    비서구인에게 더 영향력

    이 책이 출판되던 당시 이미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는 정신의학의 치료법이나 거기서의 의사-환자 관계 등을 비판하는 ‘반정신의학 운동’이 실존주의 철학과 손을 잡고 진행되고 있었다. 이 책이 이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영향은 정신의학의 영역에 제한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탐색한 이성과 광기의 관계는, 자신의 외부자를 정상성의 영역에서 배제하여 억압하고, 그렇게 배제되거나 억압된 타자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자명성을 ‘입증’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기 따로 미친 놈들이 없다면 이성은 자신의 정상성을 대체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흔히 ‘동일자와 타자’라는 말로 표현한다. 가령 서구문화를 ‘문명’이란 이름으로 동일화해야 할 모델로 만들고, 다른 문화를 ‘미개’나 ‘야만’이란 이름으로 타자화하는 근대의 역사 전체에 대해 우리는 ‘동일자와 타자’라는 푸코의 개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이성이 광기를 대신해서 광기에 대해 말하고 광인은 그 말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는 관계 역시 다양한 영역에서 다른 종류의 역사를, ‘대행자’들에 의해 지워지고 묻혀버린 역사를 새로이 쓰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제국적 침략과 나란히 진행된 동양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서구가 동양에 대해 대신 말하고, 동양은 그들 동양학자에게서 자신들에 대해, 자신의 역사에 대해 배워야 했던 관계가 그것이다. 즉 우리가 아는 동양은 이미 서구인이 대신 말해준 동양인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이미 서구인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이 식민주의의 역사를, 혹은 현재진행형의 식민주의를 다시 보고 다시 쓰게 하는데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음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서구인보다는 비서구인에게 푸코가 좀더 영향력이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서평자 추천 도서

    광기의 역사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나남 펴냄(2003), 3만8000원

    (1970년 출간된 책의 완역본)

    광기의 역사

    김부용 옮김

    인간사랑 펴냄(1999), 1만2000원

    (푸코 자신이 3분의 1로 축약한 영역본의 번역)

    광기의 역사 30년 후

    자크 데리다 등 지음, 박정자 옮김

    시각과언어 펴냄(1997), 9000원

    (<광기의 역사> 출간 30돌 기념 심포지엄 발표논문 모음)

    50자 서평

    ◇ 문성환(36·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먼지 쌓인 창고 속 고문서들은 어떻게 역사가 되었을까. 이제는 정신의 질병이 돼버린 광기의, 광기에 의한, 근대 이성의 야심찬 타자(他者) 만들기 프로젝트 보고서.”

    ◇ 이강룡(31·웹칼럼니스트 ‘리드미 파일’(readme.or.kr) 운영)

    “<광기의 역사>는 광기를 억압하는 이성의 횡포에 대해 이야기한다.…여행하려고 배에 오른 사람들이 보기에 멀어져 가는 것은 배가 아니라 육지라네.”

    ◇ 조형준(41·세계문학 편집위원)

    “권력은 총구와 주먹과 음습한 선글라스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질리도록 정치하게 보여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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