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순간, 똥이 마렵다

오월 광주의 성스러움을 일상으로 끌어내린 <오월의 신부>, 그리고 <봄날>

▣ 장정일/ 소설가

황지우의 희곡 <오월의 신부>(문학과 지성사, 2000)에는 ‘배설 모티브’가 자주 나온다. 특히 도청에서의 마지막 날 새벽, 시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계엄군이 쳐들어오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한 주인공이 아랫도리를 꼬면서 “이렇게 귀중한 시간에 똥이 매려우면 되겄냐?”라고 익살을 부린다.

네 속에 빨갱이 있다!!


△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이 장면은 늘 엄숙하게 말해지는 광주민중항쟁을 일상으로 끌어내리면서, 동시에 성화(聖化)한다. 작가는 그 대목을 통해, 광주민중항쟁은 하늘에서 떨어진 고귀한 영웅이 아니라 공포 앞에서 변의를 느끼는 연약하고 하잘것없는 인간들이 치른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이 지각되어야, 광주의 성스러움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이 희곡에는 ‘지상으로 끌어내려진 성화’만 아니라, 곧장 ‘천상으로 들어올려진 성화’도 있다. 5월22일 낮 한때, 계엄군을 물리친 5만명의 시민이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하는 8장은 물줄기가 뻗는 도청의 분수를 한 그루 나무로 형상화해놓고 한바탕 씻김굿을 하는 것으로 처리된다. 이때 밥을 나누어 먹으며 피흘려 싸워 지킨 공동체가, 일순 아무런 억압 없는 천상의 나라로 화한다.

시간과 무대, 등장인물의 제약을 받는 희곡은 상징과 압축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추출하려 한다. 반면 임철우의 장편소설 <봄날>은 그런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이 소설에 묘사된 폭력의 수위는 한국 문학사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을 낳은 폭력의 기원이다. 광주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5월18일, 공수부대원의 만행을 목격한 오십대 초반의 남자는 “틀림없어. 그놈들은 김일성이가 남파시킨 무장공비들”이라며 112로 신고해야 한다고 울부짖는다.

계엄군의 잔학을 목격한 광주 시민은 특히 공수부대원들을 “공산당보다 더 악독하고 잔인무도한 짐승”으로 부른다. 그 열흘 동안 어린 학생들은 “공산당이 쳐들어와”서 학교가 휴교하는 줄 알 정도였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전두환과 신군부의 지시를 받은 말단 지휘관들은 “대한민국이 빨갱이놈들에게 적화되는냐 마느냐는 바로 우리 어깨에 달려 있”다면서, 거리에 나선 시위대와 광주 시민을 빨갱이로 몰아붙인다.

계엄군이 ‘너희 속에 빨갱이 있다!’고 아무리 선무 공작을 해도, 시민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때 광주는, 시위를 하는 사람이나 진압을 하는 사람이나 서로가 상대방을 향해 “이 빨갱이새끼들아! 네놈들은 김일성이나 똑같은 새끼들야!”라고 선공(先攻)을 하고 선방(善防)을 펼쳐야 하는, 한국 근대사의 극점(極點)을 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갱이가 한국 사회의 절대적 타자라는 것과, 권력을 가진 자만이 피권력자의 이마에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계엄사는 25일, 서울역 앞 간첩 체포사건과 광주 도청 안에서의 독침사건을 조작하는 데 성공하여 가까스로 광주라는 제어하기 힘든 불길에 낙인을 찍는 데 성공했다. 그 소식이 전국을 강타하는 순간, 광주 시민은 자신들의 패배를 예감했다. 그날을 고비로 전의를 상실한 시민들은 더 이상 모이지 않았다. 또 죽음이 두려워서거나 여러 가지 정파적 이해와 지역적 편견 때문에 봉쇄된 광주로 달려가지 않았던 사람들 역시 ‘그들은 빨갱이였어’라며 비겁한 양심을 위무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80년 5월의 광주가 절해고도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고, 그 흔한 민주화 인사들이 송두율에게 손을 내밀지 못한 까닭이다.

아직 기소되지 않은 레드 콤플렉스

이 작품은 대학 1학년생인 명기가 도청 진압 직후, 6·25와 가짜 간첩단 사건으로 섬 전체가 풍비박산 나버린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5·18의 원인이 분단 체제에 있다는 명백한 암시다. 12·12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광주에 빨갱이 낙인을 찍는 데 성공함으로써 최고 권좌에 올랐으나, 1996년 군사반란죄와 5·18특별법에 의해 기소되어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우리들을 이중인격자로 만들었던, 우리 안의 레드 콤플렉스는 아직껏 기소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