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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녹색평론사(greenreview.co.kr)

동아시아의 평화와 '일본문제' -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여러해 동안 우리의 삶에 위협으로 가해지고 있는 이른바 북핵문제를 둘러싼 긴장과 갈등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 상황은 부쩍 악화되어, 심지어 국내의 언론에서도 미국에 의한 북폭의 현실적 가능성이 빈번히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일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미국정부 관계자들의 어조와 표정에 매달려 일희일비하는 서글픈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해방 60주년을 맞이하여 좀더 뜻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대신, 우리는 또다시 우리의 삶의 기반의 허약함을 목도하여야 하는 착잡한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만약 미국이 예방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이라크를 침략한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여, 북한의 영변 핵시설 지역에 대한 공격을 실지로 감행한다면, 그때는 형용할 수 없는 괴멸적인 재앙이 한반도에 들이닥칠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로 인한 피해는 비단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 나아가서는 미국 자신에게도 엄청난 것이 되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로, 물론 가상이지만, 북한에 대한 미국의 폭격이라는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날, 수많은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미국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급격히 추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결과일 것이다. 예를 들어, 만에 하나라도 미국의 북한에 대한 공격이 어디까지나 엄포용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 되는 순간이 온다면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엄청난 반미 기운이 급격히 고조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런 사태 속에서 자칫하면 미국은 지난 60년 동안 이 지역에서 행사해온 패권적 지배력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르는 의외의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미국이 이러한 상황을 감내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합리적인 전략가라면 이러한 사태의 전개는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쉽게 전쟁이 일어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은 결국 그것이 미국이 추구하는 이익에 부합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의 교수 개번 매코맥은 최근에 발표된〈동북아시아에 있어서 공동체와 정체성―1930년대와 오늘〉이라는 논문에서 최근의 북핵문제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만일 ‘북한의 위협’이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된다면 워싱턴의 전략가들은…일본과 남한에 있는 미군기지를 (그리고 미사일 방어시스템을) 정당화할 다른 이유를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는 빠르게 ‘유럽의’ 방향으로 갈 것이고, 커다란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파장이 일어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은 그 단기적 목표 즉 북한정권의 붕괴나 정책의 변화를 성취하면, 이 지역을 미 제국 속에 계속하여 편입시키고자 하는 자신의 장기적 목표를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이 지역에 있어서의 자신의 패권적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는 한, 미국은 김정일 정권이 존속하고 있는 것이 유리한 것이다.

 

  이것은 리얼리즘에 입각한 꽤 설득력 있는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매코맥 교수의 분석은 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 아마도 이 문제를 바라보는 비판적 분석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볼 때, 실제로, “석유도 나지 않는” 북한을 미국이 섣불리 공격할 것이라고는 쉽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오늘의 미국 행정부의 정책결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른바 네오콘 그룹의 사고방식은 보통 사람들의 상식수준을 크게 넘어서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이라크 침략도 실제 미국 자신에게 득보다 실이 크다는 다양한 각도에서의 분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감행되었다. 더욱이, 이라크 침략은 아마도 역사상 미증유의 대규모의 전쟁반대 목소리가 들끓는 가운데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선제공격을 불허하는 국제법의 존재도, 유엔의 권능도 간단히 무시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근간에 가로 누워있는 침략적인 성격이다.

  최근에 출판되어 이미 독서계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구술기록《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은 지난 반세기 동안 반독재, 민주주의를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헌신해온 뛰어나게 양심적인 한 지식인의 험난한 생의 역정이 대화 형식으로 반추되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회상록이다. 아마도 한국현대 지성사 혹은 사상운동사의 기념비적 증언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이는 이 귀중한 회상록에서 리영희 선생은 오랜 세월 냉전체제 하의 가혹한 체험을 통해서 얻은 미국에 대한 자신의 지견(知見)을 간단명료하게 압축하여 말하고 있다. 그 결론은 “미국 자본주의는 그 본성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잔인무도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에 요약되어 있다.

  리영희 선생의 말을 조금더 들어보면, “약소민족에 대한 전쟁 없이는 그 제국주의적 경제, 정치, 군사, 과학기술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게 내 확신이에요…약소민족들이 조금이라도 민주적 복지와 자립적 경제체제를 추구하려고 하면 그런 정권들은 미국이 뒷받침하는 반동적이며 미국에 예속된 군부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켜 전복시켜왔어요.” 이러한 말은, 이제와서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발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예컨대 노엄 촘스키 교수와 같은 미국의 비판적 지성을 통해서 이러한 발언에 꽤 익숙해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발언이 새삼스럽게 우리에게 절실하게 다가오고, 깊이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서재에서 익힌 급진적 관념이 아니라, 냉전구조의 모순과 혹독한 시련을 온몸으로 겪어온 개인적 체험 끝에 나온 발언으로서의 큰 무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발언에는, 늘 정의에 목말라 하면서, 강자의 전횡으로 약소국 민중의 삶이 끝없이 유린되는 국제정치의 현장을 첨예한 의식으로 지켜보아왔던 한 외신기자의 분노와 슬픔이 서려있고, 탁월한 정보 분석가만이 누릴 수 있는 권위가 배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북핵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요소로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결국 ‘일본문제’일 것이다.

  올해가 한국이나 중국이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60주년이 되는 해라면, 일본으로서는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전후(戰後) 60주년이 되는 해 봄에 일본이 과거 자신이 피해를 끼쳤던 이웃 나라들에 대해서 내놓은 것은 과거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나 사죄도,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자세도 아니었다. 그들은 또다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고, 수상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참배와 역사교과서 문제에 대해 국내외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를 계속해서 무시해왔다. 그 결과 일본정부는 2001년의 경우보다도 역사왜곡이 더 심한, 그리하여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보다 노골적으로 정당화하는 역사교과서를 문부성 검정에서 합격시켰다.

  이웃 나라들의 존재는 안중(眼中)에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일본국가의 이러한 자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들이 이미 심각한 자폐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 자폐증은 매우 선택적이다. 일본은 아시아의 근린 국가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시로 일관하면서, 동시에 미국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는 굴종적·노예적 자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고이즈미 일본수상의 거듭된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미화하는 역사교과서의 문제를 비판하는 한국이나 중국 측의 목소리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내정간섭을 말라는 투로 늘 응수해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미군기지를 제공하고 있고,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원하는 미국의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게다가, 이제는 미국의 종용에 의해서 전후 60년 동안 지켜온 평화헌법 체제를 방기(放棄)하고, 이른바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의 국가”가 되기 위한 일련의 개혁조치들을 착착 실행해 나가고 있다.

  일본국가의 이러한 우경화는 이제 돌이키기 어려운 흐름으로 굳어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아무리 거센 반발이 일어나고, 반일시위가 아무리 치열하게 전개되더라도, 또 일본 국내의 평화와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수많은 시민들의 양심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이 추세는 당분간 역전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추세의 배후에는 비단 일본의 보수지배층의 이해관계만 아니라, 광범한 풀뿌리 계층의 지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수정주의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하는《새로운 역사교과서》의 저자들이 주장해온 것은 일본의 교육이 ‘자학사관’에서 벗어나 자신의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자라나는 세대에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역사의식이 결여된 대부분의 대중 사이에서 큰 설득력을 띠고 쉽게 전파될 수 있다.

  오늘날 산업사회는 예전의 농업사회 혹은 상업사회와는 달리, 공동체의 과거의 경험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사회이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과학기술과 끝없이 새로운 상품의 소비를 제도화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옛 사람의 지혜라는 것은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가 J. H. 플럼이 말하듯이, 현대사회라는 것은 ‘과거의 죽음’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임이 틀림없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 일본의 고등학교에서 한반도에 왜 두개의 국가가 있는지 그 연유를 알고 있는 학생은 한 학급에서 겨우 두세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역사적 기억의 심각한 퇴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러한 상황에서, 단지 사람의 본능적인 향토애와 애국주의적 정서에 호소하는 자민족중심주의적, 자폐적 사관이 쉽게 전파·수용되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로, 우리가 정작 우려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대중적, 풀뿌리 차원에서의 포퓰리스트 내셔널리즘일지도 모른다. 역사학자 테사 모리스-스즈키에 의하면, 오늘날 일본 사람들이 공식적인 학교교육을 통해서 역사를 배우는 정도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따라서 현재의 역사교과서 검정문제는 그 자체로 중대한 문제라고 할 것은 없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지금 만화, 영화, 텔레비전, CD 등 보다 전파력이 강한 대중 미디어를 통해서 널리 유포되고 있는 자폐적인 사관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일본정부와 지배층은 이러한 대중적인 차원에서의 정서적 공감을 이용하면서 지금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순차적인 계단을 밟고 있을 뿐이다. 사과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사과를 요구해봤자 소용없는 일인 것처럼, 일본국가에 대하여 식민지 지배와 침략의 과거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질 것을 추궁하는 것은 점점 갈수록 부질없는 일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이 명백히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선린관계와 평화의 전망을 손상시키는 이러한 방향을 집요하게 고집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그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의 근대국가로서 일본도 예외 없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자기확장의 욕망, 즉 부국강병의 욕망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이것은 근대적 국민국가 체제가 세계의 기본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한, 소멸될 수 없는 욕망일 것이다. 일본의 개헌파가 일본국가의 대외 교전권(交戰權)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현행헌법 제9조를 애써 삭제하려고 하는 명분이 바로 ‘정상적인 국가’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 경우 ‘정상국가’란, 단순한 방어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라도 무력으로 약자를 위협할 준비가 되어있는 군사국가를 뜻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 일본이 군사력을 증강하고, 미·일동맹 체제를 강화하는 데 있어서 빌미는 언제나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이지만, 이것은 따지고 보면 한갓 구실에 불과할 공산이 높다. 실제로는, ‘정상국가화’를 통해서 그들은 자존자대(自尊自大)의 욕망을 실현시키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물론, 일반적인 국가의 욕망이라는 측면에서 오늘날 일본의 자폐적인 증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예컨대 2차 대전 이후 독일이 보여준 것과 같은 수준의 전쟁책임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사죄가 왜 일본에서는 가능하지 않은지 그 구체적인 사정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일본의 ‘정체성’ 문제이다. 일본은 1867년 메이지 유신 이래 자신이 지리적으로 비록 아시아에 속하면서도 비(非)아시아적 특성을 가진 나라라는 자의식을 강하게 소유해왔다. 실제로, 일본은 일찍이 서구 제국주의로부터의 침략위협에 노출되었으나, 메이지 유신에 의한 근대국가 체제의 수립을 통해서, 그리고 그로 인한 자본주의 산업화의 실현을 통해서 비서구 사회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예외적인 ‘성공’을 거둔 국가가 되었다. 같은 동양에 속하는 다른 나라들이 식민지로 전락하거나,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경험을 해온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이 이러한 ‘근대적’ 국가의 수립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이것은 일찍부터 수많은 일본 지식인들이 던져온 물음이었고, 그 대답은 대개 일본의 문화와 전통과 역사의 ‘특이함’에 있었다.

  예를 들어, 서양의 자본주의 근대화를 개화하게 한 역사적 조건으로서의 봉건제가 아시아에서는 예외적으로 일본의 중세사회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전통사회는 이미 자기 속에 근대화에의 발전적 역동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문화, 특이한 전통 위에 서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아시아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는 아시아가 아니라고 하는 생각,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아시아가 아니고자 하는 욕망―이것은 일찍부터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욕망으로 표현되었다. 자기자신을 미개하고 야만적인 아시아와는 질적으로 다른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는 이러한 ‘탈아의 욕망’은 메이지 시대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것이지만, 나중에 이것이 아시아에 대한 정복과 침략이라는 제국주의적 폭력의 논리로 발전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의 탈아입구라는 심리적 경사(傾斜)는 뿌리깊은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일본 지식인들의 공헌도 적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사람은 지금 일본에서 이른바 ‘국민작가’로 추앙받고 있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일 것이다.

  시바는 역사와 풍습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박람강기(博覽强記), 그리고 뛰어난 이야기꾼의 솜씨를 가지고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있어서 달리 유례가 없을 성공을 거둔 역사소설가이다. 그는 일찍이 나름대로 역사와 사회에 대한 진보적인 시각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는 상황에 대응하여 그 일본의 근현대사를 좀더 적극적으로 옹호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당시의 대중적 정서에 부응하는 측면이 강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대중적으로 비상히 설득력있는 필치로써 그동안 침략과 패전이라는 쓰라린 기억 속에 사로잡혀왔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역사가 단지 실패와 좌절만이 아니라,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이었던가를 역사소설의 형식을 빌려 광범하게 유포하였다.

  시바가 특히 강조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적어도 청일전쟁까지 일본이 서양에 맞서는 독립된 근대적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과정에서 겪은 파란만장한 시련과 인내, 영웅적인 투쟁, 그리고 그 결과로 획득한 ‘근대화’의 성취이다. 그에 의하면, 일본은 서양세계가 옛 희랍, 로마문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근 200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룩해온 ‘근대화’를 단기간에 성취할 수 있었던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것은 과연 ‘위업’이라고 할 만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일본이 나중에 아시아에 대한 침략·지배자가 되고, 만주침략에서 진주만 공격에 이르는 군국주의 파시즘의 길을 걸어갔고, 그 결과 마침내 처절한 패배를 당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련의 군국주의화의 과정은 그 이전의 메이지 시대의 창조적 발걸음과는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고 시바는 보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쇼와 시대의 책임이지, 메이지 시대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과연 메이지 시대와 쇼와 시대가 그렇게 확연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인지, 그 두 시대 사이에 과연 지배적인 가치, 사상, 지향, 제도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차이가 있었는지 매우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어떻든 이러한 시바의 역사적 관점이 일본의 대중으로 하여금 자기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해온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각도는 조금 다르지만, 이와 관련해서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사상가로 손꼽히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경우도 간단히 언급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마루야마는 물론 시바와는 달리 대중적 차원이 아니라, 학계와 지식계에서 커다란 권위와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사상가였던 만큼 그가 보여주는 일본 근현대사에 대한 시각은 여러 각도에서 깊이 검토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1945년 전쟁이 끝난 직후, 대학으로 복귀한 마루야마는 유명한〈초국가주의의 심리와 논리〉라는 평론을 발표하여, 전쟁 전 일본국가의 파시즘 체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부터 그의 사상가로서의 생애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미 여러 논자들에 의해 지적되어온 사실이지만, 이 평론과 나중의 좀더 본격적인 저술을 통해서 마루야마는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해서는 길게 논하지만, 일본의 식민지 지배 문제에 대해서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외면하고 있다는 본질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징병에 의해 식민지 조선에서 병사로서 복무하였다는 그의 개인적인 이력을 고려할 때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그러나, 식민지 문제에 대한 그의 무관심을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루야마의 파시즘 체제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고려해야 할지 모른다. 즉, 그의 시각에서 볼 때,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근대화의 핵심적인 결함은 그것이 서구에서 보는 것과 같은 자유주의적 가치와 제도를 결여한 위로부터의 근대화였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시민계급의 형성을 보지 못하고, 결국 군국주의 파시즘 체제로 이어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마루야마는 결코 근대화 그 자체를 문제시한 사상가는 아니다. 이 점에서 그는 수많은 다른 사상가, 지식인들과 근대적 가치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인 것은 어떻든 받아들여야 하는 ‘선(善)’일 수밖에 없고, 다만 그것이 민주적인 과정을 수반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물어보아야 할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근대화 혹은 ‘근대성’이라는 것이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 근대화 혹은 근대성이 진정한 ‘민중의 평화’와 양립할 수 있는가?

  마루야마 마사오의 경우, 식민지 지배 문제에 대한 그의 무관심은 어쩌면 그의 서구적 근대에의 뿌리깊은 지향과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식민지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구적 근대의 필연적인 산물이고, 서구적 근대와 그 근대를 모방한 모든 근대화의 과정은 풀뿌리 민중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공격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식민지 지배 혹은 식민지적 착취의 구조를 떠나서 근대화 혹은 근대성에 대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근대화 혹은 근대성이라는 개념 자체는 반드시 식민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시장시스템의 확산을 그 필수적인 요건으로 하는 근대화 혹은 근대성이라는 것은 세계 전역의 풀뿌리 민중 공동체들에게 한마디로 재앙이자, 홀로코스트였다. 오늘날 엘리트들의 감각으로는 수긍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이것은 콜럼버스 이후의 세계사가 증언하는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다.

  마루야마는 또한 메이지 시대 국가형성기의 주요 사상가, 민권운동가, 교육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찬미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후쿠자와는 동시에 당대의 대표적인 탈아론(脫亞論), 정한론(征韓論)자였다. 그러니까, 그는 일본이 근대적 국가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아시아적 정체성(正體性)을 벗어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일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엘리트로서의 마루야마 마사오가 이처럼 후쿠자와 유키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찬미했던 것은 단순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마루야마 역시 일본의 근대화에는 식민지 지배가 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후쿠자와나 마루야마는 둘다 식민주의와 근대성의 표리일체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여타의 사상가, 지식인들의 ‘순진성’에 비해서 훨씬더 냉철히 근대성의 본질을 투시하고 있었던 사상가였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시바 료타로 같은 작가의 ‘순진성’에 비한다면 말이다.

  흥미롭게도,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근대화의 과정을 ‘위업’으로 찬미했던 시바는 1996년 2월 사망하기 직전에 가졌던 한 대담에서, 오늘날 시장원리의 지배 속에서 황폐화하고 있는 일본사회의 현실을 개탄하고, 각별히 토지문제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였다. 그의 사후《주간 아사히》지에〈일본인들에게 보내는 유언〉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이 대담기록에서, 이와 같은 현실의 타개책으로 시바가 제안하고 있는 것은 ‘토지의 공유화’였다. 그의 말을 조금 들어보자.

 

  나는 경제를 모릅니다. 그러나, 사상만으로 오늘의 밭을 보아도, 노동의 가치라는 것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의 가치가 사라지고, 물건을 만드는 기쁨도 없습니다…이대로 일본 전국이 이렇게 된다면 우리들이 천년 이상 장구한 세월에 걸쳐 가꾸어온 모랄이 붕괴해버린다고 생각합니다…땅은 우리가 거기에 기대어 살고, 마지막에는 거기로 뼈를 묻는 곳입니다. 땅 위에서 인생이 있고, 역사가 전개됩니다. 땅은 우리들 모두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토지사유가 시작되었습니다…토지는 누구의 것도 아니고, 모두의 것이라는 윤리가 예전에는 있었습니다. 멀리로부터 돌아온 러시아인이 대지에 입을 맞추듯이, 일본국에도 멀리로부터 돌아오면 다시 밟아보는 땅의 온기를 느끼고 애국심이 생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후의 버블(거품)이 일어나서 토지는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습니다…자본주의는 멋대로 풀어놓으면 맹수와 같이 먹어치운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다음 시대가 오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내게는 있습니다. 이처럼 어둠을 만들어버리면 일본열도라는 땅 위에 사람은 거주할지 모르지만, 튼튼한 사회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적어도 토지문제를 윤리적인 의미로 결산을 해두지 않으면 다음 시대는 오지 않습니다. 토지투기를 쓰라린 마음으로 보아온 사람으로서 왠지 자포자기의 기분입니다.

 

  현대 일본의 이른바 국민작가가 생애 최후의 자리에서 이러한 절망감을 토로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시바는 오랜 작가로서의 생애 동안, 천년 넘게 계속되어온 일본정신을 찬미해왔고, 그런 맥락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의 성과를 바라보며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유포해왔다. 그런데, 생애 최후의 자리에서 그는 그러한 일본적 문화와 정신의 절망적인 붕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그가 보기에 일본 전역을 휩쓸고 있는 토지투기 바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토지의 공유화를 제창하고, 그러한 경제적-윤리적인 대혁신이 없으면 일본의 미래가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시바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현대 산업사회가 어디에서나 직면하고 있는 생태학적·도덕적 붕괴의 현실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가 개탄하고 있는, 토지가 투기상품이 되어버린 이러한 절망적인 현실은 바로 시바 자신이 그동안 찬미해 마지않았던 일본 근대화의 필연적인 귀결이 아닌가. 근대화의 추진은 찬미하면서, 그 필연적인 결과로 발생한 생태학적·윤리적 붕괴에 대해서 이렇게 개탄스러워한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또 생태적으로 건전한 근대화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서나 가능하다. 그런데, 되풀이하지만, 그런 근대화가 과연 있을 수 있는가.

 

 

  일찍이 식민지 해방투쟁의 선구적 이론가로서 프란츠 파농은, 서구 근대사회는 언제나 휴머니즘에 관해 말하면서 세계 전역에서 풀뿌리 민중의 평화로운 살림을 뿌리째 거덜내고, 거리낌 없이 토착민을 살육해온 역사적 현실을 응시하면서, 서구 근대와의 결연한 결별을 선언한 바 있다.

  그의 선언이 당장에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운명의 개선에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이제와서 우리가 근대적 가치와 제도와 관습의 테두리를 떠나서 생존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행복을 정말로 생각한다면, 근대화 내지 근대성이라는 것이 결코 무조건 떠받들고 옹호해야 하는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부단히 의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우리와 다음 세대의 단순한 생존의 가능성을 위해서도 이제 ‘근대적인 것’의 배후에 있는 근본모순과 어둠을 근원적으로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소수 엘리트 그룹을 제외하고는, 근대사회의 출현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대재앙을 예고하는 비극적 씨앗이었다.

  아시아에서 제일 빨리,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실현하였다는 자부심으로,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도 잊어버리고, 끊임없이 자기의 이웃을 멸시하고, 강자에 대하여 노예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오늘의 일본국가와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희극적이다. 이 희극성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자부심, 자긍심의 근거인 근대화의 ‘위업’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깊이 자각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재일코리안 역사가로서 김정미(金靜美)라는 이가 있다. 그는 어떤 기관에도 소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재야의 학자로서,《中國東北部에 있어서의 抗日朝鮮-中國民衆史序說》,《水平運動史硏究》그리고《故鄕의 世界史》와 같은 치열한 저술활동을 통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문제를 끈질기게 천착해왔다. 그는 일본이 오늘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사정을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즉,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로서 지배한 지역의 사람들에게 보상·배상을 한다면, 일본은 세계 최빈국(最貧國)의 하나가 될 것이다. 아메리카 제국주의가 베트남 인민들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서 정말로 보상·배상을 한다면 아메리카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가 될 것이다.”

  김정미 씨는 물론 여기서 제국주의로 인해 식민지 민중에게 끼쳐진 삶의 훼손이 얼마나 엄청난 규모의 것인가를 말하고 있지만, 그의 예리한 지적에 담겨있는 함의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가령 흔히 패전 후 잿더미에서 오늘의 일본경제가 부흥했다고 하지만, 그것도 우스운 이야기라는 것이다. 전후 일본경제의 부흥은 한국전쟁에 의한 특수(特需) 외에, 이미 식민지 지배를 통해 아시아 민중들에게 입힌 상해(傷害) 위에서 이루어진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정미 씨의 이 발언이 내포하는 궁극적인 의미는 이보다 훨씬더 심각한 차원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즉, 그것은 바로 오늘의 일본 혹은 미국의 경제도 계속해서 어떤 형태로든 제국주의적 식민지배의 구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를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는 한, 일본이(그리고 미국도) 진정으로 과거의 침략·지배 행위에 대해서 사죄를 한다거나 국가적인 정당한 보상과 배상을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현재와 같은 방식의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태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러한 방향전환은 일본이 아시아 속의 일원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겸허히 재발견하고, 이웃 나라들과 여하히 평화로운 선린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 비로소 시도될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방향전환을 위한 시도는 궁극적으로 일본에 국한된 과제가 아니라는 것은 굳이 여기서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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