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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화 1 - 동양의 마음과 상상력 읽기, 중국편
정재서 지음 / 황금부엉이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이 정신과 현실세계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의 가치회복에 대한 당위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면, ‘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화’는 신화의 서구적, 남성적 이미지를 걷어내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사실 그렇다. 이윤기씨의 부단한 노력때문만은 아니지만, 신화의 매혹적인 상상은 반쪽짜리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신화의 대명사가 되어 우리 삶에 녹아 있는 동양 신화의 흔적을 서서히 지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신화의 부흥이 또 다른 신화의 죽음, 상상력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니 뱀이 뱀의 꼬리를 삼키는 형상이 연상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런 대중적인 신화서적은 신선한 재미를 한껏 안겨준다. 아틀라스가 서구 세계를 떠받치고 있었다면, 동양 세계를 짊어진 반고는 죽어서 피와 살과 뼈로 세상이 창조되었다. 창조주에 의해 창조된 서양 세상과 비교되게 동양은 저절로 이루어진 세상(자연)이다. 소머리를 한 미노타우르스가 사람을 잡아 먹는 괴물이었다면, 소머리를 한 농경신 염제는 인류에게 풍요를 안겨준다. 인어 아가씨의 몸매를 상상하다가 인어 아저씨 ‘저인’을 보고 있자니 야릇한 당혹감이 밀려 온다. 거인족과 올림푸스의 전쟁보다 더 화끈하게 펼쳐지는 동양 신들의 패권 다툼은 인간 세계만큼이나 치열하고 냉정하다. 죽어도 굴복은 없는 치우, 머리가 잘려서도 투지만은 살아있는 형천 등은 기괴한 느낌마저도 들게 한다.
이렇듯 창조 신화, 전쟁 신화, 영웅 신화, 시조 신화 등 풍부한 이야기들은 전설, 전래 동화만큼이나 흥미롭고도 다채롭다. 비교대상이 있다는 것, 그리스 로마신화와의 차이점과 유사점이 한 눈에 들어 온다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외에도 여신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은 이채롭다. 창조와 치유의 여신 여와, 죽음과 생명의 여신 서왕모, 무산신녀, 그리고 유명한 견우 부인 직녀 등을 다루면서 여신의 지위가 유교 문화에 의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역사학적,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 또한 읽는 재미를 더한다. 추녀가 미녀로, 중심적인 신에서 남신의 주변으로 서서히 밀려나는 것을 보면은 ‘신화를 읽는 것은 인간을 읽는 것’임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시조 신화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정치적인 이유로 승자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여 인물과 신의 성향이 변형되고 있다는 점은 신화 또한 역사의 산물이란 것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은 이미지 자료의 다양함과 풍성함, 화려함에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전 이미지에서부터 현대 미술까지 책 곳곳에 배치하였다. 상상의 이미지를 좀 더 시각화하고, 역사적으로 접근하기에 책의 대중성을 가지면서 양서로써의 위신을 유지하는 등 편집, 기획에서 많은 공을 들인 티가 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