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공선옥 지음 / 당대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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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진보란 사회적 소수자 혹은 인간 개개인의 현실에 깊은 공감할 수 있는 능력’ 김규항의 B급좌파 중에서

소설가의 산문에서는 당연히 문학적 감수성이 묻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무너졌다. 한 진보주의자의 진보적인 글들만 가득하니 좀 의외였다. 소설가 공선옥씨에게 무슨 주의자라는 말을 붙이기 뭐하지만, 인간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한 아줌마의 진솔한 생각들은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 또한 치열한 삶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또한 평범함, 그 평범함이 치명적인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무관심, 지독한 무관심.

아무개씨는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다.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박봉으로 자녀들을 가르친다. 사회적 불평등에 불만이 많고, 정치적, 경제적 부정 부패, 부조리, 도덕적 해이에 대한 분노를 알고 있다. 그런데 어느날 지하철 노조의 파업이 신문, 방송을 장식한다. 경제도 어려운데 파업으로 서민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한다. 아무개씨 또한 같이 분노한다. 정부가 아닌 노동자에게 가시눈을 뜬다. 파업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또 어느날 장애인들이 이동권 보장을 외치며 지하철 운행을 막아 지옥철이 되어 버렸다. 역시 정부, 사회가 아닌 장애자에게 가시눈을 뜬다. 남한테 피해를 주면서 자신들의 주장만을 한다고 또다시 분노한다. 아무개씨는 불편에 대한 분노로 가득하다. 그들의 노동 환경, 파업의 이유보다는 단 며칠의 불편함이 우위에 있다. 그들의 생존보다 단 몇 시간의 불편함이 우위에 있다. 아무개씨는 사는데 있어서 자신에게 닥치는 불편과 부도덕, 불공정에만 ‘깊은 공감’을 하는 평범한 서민일 뿐이다.

공감에도 급이 있다. 일방 통행식의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그러한 기억을 되살리는 정도에서 머문다. 저런 것은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느낄 수 있는 정도의 감각과 기억의 공감이다. 외부를 향한 ‘구경꾼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것이 자신의 현실로 다가올 때만 움직인다. 그런 식으로 사회에 불만의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단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함이다.
진짜 사회를 움직이는 공감은 저 수준을 훨씬 벗어나야 한다. 저들의 생존과 고통이 나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는 것. 그럴 때 사회적인 공감이 형성되어야 하고, 이웃의 손길을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없는지,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고통 받고 있지는 않은지, 인권과 차별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내 안에서 뻗어나온 연대의식은 결국엔 자신에게 돌아와 커다란 힘이 되어줄 것이란 점을 안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살기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늘 사회가 변하길 바라면서도 변하지 않는 원인은 바로 ‘깊고 넓은 공감’을 하지 못하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울러 이웃과 동료를 경쟁의 대상으로 세뇌시키고, 자본을 맹신하게 만드는 국가 조직의 폭압성과 개인성을 말살하고, 끊임없이 국민성과 민족성을 들먹이는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고통으로 배를 채우고 있으니까. 그들은 우리 사회가 변하기를 바라지 않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아닌가.

차라리 사는게 차라리 거짓말이라면 그나마 낫다. 부정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거짓말이다. 거짓말 같으니까 문제가 된다. 뭐뭐 같다라는 것은 뭐뭐를 대신하고 있기에 뭐뭐는 정말 뭐뭐가 되버린다. 그래서 제목에서는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저항도 내포한다. 부정하면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두 둔 똑바로 뜨고, 맞서야 할 삶인 것이다.

가난에 대한 공감, 고통에 대한 공감, 불평등에 대한 공감. 과연 어느 수준에서 머물고 있는지 이 책이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그래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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