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픽스의 앵무새 - 세상 하나뿐인 앵무새 살리기
토니 주니퍼 지음, 이종훈 옮김, 박진영 감수 / 서해문집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살고 있는 동물들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 이런 관심은 다른 욕망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인간이 하고 있는 일에 다른 생물을 참여시키려는 욕구다. - 크리스토퍼 클라커 (동물원의 탄생 중에서)

‘난 그녀를 사랑해. 영원히 곁에 둘 것이야. 박제로 만들어서라도 소유하고 말겠어.’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접근을 삼가는 것이 육체적, 정신적인 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십중팔구 환자다. 이러한 만행을 짐승을 대상으로 하는 자들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너무 지나친 일일까. 하지만 그들의 짓거리는 낭만도 사랑도 아닌 파괴의 행위이고, 집착의 배설물일 뿐이란 것을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가장 단순한 진리는 생명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것에는 결핍만이 풍족할 뿐이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외부의 것을 탐닉하고, 집착하여 자기화 하려는 욕망만을 불태우는 것이다. 소유욕, 그것은 욕망의 재앙만을 예고한다.

이 책의 표지에 세밀하게 새겨진 아름다운 파랑새(스픽스금강유리앵무)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은 인간이다. 인간은 재앙에 가까웠다. 재앙을 막으려는 노력은 무명의 설움처럼 펼쳐진다. 틸틸과 미틸은 행복을 찾아 파랑새를 찾아 나섰고, ‘스픽스의 앵무새’의 저자는 파랑새의 멸종을 막기 위해 나섰다. 결과는 참담하다. 그러나 희망이라도? 앞으로도 지독한 운명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멸종이란 단어에 서려있는 비극성은 사실 언뜻 다가오지 않는다. ‘세계자연보존연맹 1만 1167종의 희귀 동식물 리스트 발표’, ‘지난 50년간 멸종된 동식물 800종 넘어서…’, ‘산호 2030년까지 60% 파괴 예상’, ‘영국서 20년간 나비 개체수 71% 감소’. ‘네이처 2050년 지구의 생명체 25% 멸종 예상’. 이러한 기사들을 보면 의아스럽게도 수치의 사실성은 사라지고, 추상적인 숫자로만 들린다. 수치가 수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도는 이유는 공감 능력의 결여, 감각의 후진성에 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면서도 내 앞의 대상이 살아있음을 못 느낀다면 과연 제대로 살아있는 것일까. 신경, 감각 세포가 모두에게 이어져 있지 않다고 해도 개체로써의 존엄과 가치는 측정불가, 훼손불가의 성격을 가진다.

‘생명의 대안은 없다’라는 말은 흔한 구호가 아닌 절규에 가깝다. 지구상에 태어나서 수만 수십만 년의 세월을 이어온 생명체가 단 몇 십년, 몇 백년 만에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다. 단지 소유하고 싶어서, 그렇게 얻은 만족감을 드러내기 위한 행위는 환경오염과 밀렵 같은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은근히 내비친다.

주변을 살펴보자. 다른 생물을 소지품으로 여기는 것은 너무 흔한 풍경이 되었다. 시장 바구니의 야채처럼 담아서 다니고, 염색 시키고, 거세 시키고, 꼬리를 자르고… 단지 미용을 위해! 나의 생활에 참여 시키기 위해! 밥 주고, 쓰다듬어 준다고 자기 만족을 짐승의 만족으로 착각하는 부류들은 그나마 귀엽게 봐줄 만하다. 최소한 애정이라도 있으니...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부류들은 오로지 탐욕만을 보여준다. 자본 확대를 위한 도구이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에 불과한 소모품으로 희귀새들을 다룬다. 절박한 상황이 오히려 그들의 힘과 위치를 격상시키고 의존해야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도 연출한다. 이 책 한 권에 담긴 기다란 여정은 곡예를 타듯 출렁거린다. 한 마리의 죽음, 또 한 마리의 죽음.

징글맞은 내용이고, 슬픈 현실이다.
‘세상의 종말이 닥쳤을 때 당신은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자신과 같은 종이 없는 세상에서, 마지막 남은 번식 본능만이 꿈틀 거리는 자신의 모습에서, 그 어떠한 대안도 희망도 없는 지구상의 마지막 인간이 되어 보자. 깨달음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다. 아니면 파랑새는 영원히 날아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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