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의 누


  

'혈의 누'란 '피눈물'이라는 뜻으로, 누구나 알듯이 이인직이 쓴 신소설이다. 하지만 이번에 개봉된 영화는 제목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몇 군데 서툰 부분이 눈에 띄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완성도가 높은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의 형식적 특성 분석은 내 한계 밖의 일이고, 영화의 서사 구조 혹은 주제 의식에 대해서만 몇 마디 하자.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릴 게다.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승들이 묵시록에 나타난 방식에 따라 7일에 걸쳐 의문의 죽음을 당하듯이, 영화에서는 수도원처럼 고립된 섬에서 사람들이 5일에 걸쳐 강객주 일가가 처형당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차례로 죽어간다. 이 연쇄 살인의 범인을 추적하는 수사관 원규는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윌리엄 수사라 할 수 있다.

장미의 이름을 고쳐 쓰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가령 소설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 영남 남인이 정조 대왕을 보필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다는 이 소설의 모티브에는 박정희와 그를 밀어준 영남 지역의 관계가 슬쩍 겹쳐진다. 한 마디로 에코의 포스트모던 소설의 모티브를 들여다가 졸지에 전근대적인 박정희와 영남 지역주의 찬양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영화 혈의 누의 에코 고쳐 쓰기는 그것과 차원이 좀 다르다. 거기에는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견줄 만한 예술적 성취가 있다. 영화에서는 강객주를 천주쟁이로 밀고한 다섯 명만이 아니라, 섬 주민 모두가 그의 살해에 가담한 범인으로 나타난다. 그뿐인가? 영화가 막판에 이를수록 관객들은 점점 불편해진다. 그의 살해에 섬 주민만이 아니라 자신들도 가담했다는 죄의식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에코는 어디선가 '독자가 범인이 되는 추리소설'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사실 강객주에게 진 빚을 탕감 받을 수 있을까 하여 그의 부당한 죽음에 침묵하는 섬 주민들은 우리들 자신의 비루한 모습이다. 게다가 강객주 자신은 어떤가? "신분이 아니라 능력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던 그도 제 딸과 머슴의 교제만은 허용할 수 없었다. "나도 딸 가진 아버지야." 이 또한 우리의 이중성 아닌가.

주민들은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다섯 번째 범인을 참혹하게 살해하려 한다. 그로써 행여 강객주의 원혼이 내린 저주를 씻을 수 있다는 듯이. "강객주여, 이 자의 피를 받으소서." 르네 지라르가 말한 '희생양 제의'. 하지만 이 잔혹한 제의에도 불구하고, 원혼은 주민들의 머리 위에 핏빛 비를 내린다. 아마도 그의 혈의 누, 처참하게 죽어가면서 흘린 피눈물이리라.

이 영화를 보면서 얼마 전 고려대에서 있었던 사건을 생각했다. 몇 년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려대 진입을 막았을 때, 대부분의 학생은 이를 통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학생들이 왜 이번엔 저토록 분노하는 것일까? 알량한 이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호화 호텔을 방불케 하는 최신식 건물.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후원과 졸업 후 진로의 상관관계. 게다가 대기업 입사율은 그 자체로 학교의 서열을 평가하는 주요한 기준 아닌가.

덕분에 삼성이라는 기업의 횡포에 흘려야 했던 노동자들의 피눈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직 히틀러만이 실현할 수 있었던 '무노조 경영'에 명예철학박사 학위가 수여되는 것을 지켜보는 인문학 교수들의 참담한 자괴감. 전직 대통령이라는 정치권력보다 더 막강한 것으로 드러난 거대자본의 위협 앞에서 느끼는 서민들의 공포감. 안암동의 섬 주민들은 이를 너그럽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들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학생들의 몸싸움.

"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어느 작가는 이렇게 물었다. 몰라서 묻는가? 거대한 것은 우리에게 분노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에 가로막힌 물이 제 갈 길을 찾아 우회하듯이, 분노의 흐름도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거대한 것을 피해 사소한 곳으로 흐를 수밖에. 학생들을 탓해서 무엇하는가?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맞고 처연히 서 있는 그들의 비루한 모습이 또한 우리의 모습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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