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신화를 통해 현대문명 사고하기....

신에 대한 도전
-“아테나와 아라크네 / 에리시톤 / 욥기”를 중심으로

바람구두(windshoes)


1. 아테나와 아라크네
- 신의 지혜와 인간의 기술

제우스는 티탄족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여신 메티스를 아내로 삼았는데, 메티스가 두 번째로 낳을 아들이 제우스의 왕위를 빼앗을 것이란 예언이 두려워 아내를 집어 삼킨다. 계속 두통을 호소하는 제우스의 두개골을 쪼개자 그 안에서 완전무장한 모습으로 아테나가 빠져 나온다.(아테나를 직접 출산까지 한 제우스는 여신 아테나의 부탁은 거절한 전례가 없을 만큼 총애했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도시 아테나를 탐낸 해신 포세이돈과 더불어 도시 아테나를 두고 인간에게 가장 유용한 선물을 준 신이 도시 아테나를 차지하는 경쟁을 했다. 인간에게 말(馬)을 준 포세이돈(말의 신이기도 하다)과 올리브를 준 아테나의 대결에서 아테나가 승리한다. 아테나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 기술들을 관장했고, 인간에게 그것들을 나눠주었다. 베틀, 바느질, 마름질, 염색, 자수를 가르쳤고, 도자기 굽는 법, 농부들을 위해 쟁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수레를 발명했고, 조선술을 개량해 주었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나팔을 발명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지혜의 여신이었다.

인간 아라크네는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단순히 육체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길쌈과 수  놓는 솜씨마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라크네의 이런 솜씨가 당연히 아테나 여신의 가르침 덕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아라크네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잘 나서 그런 것이라고 자랑했고, 심지어는 아테나와 겨루기를 해도 뒤지지 않을 것이란 자신감을 보였다.

참다못한 아테나가 노파로 변신해 아라크네를 설득하려 했으나 결국 아라크네(내 말은 내가 책임지겠어요)는 아테나의 분노를 사고 만다. 여신과 인간은 각자 길쌈을 해 승부를 겨루기로 했다. 아테나는 신들의 위엄이 드러나는 모습을, 아라크네는 불손한 마음을 담아 신들의 추태를 주로 담아 오만함을 드러냈다.

모욕을 느낀 아테나는 아라크네의 천을 찢어버린다. 그제야 자신의 오만함을 깨우친 인간 아라크네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고 만다. 아라크네를 불쌍히 여긴 아테나는 아라크네를 거미로 만든다.

Ex 1. )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아테네 사람이자 헤파이스토스의 후손인 다이달로스는 뛰어난 장인이었다. 그의 기술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은 헤파이스토스 이외에는 없었다. 그의 제자 탈로스 역시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생선의 등뼈를 보고 톱을 만들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자 다이달로스는 이를 시기해 탈로스를 살해하고 만다. 죄를 지은 다이달로스는 크레타로 달아나 미노스왕의 아내 파시파에가 욕정을 품은 숫소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커다란 로봇 암소를 만들어 주어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탄생하도록 했다. 은혜를 배신당한 미노스왕은 화가 나서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를 가택 연금시킨다. 다이달로스는 탈출을 위해 날개를 밀랍으로 붙여 하늘을 날아오른다. 그러나 아버지의 오만함을 닮은 아들 이카로스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너무 높이 날아올라 태양신에게 근접한 나머지 밀랍이 녹아 추락사하고 만다.

Ex 2. ) 바벨탑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은 대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후 노아의 후손들이 다시 시날(바빌로니아) 땅에 정착하여 세우기 시작한다. 이곳 사람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세우기로 하였다는데, 이들의 바벨탑을 세우고자 한 목적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탑을 쌓아올려 자신들의 이름(신의 이름이 아닌)을 떨치고 홍수와 같이 야훼의 심판이 닥치더라도 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야훼는 노아의 홍수 이후 다시는 물로써 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고, 그 약속의 표징으로 무지개를 세웠으나 인간은 믿지 않았다. 바벨탑은 인간이 야훼를 불신한다는 증표이기도 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야훼는 탑을 건축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언어를 혼동 시켜 멀리 흩어지게 하여 바벨탑의 건축을 중단시킨다. 그래서 이 지명을 바벨(Babel), 또는 바빌론(Babylon)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그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창세 11:9)는 내용이다.


2. 데메테르와 에리시톤
- 신의 사랑과 인간의 욕망

명부(冥府)의 왕 하데스에게 납치된 페르세포네의 어머니이기도 한 데메테르 여신은 인류에게 최대의 은혜를 베푼다 하여 올림포스의 신들 가운데서도 특히 숭배를 받는 대상이었다. (데메테르는 풍요와 곡물의 여신으로 전율과 기아의 신과는 대면조차 금지되어 있을 만큼)

그런데 인간 에리시톤은 신앙심이라는 것을 우습게 알고, 신을 업신여기는 인물이었다. 그는 데메테르에게 봉헌된 숲을 모조리 도끼로 제거하려 했고, 위엄 있는 나무를 찍어 없애라고 하인에게 명령하여 하인이 불복종하며 이를 가로막자 하인을 죽이고, 직접 도끼질을 한다.

분노한 데메테르는 기아의 여신으로 하여금 에리시톤에게 들어가도록 해 계속되는 허기로 모든 재산을 팔고, 마침내 딸까지 팔아치우려 들게 만든다. 에리시톤의 기아는 결국 자기 팔과 다리를 잘라 먹는 파멸의 과정에 이르러 목숨을 잃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Ex ) 탄탈로스
리디아의 왕 탄탈로스는 올림포스를 드나들며 신과 교류하고, 신들과 함께 “넥타르와 암브로시아(신들의 음료와 음식)”을 즐길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그런데 탄탈로스는 올림포스에서 신들의 음료와 음식을 훔쳐 지상으로 가져오거나 제우스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떠벌이고 다녔다. 스스로를 신과 유사한 존재로 생각했고, 그럴수록 더욱더 교만해졌다. 그는 자신을 초인적 능력을 지닌 인물로 생각했고, 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결과 도둑 판다레오스가 제우스에게서 훔쳐 온 황금 개를 제 집에 숨겨두고도 제우스의 이름을 걸고 황금 개를 숨겨두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심지어는 신들을 시험하기 위해 제 아들인 펠롭스를 토막내 음식으로 만든 뒤 신들에게 음식으로 내놓기까지 한다. 분노한 제우스는 그를 명부의 호수에서 목만 내밀고 있게 한 뒤 타는 듯한 갈증에도 불구하고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숙이기만 해도 호숫물이 빠져버리고, 나무에 과일이 주렁주렁 열려 그가 손을 내밀기만 해도 바람이 불어 가지를 높이 들어올리도록 하는 벌을 내렸다. 탄탈로스는 너무 많은 행복을 누렸으나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지 못한 죄로 더욱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3. 야훼와 욥
- 신의 결정과 인간의 의지

신실한 믿음을 지닌 욥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그는 많은 아들, 딸을 두어 가정이 화목하고,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 야훼조차 사탄에게 욥의 신실함을 자랑할 정도로 그의 믿음은 두터웠다. 사탄은 하느님이 주신 넉넉한 것들 때문에 당연히 하느님을 칭송한다며 욥을 시험에 들게 하도록 한다. 야훼는 욥의 몸에 해를 가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시험을 허락한다. 사탄에 의해 모근 것을 빼앗기는 고통 속에서도 욥은 입술로 죄를 짓지 않는다.

욥의 세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하자 욥은 감히 신을 원망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저주한다. 엘리바즈, 빌닷, 소바르의 거듭되는 충고에 욥은 계속 자기 자신만을 저주(비난)하며 하느님께 기도한다. 세 친구들과 말(입)으로 논쟁하여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는 욥을 괘씸하게 생각하는 엘리후는 하느님보다 옳은 체 하는 그를 비난하여 하느님은 온전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건 (무조건) 옳다. 모든 것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에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주장한다.

야훼 하느님이 나서 말하길 모든 것은 가치 판단(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전능하신 이와 변론하는 자야, 어찌 물러서려느냐?"(40장 2절) 야훼는 욥의 친구들은 하느님의 이야기를 할 때 욥처럼 솔직하지 못했다며 욥에게 전 보다 더 많은 것들을 돌려준다. 인간(욥)이 무엇인가 소유하는 것은 인간의 결정이 아닌 신(자연)의 결정이다.

Ex ) 시쉬포스
시쉬포스는 타르타로스에서 엄청난 바위 덩어리를 그가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다시 산 밑으로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무의미한 작업을 반복하는 영원한 형벌을 받았다. 물론 시쉬포스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교활한(지혜로운) 자라는 표현을 얻을 만큼 영리한 인간이었다. 그는 대도(大盜) 아우톨뤼코스보다도 영리해 잃어버린 소떼를 되찾고, 소떼 이외에 대도의 딸까지도 납치해 훗날 오디세우스를 낳는다. 그러나 시쉬포스는 프로메테우스, 탄탈로스 만큼 큰 죄를 지은 적은 없었다. 다만 그의 동생 살모네우스가 제우스의 모습을 변장해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천지를 돌아다니며 여자들을 유혹하다 제우스의 번개를 맞아 죽은 적은 있었다. 물론 죄가 있다면 제우스가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을 납치하려 했을 때, 이를 아소포스에게 알려줘 제우스의 욕망을 방해한 적은 있었다. 그의 영리함은 너무나 뛰어났기에 제우스는 시쉬포스를 타르타로스에 가둬두려고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낸다. 시쉬포스는 타르타로스를 속여 도리어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두었다. 타르타로스가 묶여 있게 되자 더 이상 아무도 죽지 않게 되어 신들은 전쟁의 신 아레스를 보내 죽음의 신을 구출하게 만든다. 결국 시쉬포스는 죽어 저승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자 시쉬포스는 아내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도 절대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말한다. 지옥에 내려간 시쉬포스는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에게 자신의 아내가 장례를 치러주지 않으니 잠시 말미를 주면 아내에게 장례를 치르도록 야단치고 돌아오겠다고 말한 뒤 지상으로 올라갔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신들 가운데 가장 영리한 헤르메스가 나선 뒤에야 그는 지옥으로 끌려가 바위를 짊어지는 형벌을 받는다. 알베르 까뮈는 이런 시쉬포스에게서 인생의 부조리를 끌어내, 정당한 이유가 결여된 삶에서 모든 것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절망하지 않고, 항상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과정에서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4.  결론: 신화의 서사구조를 통해본 신과 인간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애니미즘이 사물을 정령화 했다면 산업주의는 영혼을 물화한다”고 말한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계몽의 목표를 추구해왔다. 노아의 홍수라는 자연 혹은 신의 징벌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인간은 바벨탑을 세우려 했고,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죽음의 신 타르타로스를 쇠사슬로 묶었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혜택을 망각하고, 끊임없이 숲을 개간하고, 자연으로부터 얻은 사랑(자원과 기술)을 망각하고 욕보였다.

스스로를 신과 대등한 존재로 생각한 인간은 로봇 암소를 만들어 짐승과 결합하도록 하여 반인반수를 만들어 냈고, 그 교만함은 하늘을 찔러 태양신의 영역까지 날아올랐다. 인간의 이성은 자연의 본성과 행복한 결합을 이룰 수 없도록 방해했다. 지식의 목표는 ‘방법’,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고 좀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법으로 변질되었다.

1) 신성이 깃든 자연(아테나와 야훼 등, 즉 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 주었으나 인간은 이를 겸손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2) 인간(아라크네, 다이달로스, 바벨탑의 인간)은 자연이 베풀어준 원료와 자연으로부터 깨우친 지혜를 통해 길쌈과 기술을 익혔으나 교만하여 신에게 저항하거나,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을 저질렀고, 신과의 약속을 부정하고, 다른 인간의 은혜에 배반을 일삼았다. 3) 인간은 언어를 통해 지혜를 얻고, 무리를 지어 기술을 전수했으나 이것은 자연과 더불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사회를 일구고, 자연을 배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계몽의 합리성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인간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부정하는 탈신화화의 길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어쩌면 계몽의 제물이 된 신화도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 신화는 모든 가르침의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신화적 상상력에 반대하는 계몽의 원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가 되었고, 하늘 아래 더 이상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었던 인간은 자신들의 이성을 통해 이미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쳤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발견했으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신화가 죽은 것을 산 것과 동일시한다면 계몽은 산 것을 죽은 것과 동일화한다.(신화의 세계, 자연, 사물을 생명을 지닌 대상으로 취급한다면 계몽은 자연을 죽은 것으로 취급하여 이용과 정복의 대상으로 대한다.)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entropy)』를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물질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지리와의 합일을 도모하여 여기서 얻는 만족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적인 해방감을 체험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엔트로피는 열역학에서 말하는 ‘열역학의 제2법칙’을 말하는데, 제1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외부와 에너지의 출입이 없는 경우 어떤 물리계의 전체적 에너지는 에너지가 다른 형태로 전환되더라도 변하지 않고 보존된다.’는 것이다. 제2법칙 ‘엔트로피의 법칙’은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하기만 할 뿐 줄어들지 않으며 물질과 에너지는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만, 또한 질서화된 것으로부터 무질서화된 것으로만 변화한다.’는 것이다.

400여 년 전 베이컨과 데카르트, 뉴턴에 의해 구축된 ‘객관적 지식이 있으면 인간은 자연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세계관(패러다임)을 통해 산업혁명이 가능했고, 끊임없는 성장과  한계 없는 진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리프킨은 이와 같은 세계관에 의한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은 엔트로피(entropy)를 증가시켜 각종 자원이 고갈되고,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지구 온난화 현상과 지각변동에 의한 기후변화 등 심각한 문제들을 빚어내고 그 결과 자연은 회복 불능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리프킨은 문명비판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할 것을 제의한다. “세상은 갈수록 혼돈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떤 일도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어서 여기저기서 끝없는 수선과 짜깁기의 연속이다.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사건이 터진다.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몰아 붙여 탓해 보아도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기만 한다. 정치권의 리더나 누구 대단한 사상가라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붕괴로 몰고 가는 냉혹한 기운이 세계를 잠식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세계관에 대해 냉철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세상을 병들게 하고 그 속의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주범은 바로 우리들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화적 사고와 세계관이 중시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5. 질문들
1) 야만적 상태(자연에 대한 공포 등)를 벗어나고자 한 인간의 지식(기술)은 새로운 야만적 상황을 만들어내는가?

2) 인간의 욕망은 이성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가?

3) 자연의 본성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자연과의 합일을 해치는 방향으로만 나가는가?

4) 인간의 행복은 물질문명, 기술적 진보에 의해서만 가능한가?

-----------------------------------------------------------------------

* 얼마전 만난 이에게 신화를 과학과 결부시켜 설명하는 작업들을 해보고 싶단 이야기를 했는데, 많이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화의 서사구조를 해체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끄집어내고자 하는 시도는 지금까지 많이 있었으나 대개는 예술과 결부시키거나 문화인류학적인 차원에서 보았는데, 나는 그것이 지닌 의미를 현대 사회와 문명 그리고 생태학적 사고와 더불어 물질문명에 대한 대안을 찾고자 하는 과학적 시도와 밀접한 연관을 맺은, 즉 세계관의 변환을 가져올 무엇으로 보고 싶었다. 물론, 지금 이 글은 발제를 위해 대충 쓴 것이긴 하지만... 그 분께 나의 대답 혹은 내가 신화를 공부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를 보여주는 글은 될 수 있을 듯 싶어서 올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