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프 -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
메리 로취 지음, 권 루시안 옮김 / 파라북스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적 충만감이 끔찍하게 차오른다.

아침마다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는데, 심하게 곤혹스러웠다. 제목대로 사후 경직된 시체가 주인공인지라 겉 표지에 있는 시신의 하얀 발부터 속을 울렁거리게 한다. 시신이 가지는 문화적 상징을 떠나 세밀한 묘사와 ‘적절한’ 비유가 가득하여 원치 않는 상상의 날개를 절로 달게 된다(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진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질병, 사고, 불행, 혐오의 상징인 시체를 담은 이 책을 굳이 읽은 이유는 지적 충만감이 주는 황홀함을 피해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가 종교적인 관심사였다면, 사후 처리되어야 할 육신은 사회적 관심사이다. 수없이 많은 탄생 뒤에 찾아오는 죽음은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될 만큼의 시사성을 가진다. 뉴스기사로도 가끔 등장하는 묘지가 매년 여의도 면적의 몇 배 만큼 증가 한다는 둥, 화장터, 납골당 유치 문제로 지역주민과 마찰이 있다는 둥. 인간은 죽어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한국의 상황과는 연관성이 없는 듯 하면서도 어느 정도 관련성이 있게 이 책은 시신의 유용성과 다양한 사후 처리를 말한다. 해부 실습용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장례절차를 거치지 않는 망자들의 다양한 행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 소개된 예를 언급하자면, 충돌 실험용, 해부 실습용, 탄도 실험용, 종교성을 띤 십자가 실험, 기요틴으로 참수 된 시체를 이용한 머리 이식, 의료용 식인행위, 퇴비 등의 예는 죽음 뒤의 세상을 실험실로 연상케 한다. 자르고, 베어내고, 찢고, 드러내고, 안구에 강한 충격을 주고, 총을 쏘고, 장기를 적출하고, 피를 뽑고, 펌프로 대동맥에 방부액을 밀어 넣고, 심지어 간다. 이쯤 되면 좀비, 슬래시, 스플래터, 하드고어 영화가 떠오른다. 비슷하긴 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책에 나오는 시체는 얌전하고 사전에 동의를 했다는 점(유족 또는 본인)이다.

기증이라는 절차를 거쳤으므로 잔인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끔찍함은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자연적인 분해과정(범죄 수사를 위한 사체 연구소의 실험), 방부 처리하여 장례를 치르는 과정 또한 HDTV급의 선명한 묘사를 하며, 미적차이는 별로 없다고 너스레를 떤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레닌처럼 깔끔한 박제(미적으로 뛰어난)가 되려면 어느 공장의 생산라인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 아닌가.

일단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다르게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얇게 저민 살(삼겹살이라 명명된), 벗겨낸 피부(돼지 껍질), 머리와 발(머리고기와 닭발, 족발), 살아있는 채로 살을 발라내고(회), 배를 가르고, 뼈를 몇 시간동안 삶는다. 고추장도 모자라 온갖 자극성 있는 물질로 잘 버무려지는 대상들 또한 살아있었던 생명체인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인식, 감성적 반응을 무뎌지게 하는 작업이 꼭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물론 인간에 대한 위대한 휴머니즘, 존중을 유지한 채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들(의사, 연구원, 장례업자 등)은 이러한 과정을 거쳤음은 물론이다. 결코 즐겁지 않은 일들을 계속 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익숙함과 식상함이란 신이 준 선물 중 하나가 아닐까. 저자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섬세하게 적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녀의 눈과 귀는 인식의 전환을 이끄는 엔진이 된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기능의 중추를 인터뷰가 담당하고 있는데, 꺼림직한 일을 하면서 느끼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다큐멘터리만큼의 사실성과 현장감을 전해준다.
‘의학도들은 해부학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대면 하기도 한다. 또한 존중과 동정이 아닌 스스로를 무뎌지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무의식적 동일성 상실은 인간이 자연과의 격리에서 오는 고립에 근거한다. 유일하게 그 끈을 이어주는 것이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한 저승행 열차를 타는 순간인데, 인간이 가장 당황스러워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인간다움’을 가장 훼손당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불경에 ‘염처경’을 보면 시체를 곁에 두고 가르침을 받는 부분이 나온다. 시체는 썩어가고 승려는 어느 순간 한줄기의 미소를 짓는다는데, 육체의 덧없음을 깨닫는 수행이라고 한다.

덧없는 육체,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자는 식의 뉘앙스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죽은 사람이 사람을 살린다면 이야기는 틀려진다. 시체의 유일한 재능은 고통을 받아넘기는 재주 아니던가. 그러한 재주 때문에 당신의 안전(안전 벨트, 에어백의 안전성은 그들이 검증했다), 당신의 생명(장기 이식 또한 그들이 주는 새 생명)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 이 책의 주목적이다. 이것을 안다면 감동은 아니더라도 이해는 하게 된다.

의학, 범죄, 과학, 역사 등을 아우르는 입체적인 통찰을 보여주면서도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위험스럽고, 혼란스럽다. 뇌사자가 죽음에 가까운가, 생에 가까운가를 따지는 일 만큼이나…
‘삶과 죽음 사이에는 가사상태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과 죽음 사이에 있는 것을 바라지 않죠.’

말없는 시신이 유일하게 말하는 것은 죽음이다. 그것을 연구함으로써 죽음을 밝히는 과정은 부담스럽지만, 생의 조건(유감스럽게도 죽이는 조건도 부수적으로 밝히는)을 밝히는 빛이다. 불교의 덧없음과 살포시 맞닿아 있기에 절묘한 양립이 경이적인 이 책은 겉 표지와는 다르게 경쾌하게 쓰여져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죽음에 대한 정의는 물론이고 이성적, 감정적으로 바라본 장기기증에 대한 이율배반적 인식이 조금은 달라질 듯 싶다. 끔찍하게 재미있으니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다 읽고 나서 가장 놀라는 일은 처음과 다르게 사람을 꿀에 절여서 약재로 쓰는 밀화인(본초강목 기록된)이나 약재로 미이라나 사람을 먹는 행위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마냥 신기해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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