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읽는 이에 따라서 거북한 느낌이 드는 책일 수 있다. 학자다움이 물씬 풍기는 뻣뻣한 한자 어휘들(외국 학술 용어의 어색한 ‘한국화’)과 문장들은 매우 건조하다 못해 지식인들의 고매한 정신까지 풍부하게 담아냈으니 반은 실패했다고 본다. 게다가 이 책은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개인적인 연구 결과물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쓴 글이라면 좀 더 대중적인 글쓰기를 보여줬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학술적이지도 않으면서 대중적이지도 않은 어정쩡함이 보이는 주석과 각주의 인색함은 이해를 떨어뜨리고, 집중을 방해한다. 게다가 여기저기에 실렸던 글들의 난잡스러운 짜집기 구성은 지루함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본문은 이 책을 위해서 쓰여진 글들이 아니라, 이 책을 내기 위해서 급조된 스크랩이라는 느낌이 들만큼 동의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 감내할 수 있다면 나머지 반의 성공은 인식의 재발견, 전환이라는 커다란 파괴력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공론화 되어(어느 정도 되어있긴 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일반 대중들에게도 성찰의 기회로 작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컨텍스트가 양적으로도 풍부하고 질적으로 양질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실 거북한 느낌이 드는 진짜 이유이면서 이 책의 중요한 화두는 일반 대중에게 침투되어 있는(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에 오염된) 권력 담론의 헤게모니에 대한 대중의 불감성과 종교적인 맹신에 대한 질타에 있다. 제 기능을 못하는 심장에 전기충격이 필요하듯이 의식의 흐름이 정체된 것에도 뼈아픈 질타와 자각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러한 역할을 한다. 죽어가는 육신을 깨우는 전기충격이며, 죽어가는 사회에 울리는 경종이다. 따라서 그의 국사 해체론과 반민족주의 외침에서 ‘한민족 반만년 역사’만을 가르치는 국정 교육에 대한 반란이며, 그러한 교육을 받고 그렇게 믿어온 대다수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면 ‘내 안의 민족주의’에 대해 회의하고 성찰 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도대체 내 안에 있는 그것이 무슨 짓을 하길래 이 책은 같은 주제를 반복적으로 빼곡하게 적어놓았는가?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국제 사회의 관계,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 한 국가 내에서의 다층적 구성원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권력 담론의 본질을 파악하여 서구적 근대화에 종속되고, 억압 받는 주체들의 자각과 해방을 촉구하고 그 당위성을 역설한다.

예를 들면, 제국주의의 반발로 일어난 저항 민족주의는 서구식 근대화 논리 안에 존재하여 서구 중심에 결국에는 인정 받고 편입되려는 욕망을 분출한다. 그러면서도 상대 진영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려고 한다. 따라서 서로의 '존재'는 '서로의 존재'를 보장하고, '적대감'은 각자의 논리와 힘에 '정당성 증대'를 의미 하게 된다. 같은 논리 위에 같은 목표를 가진 이원적 관계이기에 시오니즘과 나치즘, 미국의 패권주의와 이슬람의 테러리즘, 박정희식 민주주의와 김일성식 사회주의, 일본과 한국, 중국에서 보이는 민족주의 등의 모든 것들의 공통분모를 ‘적대적 공범자들’이라는 용어로 함축할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의 근본은 무척이나 단순하다. 집단에 대한 의지와 목표의 획일화를 통한 권력의 획득. 그것을 통한 인간 욕망의 충족에 있다. 그렇게 탄생한 인간 사회는 구성원들의 욕망의 총체적 결정체란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커다란 힘은 더 커다란 공동체의 응집력에 달려있다. 기본적으로 권력은 성장을 지향하고(거대성이 주는 거대한 영향력), 인간들은 그것에 지지를 보낸다. 권력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추구하는 욕망의 충돌은 우리 사회와 인류 문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복잡도를 증가시킨다. 복잡도와 인지 능력의 반비례성을 고려한다면, 이 책은 가장 근본적이고, 단순한 비판이지만, 가장 어려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서 있는 논리 자체를 부정하여 새로운 대안을 세우려는 노력은 우리의 상식의 벽을 넘을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커다란 짐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이 문제는 더욱 커진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사생아’인 민족 분쟁의 끝은 보이질 않고, 일본의 식민지로 영원히 남고 싶어하는 ‘세습적 희생자 의식’에 노예가 되어버린 ‘민족성’에, 위대한 반만년 역사는 그 속에 민중을 파묻어 버리고, 서구적 극단적 근대화인 ‘세계화’에 맹렬하게 돌진하는 한반도의 오늘은 말 그대로 ‘적대적 공범자들의 종합세트’이다.

특히 약소국의 위치(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보면 꼭 그렇지 않은)를 끊임없이 재확인함으로써 민중의 집단 의식(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을 고착화 시켜버렸다. 집단 의식은 권력의 좋은 먹잇감 아니던가. 이질성에 대한 거부감은 순수함을 추구하고, 혈통에 대한 집착은 순수하지 못한 것(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억압의 당위성을 이미 내포한 상태를 지닌다. 그래서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냉전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외부의 적을 내세워서 내부의 결속을 다져오지 않았던가. 그러한 결속에 의해 잘려나가고 무시되어 온 담론들이 많을수록 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한다. 나치즘, 시오니즘은 이를 증명했고, 그 결과는 참담한 역사를 낳았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일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게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국가, 민족, 인종의 신성화, 집단에 대한 헌신과 적에 대한 무자비한 증오, 대중의 열광적 지배자 숭배’

이 낯설지 않은 단어들의 나열. 박정희의 망령들은 아직도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경제 성장이라는 선동을 이끌고, 대중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놀이판을 장식한다. 인종, 민족, 젠더의 소수자들을 냉철하게 타자화하고 배제시키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쯤에서 권력 담론의 본질적인 성찰과 물음이 왜 필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국가와 국민, 억압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분류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바이러스만큼이나 강력한 변종을 생산해내어 곳곳에 파고드는 권력의 식민화를 쉽게 떨쳐낼 수는 없다. 도리어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참여 정부라는 슬로건을 내건 정부의 과거사 청산이 가진 문제점이 바로 이 부분에 있다. 권력의 영향력은 대중의 암묵적 또는 적극적인 지지 없이는 발휘될 수 없다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오직 국가 권력에만 물을 수 없는 이유는 그러한 정부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어, 경제 개발이나 국가 안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일반 대중과 합의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었다는 점이다. 집단적 유죄를 묵과하고 소수에게 그 역사의 짐을 맡기는 것은 권력 본질에 면죄부를 주어 좀 더 세련되고, 은밀한 대중의 억압기제의 출연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 논리의 틀을 공유하고 있으면서, 동원된 대중을 전면에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을 자연스럽게 합리화하고 키우고 있는 참여정부를 향한 대중의 비판적 시선은 반드시 필요하다.

집단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획일화의 강요를 통한 권력 담론의 폭력성은 내 안에서부터 국제 사회에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외부에 드러난 것은 강력한 저항으로 소멸하기 쉬우나, 전산학에서 말하는 ‘은닉화’, ‘추상화’와 같은 가공을 거치면 그것은 영속성을 띠게 된다. 이 책은 해체논리를 펼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실효성을 논하지도 않는다. 다만 ‘타자화 된 시선’의 폭력성을 알리고, 각자의 삶 속에 스며든 권력의 헤게모니들 속에서 무엇을 성찰해야만 하는가를 깨닫게 할 뿐이다. 같은 논리 위에 존립하는 이상 우리는 모두 공범자이다. 그러한 틀을 깨기 위해서는 감춰진 것을 드러내어 해방을 위한 다각적인 대안을 모색하여 다층적 사회의 수평적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지현 교수의 학문적 성과와 노력은 격찬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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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2 2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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