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정문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과 이 책을 같이 읽으면 의미 있는 독서가 될 것 같았다. 그러한 생각은 옳았고, 지울 수 없는 감격을 안겨주었다. 이 두 권의 책은 전쟁을 다루는 저널리즘과 그것에 노출되어 있는 대중과의 관계, 대중의 역할을 숙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니지만, 말하는 주체와 말하려는 목적의 차이로 인해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사고를 하도록 도와준다.

대중-포토저널리즘-전쟁의 구도를 가진 전자는 저널리즘의 무차별 폭격에 무감각해지는 대중의 각성을 전쟁터 밖에서 이야기하고 있고, 대중-전선기자-전쟁터 구도인 후자는 저널리즘의 최전선이자 전쟁의 현장에서 16년간을 기록한 눈과 귀를 대중에게 빌려준다. 물론 이러한 간접경험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고, 위험은 늘 따른다.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왜곡과 은폐가 진실을 가리고, 전쟁의 선전도구로 악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두 권의 책은 이성과 감각의 마비로부터의 해방을 외친다.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하게 하려는 노력이 진실되기에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사실 전선기자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사진기를 들이대는 기자를 보면 기계적이고 상업적인 악취가 났다. 군대가 총으로 그 사람을 쏘았고(Shot), 기자는 사진기로 찍는(Shot) 것은 확인 사살에 가까웠다.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죽음 주위를 맴도는 그들은 분쟁이 일어나는 어느 곳에서건 게걸스럽게 찍어댔다. 어떻게 보면 군대와 전선 기자는 공생관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퓰리처상이 탐이 나서? 아니면 기자로써의 명예욕 때문인가? 그래서인지 저자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자 서두 부문에 황색 저널리즘에 대한 반성, 전선 기자의 역사와 오점, 전시언론통제에 휘둘린 현실을 고발한다. 서두에서 얻은 결론은 전선 기자는 인류의 인류에 대한 학살과 반인륜적인 범죄를 만인에 고발하는 고발자이고, 군대의 공공연한 적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렇게 많은 기자들을 저격하였고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장점 중의 하나는 제 3세계의 분쟁, 언론 관심 밖의 전쟁에 대한 간결하고 정확한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CNN이 넘겨주는 영상만을 충실하게 전달했던 국내 언론사, 방송국에 의지했다면 의아해 할 만한 부분들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내용들이었다는 반증의 의미를 가진다.

또 다른 장점은 누군가의 처절한 경험은 좋은 이야기꺼리가 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생을 이야기 해도 마르지 않는 샘을 가지고 있는 셈인데, 당신의 목숨을 보장 못하는 경험일 경우라면? 그것도 16년간이나. 이 책이 매혹적인 이유는 바로 이야기꺼리의 풍성함에 있다. 처절한 역사의 현장을 16년간 차곡차곡 쌓아놓았으니 얼마나 할 말이 많을까. 기자 개인의 역사이면서 세계 분쟁의 역사인 두 역사의 버무림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16년치 이상의 전율과 분노를 던져준다.

더러운 전쟁이 아닌 것은 없다지만, 저자가 경험한 참상은 말할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킨다.
400만 인구의 라오스에 700만개의 폭탄을 쏟아 부었고, 지금도 불발탄이 계속 터져 살아있는 모든 것을 적으로 삼았던 미국의 비밀 전쟁.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갔지만,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로 삼았다’ 미군 폭격기 조종사의 증언만큼이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수십만의 민간인을 살해한 캄보디아 킬링 필드.
제주도의 역사와 비슷한 인도네시아의 발리 학살, 폭격으로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은 코소보 내전 등은 믿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왜곡되거나 은폐되었다는 사실이다. 라오스에 떨어진 700만개의 폭탄은 주인이 없으며, 영화 킬링필드에 의해 미국에 의한 학살은 없어졌고, 잔혹한 역사의 단면들이 종교적, 인종적, 정치적인 해석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범죄를 누가 심판할 것이며, 누가 책임질 것인가. 비참하게도 미국에 의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가 화염에 휩싸이는 것을 막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일을 막지 못할 세계 시민 사회는 이기적이고, 무능하다. 이 비루한 인생들이여. 죽음보다도 더 차가운 암흑이 드리워진 세상을 살아내기란 고역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의 평화를 지켜준다는 것은 나의 평화 또한 누군가가 지켜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관심어린 시선으로 늘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일일 것이다. 이웃의 평화 없이는 나만의 평화가 없다는 진리가 언제쯤 인류를 깨울 수 있을까. 답답함이 밀려온다. 저자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일까. 책의 뒷부분은 격정적인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 기자의 신분에서 벗어나면서 그 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것이 넘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버마학생민주전선에서 학생군들과 성장하고 아프가니스탄의 판쉴의 사자 마수드처럼 기자로서의 삶을 마친 저자는 역사의 산 증인이자 고발자이고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동티모르에 내가 남긴 것은 마지막 눈물이었다. 다시는 전선기자로써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맹세였다’ 361p

그 눈물에 담긴 정서를 이해할 수 있다면 희망은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기에…

‘나는 그 소녀들이 죽지 않고 살아 남아, 평화로운 세상에서 방아쇠를 쥐었던 그 손가락에 고운 꽃물을 들이는 풍경을 보고 싶음 따름이다. 나는 그 소녀들이 시집도 가고 아들딸도 낳고, 그렇게 잘 살 수 있게 되는 날을 기도하면서 이 글을 썼다.’ 347p

잘 살 수 있게 되는 날을 기원하는 많은 이들의 뜻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