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성,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의 울타리는 인간을 구속하는가? 인간을 지켜내는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공포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진실을 비추는가? 허상을 비추는가?

누군가의 처절한 경험은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는 바람같이 스쳐간다. 스침과 겹침에 대한 판단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이 소설은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의 시선(마치 birds-eye shot같은)을 미세하게 느낄 수 있는 실험이자 처절한 생존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이것은 모험을 가장한 고행이다.

 

이 소설의 구성을 굳이 따져보자면 가설, 실험, 정리 3단계로 볼 수 있는데, 파이 이야기의 1부는 동물과 인간에 대한 가설들을 나열한다. 동물원 동물들의 섬세한 생태, 동물들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로 포장된 인간의 시각, 인간들의 종교적 배타성과 그 경계면에서 서로의 위치 등을 확인한다. 그 안에서 주인공 파이의 정체성은 서서히 드러나고 본격적인 실험에 투입될 준비를 마치게 된다. 불가지론은 없다. 그러나 확신 또한 없는 주인공은 거대한 운명과 진리 앞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전진한다.

2부에서는 실험이 강행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난파당하고 가족을 잃는다, 게다가 세상에서 가장 넓은 감옥인 바다에 맹수와 함께 던져지게 된다. 음식물의 부족, 자신 앞의 맹수,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지혜롭게 맹수와의 공존을 모색하게 되는데, 서로의 영역과 서열(인간 역시 짐승의 습성을 갖고 있지 않던가)을 구분하고, 서로간의 확실한 존중과 먹이 분배를 통하여 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치열한 노력을 보여준다. 공포는 죽음이 만들어낸 허상이지만, 희망의 소멸은 죽음 자체에 이른다. 맹수와 인간은 서로의 희망이자 생의 끈임을 확인하고, 구원을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길고, 험난했던 실험을 끝내고 구원의 품에 안기게 된다. 구조가 아닌 구원이라 하는 이유는 육체를 지켜낸 것 이상의 것을 발견해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얻은 깨달음은 신과 인간을 통찰한다. 또한 이성의 허망함, 인식의 재발견, 사실과 현상에 대한 판단의 주체와 목표에 대한 회의는 나를 구원하는 손길이 되어 준다.

 

마치 정반합의 커다란 틀을 형성하듯이 구성된 이 소설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신과 믿음, 사실과 거짓, 앎과 무지에 대한 경계를 허문다. 존재함으로써 믿어 지는 것이 아닌, 다가감으로써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존엄성의 의미를 캐낸다. 조작된 공포에 의해 얻은 진리는 생의 의지만큼이나 숭고했기에 파이 이야기는 흡입력이 있다. 그 중심에는 인간의 기만적인 경험맹신주의에 대한 조롱도 포함되어 있다. 인지 할 수 없는 너머의 가치와 진실에 대한 외면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파이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파이 이야기가 아닐까.   

절대 3.15를 넘을 수 없지만, 영원히 3.15에 다가가는 무한한 수. 그것의 영속성은 그 자체로써 충분히 감동적이고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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