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마치 에밀레종의 울림처럼 처음엔 강하게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이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글을 보았으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상태를 에밀레종에 새겨진 명문이 대신한다면 적절하겠다.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인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나니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하며, 진리의 소리가 천지간에 진동하여도 그 메아리의 근본을 알지 못한다. ~ 중략 ~ 그 메아리가 끊이지 않으니 장중해서 옮기기 힘들며,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

많은 SF 작품을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마니아 요소가 강한 SF 소설의 깊이와 폭의 확장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섬세한 상상은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과학적 엄밀성을 내포함으로써 현실의 시뮬라크르를 만들어 낸다. 현실이 가질 수 없는 ‘대안의 상상’ 속에는 실제 모델을 뛰어넘는 역동성과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 신화, 종교, 언어, 수학, 심리 등 수많은 분야를 아우르고, 조합하여 탄생한 각 단편들에서는 지적 사고의 실험이 현란하게 펼쳐진다.

간략하게 내용을 소개한다면, 땅을 파고 들어가 듯이 하늘을 파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맞이한 세계상이 던지는 허무함.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자기 굴레적 삶과 세계를 보여준 [바벨론의 탑]. 수학적 사고의 결함을 발견한 수학자의 혼돈이 주는 진실성과 확실성에 대한 회의적 시선과 공감을 통하여 수학적 사고에 갇힌 세계관을 흔들어보는 [0으로 나누면]. 치명적인 자기 통찰이 자기 파괴와 맞닿아 있는 초인의 최후를 보여줌으로써 실용주의가 심미주의를 죽인 현 시대를 대변하는 것 같은 [이해]와 같은 작품들에서의 배경 세계와 상징적 의미는 SF소설다운 철학적 사고의 깊은 맛을 낸다. 연금술, 유전자 복제, 폰 노이만의 오토마타 이론 등이 연상되는 [일흔두 글자]는 명명학이나 전성설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로 엮어 판타지풍으로 재설계함으로써 생명과 창조의 신비를 흥미롭게 그려내었다. [지옥은 신의 부재] 또한 독특한데 천국과 지옥을 탐구의 대상, 목표 지향적인 세계로 보고 신앙에 대한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모순적인 결말을 통하여 드러낸다. 우리나라의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신도들에게는 비수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외계 언어와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가 자신의 인생을 통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음에도 커다란 고통과 환희에 찬 자신의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여 기꺼이 걸어갈 수 밖에 없는 마지막 장면이 묘한 여운을 준다. 마지막으로 [외모 지상주의에 관환 소고]는 외모가 미치는 사회적 현상과 파장을 다양한 사람의 의식구조를 펼쳐내고, 치열한 논의를 거쳐 사고의 확장을 이끌어 낸다. 소설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자율과 평등에 관한 논의의 핵심은 각각 차별과 억압이라는 그림자의 균형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저것 많은 것을 치환할 수 있는 상황 연출에 있다. 예를 들면 시장중심주의와 복지중심주의, 교육 자율화와 교육 평준화, 개성과 획일성, 이미지와 실제, 형식과 의미 등 수많은 현실 문제를 반영하고 해결점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픽션이 아닌 논픽션이 된다.

책 전체적으로 보면 이전의 SF 소설과는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생뚱맞은 상황전개는 없다. 이야기는 단단한 암반 위에서 시작되고, 그것을 다지는 작업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한 전혀 낯선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도 아니다. 과학은 단지 지적 실험의 재료이며, 사고 작용을 이끌어가는 도구일 뿐이다. 게다가 주류문학처럼 아름다움과 감동까지도 수반을 하니…

이러한 장르의 책이 비주류인 것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지적영감, 신화-과학적 상상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현실의 문제는 현실의 한계 내에 존재한다. 현실 밖의 문제를 안으로 끌어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밖으로 투영된 세계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가야 한다. 대안의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문화적 역량의 기본이며 추진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테드 창이 보여준 대안의 상상력, 이 짜릿한 상상의 나래를 달아 자유로운 지적 비행을 하면서 즐거운 비명을 내지르자. 롤러코스터를 탄 것 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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