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돼지한테 구제역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이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은 수치상으로 따져도 분명한 듯 하다. ‘역병’보다 ‘매장’으로 수명이 다할 확률이 훨씬 크니까.
질병의 씨를 말리려는 건지 가축의 씨를 말리려는 건지 경제적 효용을 따지고 든 수단, 그것의 효용성이 의심스럽다. ‘확산 방지’는 충분히 확산된 후에 저절로 방지될 공산이 커 보일 정도다.
정육점에 걸린 고기와 구덩이에서 바둥거리는 생명체를 보는 시각이 같을 순 없다만, 내가 느끼는 잔인함은 ‘분류’에 따른 ‘예외없음’이다. 마치 인종에 따라 예외 없이 ‘살처분’ 되었던 인류의 역사를 보면 우제류와 인류의 운명은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인다. 누가 더 빨리 사라질 것인가는 누가 먼저 발병 하는냐에 달린 문제로 귀결된다.



명확하게 분류될수록 더 위험한 사회가 되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발가락이 두 개인 인간이 존재한다면 더욱 세밀한 분류가 생길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를 ‘구제역’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의 확산을 방지할 정당방위로 불릴 수도 있다. 분류를 양산해 내는 곳과 학살의 주체는 같다.
이 사회의 분류법이 어디로부터 흘러나오는 가를 살피면 매장이 누구의 운명인가를 알 수도 있다.
소, 돼지의 몰살에 과연 질병의 주체는 누구이고, 그것으로 고통받는 것은 누구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고양이 대학살을 보듯 현상은 망탈리테를 품고 있다. FTA 음모론이 괜히 나왔겠는가. 파묻히는 것이 짐승 뿐이겠는가. 질병을 고사시키기 위해 돼지를 매장시키는 방식은 농가를 고사시키기 위해 농민의 생계를 끊어가는 방식을 연상케 한다.



욕망은 보이지 않기에 음흉하고 위협적이다. 타자의 시선은 침해의 시작이기에. ‘미지의 것은 모두가 적’이라던 피카소가 예술 속에서 가면을 찾으려 했다. 우리는 회화적으로 ‘살’풍경을 바라 보고 있다. 모나리자가 사라진 것을 보기 위해 줄을 선 관객처럼….
‘소, 돼지보다 못한 새끼들은 걸릴 지도’ 모르기 때문이거나, 예술적 감수성이 없어 발가락을 숨기는 기만을 보일 수 없었던 소, 돼지의 불행이거나…

방식은 철학을 보여주고, 그것의 정체를 드러내게 한다. 정치판이 개판인 것은 그렇고 그렇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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