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과 겉표지부터 매력적인 책이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가 연상되기도 하고, 겉표지의 하얀 배경에 무질서하게 엉켜있는 알파벳은 눈먼 세상의 한 모습일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환상과 기대감으로 읽기 시작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다른 책들과 확연히 다른 특징으로 인하여 읽기가 힘들다. 우선,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없다. 의사, 의사의 아내, 첫번째로 눈이 먼 남자,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검은 안대를 한 노인, 눈물을 핥아주는 개처럼 눈이 멀기 전의 '잔상'과 눈이 먼 후에 느낄 수 있는 '특징'만으로 그들을 구분하고 있다.

게다가 작은 따옴표, 큰 따옴 등의 기호가 없어서 그들의 대화나 진행에 조금이라도 집중을 느슨히 하면 누가 어떤말을 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단락조차 없이' 빽빽한 글자가 460페이지에 달하니 한장 한장을 넘기는 것은 고행처럼 느껴진다.

책의 2/3쯤 읽었을까. 몇 가지 실망스러움은 나의 기대감을 무너뜨렸다. 첫번째로 실망한 것은, 눈을 멀게 하는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정부와 조직의 대응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야만스러웠다. 우리에 가두듯이 수용소에 격리시키고, 음식만 던져주며, 치료는 물론 위생, 질서에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는다. 게다가 군인들이 '학살'까지 했는데도 아무런 조치가 없다. 오히려 당연시 하는 군인들을 보며 작가가 보여주는 군인에 대한 혐오감이 어느 정도이지 알 수 있다.

얼마 전 사스가 전 세계를 위협할 때 중국조차도 많은 의료진을 투입하며 이를 극복하려 애썼고, 의료진 또한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렇기 때문에 눈먼 자들이 처한 '극한상황은 조작된 것이다'라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느낌은 소설에 몰입할 수 없게 만든다.

두번째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용소 내의 폭도 20여명의 행패에 굴복한 300여명의 다른 눈먼 자들의 비굴함이 극에 달한다. 자기 아내들을 성노리개로 바치면서까지 음식을 얻어먹는 상황 설정은 역겹다. 왜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을까? 눈이 멀고, 굶주렸다고 인간이기를 포기했는가? 소설 안에서는 처절하지만, 소설 밖의 나는 물음표만 생긴다.

세번째로, 모두가 눈이 먼 새로운 세상이 되면 '기존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면을 보여줄 것이다' 또는 '눈이 가지고 있는 다른 의미'를 보여줄 것이라는 나의 기대가 빗나갔다. 오로지 생존을 위한 몸부림만 보여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생존이 가장 커다란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정도'는 눈을 감고 상상해도 될 만큼 일반적인 것이다. '문명', '눈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 무너진다고 '인간성'도 무너질 수 있는가? 글쎄...

이러한 물음표를 안고서,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아노미 상태를 통하여 작가는 나에게 어떤 메세지를 던져 줄 것인가? 인내심으로 끝까지 읽어내려 갔다.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6줄은 나의 뒤통수를 친다. 장자의 호접지몽이 떠오른다. 현실사회의 획일적이고 고착화된 가치관에서 벗어나 그 어떤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봐야할 진정한 눈.

'꿈에서 깨어난 느낌'. 악몽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다. 쓰레기가 뒤덮인 세상, 그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지만, 향기에 취해 눈이 먼 사실을 모르고 있다. 소설 속의 눈먼 세상과 현실의 차이는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459페이지를 소비했구나. 무지... 나의 무지를 작가는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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