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반양장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그것의 무게는 한없이 무겁다. 영원하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지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삶은 또한 영원성을 지닌다. 삶은 또 다른 삶과 영위하며,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다른 이의 삶 속으로 살며시 스며들어 간다. 윤회의 굴레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그러나 나의 삶을 완성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수필은 이러한 삶이 진득하게 녹아 있는 문학이다. 영혼을 비추는 거울처럼 투명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진실하다. 인간의 희노애락, 추억, 일상이 담겨 있는 '현재의 역사'를 거짓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형상화한 이 책-'삶의 초상화'라고 부르고 싶은-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이것처럼 무미건조한 일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그리워 한다는 것, 아쉬움에 밤잠을 설레이며, 추억속의 사람과 사랑하는 여유... 편안함... 아늑함... 낭만... 수필은 이러한 것들을 우리에게 전한다. 피천득의 '인연'의 너무나도 유명한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이 문장은 그래서 더욱 가슴에 파묻힌다. 인연이 아니었음을 알면서도 지독하게 질긴 '그' 끈을 잘라냈어야 하는 기억들... '간다간다 하기에 가라 하고는 / 가나 아니 가나 문틈으로 내다보니 / 이 앞을 가리워 보이지 않아라'

청춘은 지나가고, 세월은 흘러가고, 사람은 떠나가도 남는 것은 추억과 그리움. 피천득의 인연에서도 이러한 것들이 많이 묻어난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에 충분히 기뻐하고, 즐기는 '그 사람의 향'이 짙게 베이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타인의 시선이 될 수 없는 필연성, 그래서 나 또한 인간일 수 밖에 없는 필연성. 잔잔한 호수 위를 걷듯이, 허위와 가식의 가면을 벗고 그녀의 눈망울에 나를 비추듯이 나는 삶을 그렇게 바라보려 한다.

인용 : '맛에 지치기 쉬운 나는 멋을 위하여 살아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