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저 <88만 원 세대> 이후, 몇 가지 변형된 단어들을 접하게 되었다. 66만 원 세대와 44만 원 세대는 각각 알바 10대 알바와 장애인 알바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조선일보>에서 주도한 'G세대'라는 말이 있지만, 나마저도 당혹스럽게 20대들에게서 스스로 퍼져나간 개념은 '3무 세대'였다. 내가 처음 들었던 원 버전은, 돈이 없고, 집이 없고, 결혼이 없다, 그래서 3무인데, 그 후에 수많은 해석들이 생겨났다.

그런 변종 중에서 나보다는 훨씬 더 거시적이고 포괄적인 해석의 버전은 생태지평연구소라는 시민단체의 어느 20대 활동가의 입에서 나왔다. '88조 원 세대'라는 용어였는데, 22조 원으로 정부가 제시한 4대강 사업의 예산은, 대규모 토목사업이 최종적으로는 원래 예산보다 4~5배 정도의 돈이 지불된다는 측면에서, 88조 원의 돈이 들 것이고, 기성 세대의 부동산 경기를 지탱하기 위한 이 사업이 결국 다음 세대에게 88조 원의 빚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88조 원'이라는 단어가 제시되었다. 정수론적인 우연이지만, 2008년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생명보험회사에 낸 돈이 또한 88조 원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생명보험은 다른 보험과는 달리, 자신이 살아서는 만져볼 수 없는, 즉 자신이 죽어야만 누군가가 만져볼 수 있는 돈이다. 보편적 복지가 부족한 한국의 상황에서 지금 10대와 20대, 즉 다음 세대의 부모들이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식들에게 목돈이라도 한 푼 쥐어주기 위해서 연간 88조 원이라는 돈을 생명보험사에 꼬박꼬박 납입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부모들 혹은 배우자들, 진짜 눈물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만약 자신이 죽고 나서 자신의 배우자나 자식들이 어느 정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자신이 있다면 현생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 '지금' 사용할 수도 있는 돈을, 순전히 자신이 죽고 나서 혼자 남게 될 식구들을 위해서 한국의 가장들은 88조 원이라는 돈을 생명보험으로 불입하고 있는 셈이다. 눈물 나지 않는가? 이명박 정부에서 목숨을 걸고 수년간 진행하겠다고 하는 4대강 사업의 4배나 되는 돈을, 지금 우리들의 부모들이 당신들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할 돈을 생명보험이라는 유가증권 한 장을 위해서 매년 납입하는 셈이다.

경제학적으로 따진다면, 이것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느끼는 국민들의 '불안 비용'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이 될 것이다. 사교육과 주거권에 들어가는 비용에 이어, 생명보험 납입금 총액을 보면서, 드디어 나는 왜 한국의 30대와 40대 남성의 삶이, 국민소득 2만불이라는 수치적 실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도록 이토록 비루하고 너저분한 것인지, 비로소 끊겨져 있던 마지막 논리적 고리를 찾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매년 88조 원이라는 돈이 이렇게 보험사에 납입되고 있으니, 일년이 지나도록 책 한 권 살 돈 없고, 영화 한 편 제대로 못 보는 상황이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자녀를 낳아 키운다는 것은, 여성에게도 엄청난 불안이지만, 남성들에게 그 못지않은 부담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죄수의 딜레마'라는 표현을 쓴다면, 우리 모두 이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고,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하자"라는 사회적 후생의 '개별 해법'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을 만든 것인지, 문득 깨달게 되는 것 아닌가? 이 돈이면, 대학 등록금 50만 원을 비롯해서 우리가 상상하던 모든 복지를 단번에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그 영광도 우리가 살아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88조 원을 기꺼이 낼 수 있는 한국의 부모들이, 남의 자식을 위해서는 단 돈 십 원도 낼 수 없다는, 이 무서운 딜레마에 빠져 있는 셈이다.

나는 이 끔찍하도록 희생적인 연간 88조 원만큼의 자식 사랑에 감동하면서도, 자신의 목숨은 버리더라도 남의 자식을 위해서는 단 10원도 쓸 수 없다는 이 지독할 정도의 딜레마 속에서 정말로 우리가 지옥에 살고 있는 듯한 공포감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88조 원의 단 10퍼센트라도, 우리가 '공공의 것' 즉 우리 모두를 위해서 사용할 수는 없는가? 죽어서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방식이 아니라 살아서 우리 모두 행복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2.


민간 보험과 민간 의료가 발달했다는 것이 사회적 발달과 상응하는 개념일 것인가? 미국의 유명한 다큐멘타리 감독인 마이클 무어의 <식코>는 의료보험 개혁이라는 단 하나의 명분으로 미국 정치가 격동하게 된 바로 그 모티브를 설명한다. 우리에게는 이 영화가 남의 일 같아 보였지만, 민간 보험회사의 '불안 비즈니스' 속에서 한국도 <식코>의 세계로 가고 있는 중이 아닌가?

의사는 보편적 인류애를 가진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고, 약사 역시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사람이라는 게 내 평소의 생각이다. 그러나 '비즈니스'의 세계로 들어가면, 전혀 그 작동 방식이 달라지고, 다국적 제약회사의 세상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아는 상식을 꽤 바꾸어야 사태의 진실을 이해하게 된다.

외국에서는 '스와인 플루(swine flu)'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질병 등 신종 바이러스형 질병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게 백신을 팔아먹으려는 다국적 기업의 음모라고 하는 음모설이 횡행했다. 물론 사태의 진실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하는 가장 고귀한 행위가 백신 개발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은 것이, 백신은 이윤율이 아주 적기 때문에, 정부와의 협약 혹은 UN의 권고 때문에 제약회사에서 하고 싶지 않은 데에도 억지로 하는 것이 백신 개발이다. 보통의 다국적 제약회사는 그런 큰 돈 벌리지 않는 일 보다는 다이어트 신약 개발이나 보조제를 만드는 게 훨씬 돈이 많이 되고, 그래서 정말로 제약회사들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백신 같은 이윤율 박한 공익성 사업이 아니라 다이어트를 위한 보조 약품들이다.

이런 매우 특이한 상황은 민간 의료보험에 의지한 미국이라는 매우 특수한 사회 그리고 그곳을 자신의 기지로 하고 있는 제약회사의 특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오바마 정부가 한국의 의료보험을 자신들의 모델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의 의료보험은 아주 형편없는 상황이고, 그러다보니 공공의 의료정책은 실종된 상황이고, 어떻게 하면 병을 싸게 고칠 것인가, 그런 치료 중심으로 가고 있다. 유럽 방식과는 아주 다르다.

경제학만 가지고 비교를 한다면, 세계 최고의 보건 경제학 그리고 보건학을 발달시킨 곳은 하버드 대학이다. 유럽에는 보건 경제학이라는 게 없고, 그 자리를 문화 경제학이니 영화 경제학이니, 미국과는 조금 다른 응용학문들이 채운다. 당연한 게 미국은 개인의 보건 비용이 최고이니, 이걸 다루는 경제학자들에게도 먹고 살 길이 열리지만, 보건은 정부의 일이 된 유럽에서 굳이 보건 경제학 같은 것을 별도의 학문으로 분화시킬 필요가 없다. 보건 경제학이 발달한 하버드보다는 그런 학문은 할 필요가 없는 유럽이 오히려 보건적으로는 우수하다는 역설이 생겨난다. 아파도 돈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뭐하러 보건 경제학 같은 걸 발달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좀 투박하게 얘기하자면, 미국은 국민들이 병들게 하고, 그 병을 민간 병원들이 고쳐주게 하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막대한 치료비를 중심으로 경제학이 투입될 공간이 생기는 셈이다. 아까의 다이어트의 예를 들어보자. 다이어트는 온갖 성인병의 출발점이기는 한데, 주로 흑인 등 유색인종과 빈민 지역 거주자들을 '빈곤형 비만'으로 방치시켜서 나중에 다이어트 치료를 하는 것보다는, 식품까지 포함해서 비만 현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종합 정책을 투입하는 편이 사회적으로는 더 저렴하고, 국민들도 편하다.

유럽은 비만을 사회적으로 해결하고, 미국은 비만을 방치한 다음에 나중에 다국적 기업이 비만 치료제를 출시하면서 돈을 벌게 하는 시스템이다. 국가가 의료비용을 지불하게 된다면, 비만율을 떨어뜨리는 학교 식단에서 공공 실내수영장과 체육 시설들을 보급해서, 전체적으로 의료비 지출을 줄이는 종합적 예방의학으로 가게 된다. 국민들의 입장에서도 그게 편하다. 아주 값싼 체육관과 수영장 같은 곳에서 운동을 하고, 그렇게 삶을 즐기면서 전체적으로 보건비용을 줄이면서도 아프지 않게 사는 것, 그게 모두에게 이익이 아닌가?

물론 이 상황이 되면, 다국적 제약회사로서는 아주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 제약회사는 국민들이 아파야 하고, 집이라도 팔아서 병원에 돈을 갖다 바치게 되어야 이윤이 늘어난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상황이 뻔한 것 아닌가? 민간의료 보험은, 국가가 국민을 보건적으로 방치한 나라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예방 의학의 대표적인 형태로 우리가 제시하는 또 다른 예시가 아토피의 경우이다. 유럽에는 'EU 아토피 프로토콜'이라는 것이 있다. 아토피에 걸린 환자가 발생했을 때, 부모와 의사들에게 가이드 라인을 준다. 개인들에게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면서 사회적으로는 문제의 근원을 해소하기 위한 예방 의학이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미국은 아토피의 경우에, 개인의 문제에 맡겨 두고, 온갖 의료비용이 개인 부담으로 전가된다. 한국은? 공공 의료이지만, 유럽형의 예방 의학이 아직은 체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소한 6세 미만의 유아들에게 피했으면 하는 남성 호르몬 계열의 스테로이드성 원고를 남발하고, '아토피 비즈니스'라는 용어로, 그야말로 "대박났다"고 온갖 사설 치료 산업이 만개한다. 부모들의 고통 위에서 이걸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라고 방치한 게 한국의 의료산업이고 또한 정부 대책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공공의료는 보장성이 유럽에 비해서 뒤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유행하는 암보험 역시 같은 작동원리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돈을 더 내야 하고,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생명보험이 그런 것처럼, 그 돈을 내려면 차라리 자기가 스스로 해결해야겠다는 풍조가 강했고, 한국의 경제 엘리트들은 "미국식으로 가자"고 수 년간 주장했기 때문이다. 매우 훌륭한 공공의료보험을 가지고 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의료보험의 보장성은 발전하지 못했고, 유럽 수준의 '암 치료'와 완벽한 보장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그 빈 공간으로 민감 보험이 침투하게 되었다.

민간 보험의 작동원리 역시 간단하다. 정부가 해결하고 난 빈 부분을 처리하겠다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보험의 일반 원리대로 '과잉 진료'가 횡행했고, 공공 의료보험의 부담이 늘어갔다. 병원에 자주 가는 게 이익이 되니, 당연히 과잉 진료를 받게 된다. 예방적 의료로는 더 이상 돈이 가지 못하고 의료 서비스는 답보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 현실이다. 노무현 시절, 의료 서비스의 고급화라는 명목으로 어떻게 하면 영리 병원을 늘릴 것인가, 그런 것 밖에 안 했고, 의료보장의 로드맵은 로드맵이라는 단어 전성 시기에도 명함도 못 내밀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다. 의료 민영화 시도가 국민들의 집단적 반발로 잠시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정부는 삼성생명 등 보험회사 편에 서 있지, 예방 의학을 포함한 종합적 대책은 가지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본다면 하루라도 빨리 건강보험이 더 많은 빚을 지고, "이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다"고 손을 들고, 미국처럼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하자"는 길을 선언하는 그 날이 오는 것인 듯하다.

3.

88만 원 세대라고 부르든, 88조 원 세대라고 부르든, 혹은 그 무슨 이름이 되든, 한국의 20대는 거의 완벽하게 95:5의 비율로 분화되고 있다. 부모를 아주 잘 만났든, 아니면 정말로 자신이 잘났든, 5퍼센트의 20대에게는 의료보험이든, 그 어떤 이름의 사회적 보장이나 보편적 복지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 95퍼센트에게는, 보편적 복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들 중 얼마나 그들이 부모들이 지금 지불하고 있는 88조 원이라는 생명보험의 수혜자가 될 것인가? 또 다른 부익부 빈익빈이다.

내가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모든 의료 보장을 처리할 수 있는 방식을 지지하고 그 출범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짧게는, 우리가 '22조 원'이라는 규모에서 본 토건에 들어가는 돈을 어떻게든지 문화와 지식 혹은 복지로 들어가게 되는 전환점을 찾기 위해서이다. 돈이 없다고 주류 언론에서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멀쩡한 강바닥을 준설하고, 그 자체로 생태적 비경인 상주 일대의 낙동강 발원지인 회룡포 일대를 파헤치는 데 괜히 돈이 들어가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88조 원을 지불하는 이 '불안 비즈니스'의 근원에 대처하는 데 그 돈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멀게는, 특단이 대책이 없다면 비정규직 혹은 알바로 살아가게 될 95퍼센트의 20대에게 최소한의 보장성 의료가 미국형 민간보험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도록, 그야말로 최소한의 기준선을 지켜주고 싶은 것이다. 그들 중 대부분인 평균 이하의 의료보험비를 지출하게 될 것이다. 아마 지금처럼 간다면 공공 의료보험은 결국 무너지고 민간 보험으로 넘어가게 되는 시점이 10년 내에 오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쩌란 말이냐?

누군가는 돈을 더 내야 하고, 누군가는 더 많은 부담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방의학 체계가 성립되면, 사실은 그 부담 자체도 줄어든다. 나는 내가 '88만 원 세대'라고 불렀던 그 사람들이 한 달에 만 원 정도의 비용을 내고 수영장에도 가고, 자전거도 빌려서 탈 수 있고, 공공 헬스장에서 바벨도 들고, 런닝 머신도 탈 수 있고, 그들이 그렇게도 원하는 복근도 만들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한테 돈을 더 내야 한다면, 나는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

지금 우리는 위태한 의료보험을 지켜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병이 생기지 않게" 사회가 관리하는 사회적 예방의학 체계로 넘어갈 것인가의 불안한 갈림길에 서 있다. 나는 지금의 10대와 20대를 위하여, 최소한 의료체계만큼이라도 '보편적 복지'로 가야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내가 <조선일보>나 <문화일보>와 같은 신문에서 말하는 포퓰리스트인가? 나는 보편적 박애주의자일 뿐이고, 한국의 다음 세대가 생태적 모순과 경제적 모순으로 몰락하지 않기를 바라는 생태주의자일 뿐이다. 내가 바라는 한국은 국민경제의 기본이 지켜지고, 이 땅에서 태어난 누구도 배 굶지 않고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지 않는, 최소한의 인간의 얼굴을 한 선진국의 모습을 가지는 세상이다.

우리는 '보편적 토건 사회'에서 '보편적 의료복지 사회'로 가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의 부모들이 88조 원씩 되는 '불안 비용'을 매년 슬프게 지불해야 한다. 그들이 생명회사에 바치는 돈을 줄이는 것, 그게 그들의 자식들이 느끼는 불안을 사회가 흡수하는 노력으로부터 생겨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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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4 17: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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