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살던 동네에선 몇 집이 한 식구처럼 지냈다. ‘물푸레마을’이라는 이름도 붙이고 짬만 나면 모여 술먹고 놀았다. 어른들이 노는 동안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았다. 그런데 자주 티격태격 다툼이 일어났다. 이놈이 울고 저놈이 울고. 그럴 때마다 어른들은 “사이좋게 놀아야 착한 사람이지.” 하나마나한 훈계를 하거나 소시지 안주나 아이스크림 따위로 아이들을 무마하곤 했다.

이건 아닌데, 싶은 마음이 점점 더해진 어느 날 “재미있는 이야기 해줘요, 삼촌!” 몰려든 아이들에게 ‘양보’에 대해 말했다. 주절주절 설교한 건 아니고 일단 믿어봐라 식으로 짧게 말하고는 문답식으로 되새겼다. “우리가 다투지 않고 끝까지 즐겁게 놀려면?” “양보!” “안 들려, 뭐라고?” “양보!!” 아이들은 재미나 죽겠다는 얼굴로 깔깔 거리며 양보를 외쳤다.

그날 아이들은 자정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다투질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로도. 이적이 분명했지만 비결은 간단했다. 녀석들의 다툼은 언제나 먹을 것이나 놀 것을 두고 서로 더, 많이 가지려 하는 경쟁심에서 일어났다. 충분한가 모자란가는 오히려 본질이 아니었다. 충분해도 경쟁심 때문에 다투었지만 모자라도 서로 양보하니 다 만족했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한국이라는 사회가 옛날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건 분명하다. 절대빈곤 국가를 벗어난 지도 오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전보다 더 ‘먹고사는 일’에 찌들려 있고 갈수록 더 고단하고 미래엔 아무런 희망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왜 우리 아이들은 마음껏 놀기는커녕 마치 감옥의 수인들처럼 시들어 가는 걸까?

역시 이명박 때문인가? 오늘 반이명박을 외치는 사람들은 이명박 씨가 우리 삶의 외부에서 침략한 존재인 양 말한다. 그러나 이명박 씨는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그것도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대통령이다. 이명박 씨의 당선이 ‘대중의 보수화’라는 건 빗나간 이야기다. 그것은 보수화도 진보화도 아닌 ‘민영화’, 즉 정치의 종식이었다. 이제 한국인들은 대통령이 아니라 CEO를 뽑는다. 한국인들이 그들의 CEO에게 기대하는 건 인간적 면모도 정치 이념도 아닌 ‘장사능력’이며 대통령 이명박은 그 순정한 반영이다.

이명박을 찍지 않은 사람, 오늘 반이명박을 외치는 사람들은 예외일까? 꼭 그렇진 않다. 이를테면 이명박 정권을 반노동자 정권이라 성토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연대엔 철저히 무심한 정규직 노동자들은 실은 이명박 노동정책의 지지자들이다. 이명박의 시장주의 교육을 맹비난하면서 제 아이의 시장 경쟁력은 알뜰하게 챙기는 교육운동가들은 실은 이명박 교육정책의 충직한 실천가들이다.

우리는 씁쓸한 얼굴로 자문한다. 그 뜨겁고 아름다운 촛불의 열기는 왜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을까? 촛불 속에서도 ‘이명박’은 살아 활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명박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이명박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이명박을 넘어 이 땅에 다시는 그런 장사꾼 대통령이 등장하길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을 상품으로 키우는 걸 중단하고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다.

맞는 이야기지만 왠지 불안하고 아이의 미래가 걱정이라고? 바로 그게 당신 안에서 들려오는 이명박의 목소리다. 뿌리쳐라. 비장한 얼굴도 심각한 결단도 필요 없다. 물푸레마을 아이들처럼 깔깔대며 그냥 뿌리쳐라. 안 죽는다. “수입이 좀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굶는 것도 아니고, 삶이 훨씬 더 자유롭고 충만해졌어요. 만족해요.” 내가 만난, 이미 뿌리친 사람들의 일치된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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