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내용은 이렇다.
인형같고 천사같은 아이들이 부모의 생명을 노린다.
그것은 돌림병처럼 아이들을 전염시키고, 부모 세대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

생을 안겨준 세대에게 죽음으로 되갚는다는 설정은 죽음보다도 더 큰 공포가 있음을 말한다.
익숙한 존재가 낯선 존재로 전향하는 순간,
그 모든 관계로부터 박리되어지고 재설정되어야만 하는 혼란은 공포의 단면인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는데 있어, 아이의 웃음과 비명과 울음으로 전해지는 긴장감은 웰메이드 작품임을
말해준다.

이 영화에서 바이러스에 대한 설명은 없다.
바이러스라고 하지만,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어지는 중국문화나 의학기술을 유추해 볼때,
서구문명의 위기와 세대간의 단절 중심으로 하는 어떤 유비가 있을 수 있다.
동양의 가족문화에 대한 동경이 엿보인다고나 할까...
중국말, 동양을 가르치는 등장인물이 제일 먼저 아이에게 가르친건.. '오 아이 니" 였다.. 

부모가 느끼는 공포의 근원은 바이러스가 아니다.
내 자식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부모)를 죽이는 실체다... 

 

 



<데드 스노우>

좀비영화다.
독일의 젊은이들이 설산에 놀러가서 진탕 놀다가 '나치 좀비떼'와 혈전을 벌인다는 내용..

이블데드의 오마주가 얼핏보인다.. 해머와 전기톱으로 맞서는 장면도 낯이 익다..
공포와 유머의 적절한 조합 또한 익숙하다..
여기에 사회성이 조금은 가미되어 있는 듯 하다. 
탐욕의 (보물에 끝까지 집착했던)나치좀비와 그 보물에 운 나쁘게 엮인 젊은이들...

과거의 악으로 대표되었지만, 좀비가 되어서라도 현대 사회에까지 이어지는 이것들에게
아마 젊은이들도 피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독일의 사회상을 반영한 코믹호러물 인듯...  (그냥 느낌) 

푸세식 화장실 에로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손가락을 감각적이게도 입으로 빨던 그녀  ㅡ..ㅡ;;;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

<타인의 고통>에 실려있는 청나라 말, 능지처참 당하는 한 사람의 사진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인가 보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끔찍한 고통의 연속이 모든 컷에 담겨 있다.
소리와 화면은 오로지 감각 세포 하나하나를 가격하려고 노골적으로 덤빈다.

이유없는 학대, 차라리 삶보다 죽음을 선호하게끔 만드는 고립된 환경 속에 홀로 남겨진 나.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흘리는 피는 죽 한그릇으로 보상받고, 묶인 쇠사슬과 떨어져 나간 살점은
단지 새살이 돋는 시간을 벌어줄 뿐이다.

결론에서 밝혀지는 듯 하지만, 궁국적인 질문과 답은 공개되지 않는 감독의 '악마적 취향'이
관객을 끝까지 괴롭힌다.
영화를 보는 것은 장면만큼이나 정말 고통스럽다.
놀라운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감각해진다는 사실.
우리는 구경꾼이 되어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도 이와 같지 않을까.
삶은 고통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최악의 고통은 최근의 고통이며, 그것에서 한뼘이라도 벗어나게 되면 커다란 행복을 느낀다.

궁극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모든 것을 포기 하는 것...
해탈은 육체를 포기하고 정신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

타인의 고통에 있던 능지처참 사진에서 보여졌던 눈...
마터스의 천국을 보는 눈...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경꾼의 눈...
눈은 다른 세계를 보았고, 우리는 그 눈을 통해 다른 세계를 보고자 한다. 
하지만, 그 간극을 채울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겪은 고통을 우리는 느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고통과 천국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하나만을 가질 수없고, 하나만을 볼 수 없다는 사실만을 알게 한다.

마지막에 노파는 왜 자살을 했을까...
무엇을 보았고, 어떤 것을 들었을까...  그 진실을 간직한 체.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한 것인가?

거대한 허무,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의 고통에 물음표를 남기는 전략은
유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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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7-19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터스가 확 땡기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