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면 되풀이할 운명에 처한다’했다. ‘가까운 역사’는 젖혀둔 채 ‘먼 역사’만을 강조하더니 ‘다시 현대사’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었다. 열사의 한숨이 들릴까. 다음 세대의 비웃음이 들릴까. 반자본주의를 외치다가 다시 민주주의를 외치게 될 줄이야. 막장으로 가는 고속열차를 타고 살아가려니 먹은 것도 없이 토만 나올 지경이다. 쟁취하기는 등골빠지게 어려워도 빼앗기기는 이토록 쉬운 것을 대중의 얕은 사욕과 맞바꾼 민주주의를 되찾으려 하나 이자가 사채이자보다 허벌나게 높은 것 같다. 대통령이라는 작자의 ‘귀가 막힌 수준’(기가 막힐 수준)은 광장에 깔린 전경의 숫자가 말해준다. 이 상황에서 누굴 탓하랴. 자본의 탐욕에 농익은 모두의 염원이 만들어낸 사태이거늘. 그는 고작 인민의 표상일 뿐 개의 뿔도 아니다. 굳이 긍정적인 면을 꼽자면 한국의 정치가들이 ‘의도하지 않은 교육자로서의 능력’을 시시때때로 보여주고 있다는 거?

하여간 사라지면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인간의 단순함을 보조하는 수단 중에 하나가 책일 텐데, 이 만화를 보면 감흥 이상의 것을 건져 올릴 수 있다. 시간적 간극과 경험의 괴리를 메우고 우리의 실수와 과오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세월은 흘렀지만, 차별과 반인권, 반민주적인 질서 속에서 나름 큰 불편 없이 살아가는 자기기만적인 모습도 오버랩이 된다. 우리는 과연 민주주의를 원했던가. 단지 나의 불편함이 민주주의의 기준이 되질 않았던가. 약자의 고통에 기꺼이 눈을 감을 수 있었던 자기중심의 세계에 ‘이상 사회’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라도 있었던가. 경제성장률, GNP라는 허황된 숫자에 너무 많은 것을 걸지 않았던가.

당시 6월 민주 항쟁은 솔직히 말해서 나의 관심 밖이었다. 마징가가 쎌까 태권브이가 쎌까라는 힘의 논리적 근거를 찾느라 친구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으며,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로 내 재산 불리기에 몰두하느라 정치, 경제의 공적인 관심사에는 무관심했다. 게다가 ‘북괴’의 초엽기적인 ‘수장’전략에 대응하고자 추진했던 평화의 댐 만든답시고 500원씩이나 삥을 뜯겼음에도 별다른 문제의식도 없었다. 어린이의 ‘기억없음’에 태클 걸 사람은 없겠지만, 최루탄 냄새가 고약했다라는 기억만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

문제는 그 ‘기억없음’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점과 우리는 많은 것을 아직도 기억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간에 망각과 생각없음도 죄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비켜갈 수 없는 자가 없듯이 반드시 누군가의 피로 얻은 자유와 평등을 조금씩이라도 누렸을 것이기에 그것을 지켜내야만 하고, 그것을 더 나아가 빚 갚듯 ‘부가가치’를 더 해 후대에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지금이 99도다 그렇게 믿어야지”

끓는점이 100c일까. 불순한 물질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그 이상의 희생을 치러야만 한다면…
온도를 높이기만 한다고 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순수해야 하고, 좀 더 뜨거워져야 한다.
민주주의는 닿고자 하는 언덕 정상이 아닌 발끝에 힘을 주고 손가락으로 찍어 미끄러지지 않게 버텨야 하는 비탈길이다. 힘겹게 오르는 과정 속에서 더 나은 사회의 신기루라도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세월은 반드시 돌려준다. 부모 세대의 잘못을 자식에게 지우는 짓을 중단 시켜야만 한다.

조지고 부시는 것만 알았던 미대통령도 명언을 남겼다. “두 번 속았다면 네 탓이다!”
삽질만 아는 한대통령에게 우리는 정말 큰 교훈을 얻어야만 할 것이다.
더 속으면 한국이란 나라는 폐업정리 해야 한다.
국제화 시대다. 창피해서 어디 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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