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사관에 기대어 절대계몽군주의 개발독재를 용인하는 ‘정조신화’
전통적 정치이념인 ‘붕당정치’를 파괴한 절대왕정이 사대부보다 보수적


▣ 장정일/ 소설가


<누가 왕을 죽였는가>(푸른역사, 1998)라는 제목으로 초간되었다가 최근 제목을 바꾸어 재간된 이덕일의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 2005)은, 27명의 임금 가운데 독살설에 휘말린 8건의 사례를 연구한다. 그 가운데는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영명한 학자군주로, 왕조 중흥의 전성기를 이룩했다는 22대 정조대왕도 들어 있다. 저자는 “‘만약 정조가 10여 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면서, 그의 사후 전개된 극단적인 수구 정치가 조선의 멸망을 불러왔다고 말한다.

개혁을 시도하다가 수구파에게 독살된 절대계몽군주라는 ‘정조신화’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사람은 이인화다. 그가 쓴 <영원한 제국>(세계사, 1993)은 오늘의 선진화된 유럽 국가는 봉건 시대 말기에 하나같이 강력한 절대왕정기를 거쳤다는 사관 아래, “홍재 유신이 실패함으로써 우리 민족사는 160년이나 후퇴했다. 우리의 불행은 정조의 홍재 유신 대신,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안타까워한다.

홍재 유신의 실패 대신 10월 유신?

정조 독살설에 정조의 개혁군주상(像)이 겹쳐 있기 때문에, 이 음모론은 자세히 해명될 필요가 있다. 사전처럼 곁에 두고 보는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가운데 제15권 <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한길사, 2001)는, 정조 사후 꾸준히 나돌았던 독살설은 노론 벽파에게 오랫동안 소외되어 울분에 빠져 있던 영남 남인과 일부 소론이 지어낸 것이라며 배척한다. 또 이보다 앞서 출간된 박광용의 <영조와 정조의 나라>(푸른역사, 1998) 역시 동일한 해석 끝에, “정조가 계몽절대군주를 지향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독살설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까닭은 “계몽군주는 무엇보다도 부지런하고 신민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특징”이므로 “이런 군주를 독살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최홍규의 <정조의 화성 건설>(일지사, 2001)이 좋은 예다.

유봉학의 <정조대왕의 꿈>(신구문화사, 2001)은, 정조 독살설이 솔깃한 까닭은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했던 원인”을 통속적으로 해명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근대로의 개혁이 과단성 있는 지도자 정조 한 사람에 의해 진행되다가, 독살이라는 폭력적인 방법에 의해 지도자가 시해되자, 이후 그가 추진한 근대로의 개혁이 좌절”되었다는 상황을 설정하고 있는 정조 독살설은, 전근대적 영웅사관에 입각해 개발 독재마저 용인해주는 논리가 된단다.

정조의 정치와 개혁정책에 관한 가장 폭넓고 냉철한 평가는 박현모의 <정치가 정조>(푸른역사, 2001)에 기술되어 있다. 따로 또 한 편의 독후감이 필요한 이 책은, 독살설을 일절 언급하지 않으면서 “과로와 조로화(早老化)”가 원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정조가 죽던 재위 24년째 대왕은 “연신(筵臣) 중에 나와 나이가 같은 자는 소년이나 다름없는데 나는 정력이 이러하니 이상하지 않은가”라며 피폐해진 육신을 슬퍼했다. 실제로 스물다섯에 왕위에 오른 준비된 왕 정조만큼, 오랜 재위기간 동안 경장(更張·개혁)에 공을 쏟은 왕은 없었다.


새롭게 보는 조선조 붕당정치


하지만 “경장 반대세력의 움직임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해 본격적인 경장을 추진하지 못”했으며, “때를 틈타 좀더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것은, 정조의 학문적·정치적 역량을 고려해볼 때 대단히 아쉽”기만 하다. 그나마 정조가 애써 이룬 경장책은 그의 사후 정권을 차지한 세력에 의해 말짱 ‘도루묵’이 되었고, 더욱 나쁜 것은 정조가 죽으면서 조선의 붕당정치(공론정치)도 따라서 무덤에 묻힌 것이다. “필자는 이 점에서 정조 사후 63년간 지속된 세도정치가 사실상 영·정조 시대에 배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정조의 왕권 강화 정책은 조선의 전통적 정치이념인 붕당정치를 파괴했다. 유봉학에 의하면 정조대의 사대부와 각신들이 수구로 몰리면서까지 정조를 따르지 않은 것은 “왕권 강화에 대한 집착은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점, 조선조의 붕당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해주는 한편, 근대를 맞이하기 위해 절대왕정기가 ‘필수 코스’라고 믿어온 우리들의 서구중심주의를 재고하게 해준다. 오늘의 관점이든 당대의 관례로든, 사대부들보다 정조가 오히려 보수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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