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의 귀환 -

"모든 정체성이 관계적이라는 것, 또 각각의 모든 정체성의 실존 조건이 어떤 차이의 긍정,
즉 '구성적 외부' 역할을 할 하나의 '타자'를 결정하는 것임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는 적대가 일어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경계를 설정해 '우리'를 창조하는 것이 관건인 집단 정체성 형성의 영역에서는,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친구와 적 유형의 관계로 전환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달리 말해 슈미트의 용어 이해에 따르면 이런 관계는 항상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샹탈 무페 『정치적인 것의 귀환』



비극의 리어왕이 정치적으로 귀환하였다.
운명의 비극에 피눈물을 흘리던 리어왕이 관계의 폭력성에 피눈물을 흘린다.
적을 규정하고 성벽을 쌓고 결국엔 그 모든 것들로 무너져 내린다.
계급과 권력, 욕망과 폭력의 얽힌 실타래는 푸는 자의 몫이 아니었다.
잘라내고 제멋대로 이어붙이기만 한다면 그 누구의 것이라도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똘똘 뭉친 무지로, 몰이해를 품고, 일방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인간의 방식이었다.

혈관에 꽂는 주사기처럼,
너와 나를 가르는 결계처럼,
구분된 인간 계급처럼,
태어날 때부터 자식과 부모로 규정된 혈육처럼,
선택할 수 없는, 선택되어진 이름 없는 모든 것들에게 폭력이라는 이름을 새긴다.

그러나 폭력의 명암은 좀 더 면밀하게 그려낼 필요가 있다.
너무나 다양한 성질의 것을 동질의 것으로 묶기엔 그 방식 자체조차도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권력 본연의 얼굴은 과연 피칠을 한 유령의 모습이었을까..
절뚝거리는 인간의 역사에 절망과 허무만이 가득하다면,
이 연극은 무엇을 말했어야 하는가...
고전의 재해석은 새로움이 아닌 이미 알고 있는 것에 각성을 던져줄 뿐이었다.

연출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깜짝놀래키려는 음향과 시각효과로
관객에게 폭력성 그 자체를 노출시키고 있다.
극의 몰입과 장악력을 확대하려 한거 같은데, 세련된 방식은 아닌지라 투박함만 더했고,
3시간동안 중견 연기자의 열연이 없었더라면, 그 공허의 무게는 엉덩이에 더 심한 피로감을 누적시킬 뻔 했다. 

 

   
  나의 삶을 보노라,
물가의 검은 나무 한 그루의 나무.
가지들은 눈물로 덮여 있다.
눈물이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바람은 눈물을 하늘로 날린다.
그리고 나의 눈물이 내게 떨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