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야구.
각본 없는 드라마는 왜 9회말부터 시작되는가.
"야구... 몰라요 몰라"라며 야구를 몰라 했던 하일성이 그렇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야구와 인생이 늘 가능성과 불확실성의 연장선에서 갈팡질팡 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과정보다 결과가 말해주기 때문에?

아쉽게도 그라운드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한다. 이 세계는 '포함'될 자를 고르기 위해 '제외'될 대상을 생산해내고 있으므로 드라마는 각본의 형상일 뿐이다. '당신의 노력'이 당신의 인생을 좌우할 것이라는 믿음은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의 논리를 벗어날 수 없는 환상 속의 희망에 불과하다.

박민규는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우승을 목표로 한 다른 팀들로선 절대 완성할 수 없는 - 끊임없고 부단한 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를 제시하며 삶의 본질적인 방향과 목적에 대한 격한 핸들링을 보여주었다. 비주류의 독립선언. 주류에게 '쌈 싸먹어'를 날리고 그들을 위한 룰이 아닌, 스스로를 위한 룰을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한 삶의 기적을 이룰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인생은 결국, 결코 잘하리라는 보장도 없이-거듭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몇 가지의 간단한 항목으로 요약되고 정리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도 버티고 있는, 그래서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는 우리의 삶은- 실은 그래서 기적이다."

질긴 것은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
투수를 괴롭히는 것도 타자의 임무인 것처럼 삶은 버티는 자의 몫이다.
과학이 원리와 질서, 불확실과 불명확한 세계를 인간의 인식 체계에 포함시키기 위한 영도자의 길을 걸어 왔지만, 수 많은 오해와 오류를 야기시켰듯이 인생은 수 많은 헛스윙과 아웃의 연속이다. 언제나 승리할 수 없기에 언제나 패배할 수만은 없다.
'생의 의지'는 환경적 요소를 얼마나 만족시킬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음을 긍정하는 것에 있다.

5할 타자가 성공한 것일까? 3할 타자는 평범한 것일까? 1할 2푼 3리의 타자는 어떤 운명일까?
타율이 지배하는 세상은 승리와 패배만을 부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승리한 자에겐 모든 것이 있고, 그 외에는 있을 것이 없다.

연극은 스스로를 강하게 하는 법을 알려주지만, 그 너머의 존재로 가는 방향을 적확하게 짚어주지는 못했다. 단지 '인생의 홈런'을 치기 위한 마인드 컨트롤이 있음을 말한다.
지금 우리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기적이다'라는 명제를 가슴에 새길 용기가 절실한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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