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수 없는 부모와 들을 수 있는 딸은 가족이다.
같은 공간에 살고 있지만, 같은 세계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고립감이 더욱 크다하지 않던가.
딸은 고립된 세계의 유일한 입이고 귀가 된다.
소통은 일방적이다. 그리고 왜곡 되어진다.
서로가 공유하는 침묵은 마법의 언어로도 채울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 낸다.
부모가 원하는 딸과 딸이 원하는 부모, 지독한 침묵과 요란한 소음이 마주하려면 서로가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음악.
그들에겐 차별이었고, 딸에게는 미래이다.
딸이 저 편의 세계로 떠나지 않을까하는 불안이 부풀어 오른다.
유년의 트라우마 욱신거린다.

"당신 부모가 했던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아요."
"무슨 뜻이야?"
"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세요."
"그 앤 내 딸이야."
"하지만 당신 소유물은 아니에요."

눈은 소리없이 내리고, 세상에 고요를 안긴다.
태양은 소리없이 떠올라, 빛으로 세상을 깨운다.
바람은 깃발을 움직여 존재를 알리듯,
들을 수 없어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의 목소리가 가득한 세상이다.
두개의 세상은 그렇게 문이 열린다.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고...

"그것이 너의 음악이니?"
"그래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이해 하도록 노력해 보마. 난 널 잃은 거니?"
"전 태어난 순간부터 아빠를 사랑 했어요. 전 언제나 아빠 딸이에요."


ps.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 속의 댄서"와 묘하게 잘 어울린다.
볼 수 없어도 봐야 할 세상, 들을 수 없어도 느낄 수 있는 세상...
희생과 집착, 구원과 화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빌려 인간과 사회의 근원적 갈등을 드러내는 방식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어둠 속의 댄서'가 '악(惡)'으로 해답을 찾오록 유도한다면, 이 영화는 '애(愛)'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마지막은 뻔해도... 그러서인지 찡하다.

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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