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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ㅣ 여성학 강의 3
쥬디스 버틀러 지음, 김윤상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예로부터 언어란 원래 불완전한 것이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바로 전달할 수 없다고 얘기되어오곤 했다.
바벨탑이 무너진 것도 언어 때문이었으며, 라깡은 need를 언어로 전달(demand)하는 과정에서 desire가 잔여로 남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언어가 실존하는 사물을 단지 지시하기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의미화 작용 속에서/을 통하여 주체도 탄생하고 (버틀러에 따르면) 몸의 물질화과정마저 일어난다는 논의가 요즘 추세이며, 언어의 불확정성과 의미생성력은 번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라서, 굳이 데리다의 차연 개념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다른나라 말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의미의 미끄러짐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바에 근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직업임에는 분명하다. 특히나 이 책은 버틀러의 수많은 저작 중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되는 책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 책의 자잘한 번역미스는 버틀러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들거나 때로는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먼저 제목을 보자. 원저의 제목은 Bodies That Matter이다. 한국번역본 제목은 이를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로 번역해놓았다. 이 책을 처음 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은, 왜 Bodies That Matter를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로 번역했는가? 일 것이다. 나도 역자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원본 32p (한역본 73p)를 보면, ‘matter'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to matter" means at once "to materialize" and "to mean".
즉 matter가 ‘물질화시키다’와 ‘의미하다’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므로, 이 두 뜻을 한꺼번에 담으려는 노력으로 한역본 제목이 나왔으리라 추정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체현하다”는 보통 embody를 가리키는 번역어로 사용된다. 버틀러의 다른 책 「Gender Trouble」 1장 각주 15를 보면, embodiment에 대한 버틀러의 생각이 나온다.
“Note the extent to which phenomenological theories such as Sartre's, Merleau Ponty's, and Beauvoir's tend to use the term embodiment. Drawn as it is from theological contexts, the term tends to figure "the" body as a mode of incarnation and, hence, to preserve the external and dualistic relationship between a signifying immateriality and the materiality of the body itself."
즉 현상학에서 주로 쓰이는 개념인 embodiment는 신학적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몸을 현현[화신, incarnation]의 모드로 형상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의미화하는 비물질성과 몸 그 자체의 물질성 간의 외적이고 이원적인 관계를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embodiment 개념이 물질/정신의 위계질서를 동요시키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왔던 나에게 버틀러의 이 구절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embodiment란 물질과 의미가 서로 배타적이고, 정신이 몸보다 우위에 있다는 기존의 사고관을 전복하면서 물질과 의미가 서로 연결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의미화작용은 몸에 ‘체현’되지 않고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즉 몸에 기반하지 않고서는 어떤 의미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얘기인 것으로, 즉 몸에 더 강조점을 찍은 개념이라고 나는 이해해왔었다. 그러나 버틀러의 말대로, 이 도식은 몸/정신이라는 이분법 틀 자체를 와해시키지는 않는다. 즉 몸과 정신, 물질과 의미의 위계관계는 문제시할 수 있을지라도 저 bar(/)는 그대로 남아있으며(어쨌든 개념상으로는), 어찌 보면 의미화 작용 내지 정신이 몸에 덧씌워져서 비로소 작동하는 빙의나 화신, 현현 같은 모드로 몸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몸은 여전히 ‘장소’-비록 수동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어쨌든 정신에게 있을 자리를 내어주는, 탈것과 같은 장소-로서 취급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embodiment에 대한 버틀러의 생각이 틀리건 맞건 간에, Bodies That Matter를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로 번역하는 것은 버틀러가 Gender Trouble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도 계속해서 문제제기하는 몸과 담론의 이분법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저자인 버틀러의 생각과는 배치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체현하다’가 반드시 embody만의 번역어는 아니며, 모든 언어를 한 가지 뜻으로 번역하란 말이냐 하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역자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도 그것이다. 모든 언어가 단 하나의 번역어, 단 하나의 지시체와 연결되지 않는 만큼,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를 가급적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번역에 그만큼 신중을 기울여야되며, 자신이 왜 이러한 뜻으로 번역했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래야만 읽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게다가 번역은, 단지 단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원저자가 책 전체를 통해 주장하려고 했던 내용과 부합하는 번역을 찾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단순교양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학술서적에서, 단어의 의미는 그만큼 중요하다. 오죽하면 논문 쓸 때 **개념을 필자가 어떤 식으로 정의했고, 왜 그렇게 정의했는지를 밝히는 데 한 두 시간을 잡아먹으며 교수님들 앞에서 진땀 흘리지 않는가.
세미나 준비해야하므로 지금은 제목에 대한 질문만 던지겠지만, 이 다음에는 서문과 그 각주를 중심으로 번역과 관련된 질문들, 번역미스들에 대해서 문제제기하도록 하겠다. 간단히 하나만 얘기하자면, 한역본 23p(원본 2p)의 두번째 단락 중간에 "오히려 성 자체는 그것의 물질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란 번역에서, 물질성으로 번역된 곳 원문엔 normativity가 적혀 있다. 즉 성은 규범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부분인데 단어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 (이런 미스가 하나만 있었다면 좋았으련만...다음에 계속될 문제제기에서 다른 지점들을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겠다)
한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번역에서의 이견 차이는 고명하신 학자들 간에서도 충분히 일어나는 일이며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도 몇년 전에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의 번역을 두고 두 쟁쟁하신 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었으며 그것이 책으로까지 나오지 않았던가. 이러한 토론 속에서 후학들은 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고 학계는 건강하게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문제제기하는 사람에게 메일로 전화로 괴롭히지 말아달라. 부탁이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여기서 공개적으로 하면, 어느 곳이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다 적겠다. 번역이 완전히 잘못된 부분들도 있어서 그런 부분들은 지적하고자 하고, 또한 나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니 왜 이 개념을 굳이 이 단어로 번역했는지, 그에 어떠한 철학적 혹은 정신분석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인지 역자에게 질문하고 싶은 부분도 있다. 그런 것들의 토론을 통해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오게 되고, 독자와 역자가 함께 책을 수정하는 작업이 이 공간에서 일어난다면 학계에도 출판계에도 더욱 생산적인 발전이 도모되지 않을까.
+ 아참, 나는 저 위의 설명에서 몸과 물질, 정신과 의미를 혼용해서 사용했지만, 사실 그 개념들은 엄밀히 말하면 좀더 사유되어야할 개념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버틀러 또한 개념의 엄밀성을 주장하면서도 몸과 물질을 동일선상에 놓고 논의를 개진하기도 하고, 물질과 몸이 연관성만 있을 뿐 물질은 의미화경제와의 관계를 두고 구성적 외부 개념으로 논의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버틀러의 원저에서도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므로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