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얼마나 예리한 침(針)인가. 그것은 세계를 요란하게 분해하지 않고도 그저 단 몇 마디의 소곤거림으로 본질에 도달해버리는 것이다. 시는 세계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아니, 차라리 시는 세계를 인식하기보다 세계에 조응한다고 하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시는 얼마나 겸허한가. 그리고 또한 그것은 얼마나 보드랍게 세계를 만지는가. 시에 몹시 빠져들었던 무렵에는 시 아닌 모든 텍스트들이 심지어 더럽게마저 느껴졌다. 정말이지 더러워서, 시 아닌 모든 것들이 한동안 읽기 싫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최승자 시인의 말처럼 “시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무슨 말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슨 할 말도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도 시는 여하튼 존재한다는 배짱 혹은 체념 혹은 위안에서가 아니라, 그러나 시에 대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시는 매번 그 자신을 새롭게 '시'이도록 함으로써 시로서 존재할 뿐이다. 시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 자신뿐이리라. 시에 대해 무어라 얘기하는 지금 이 글 역시 결국은 시에 대한 모독에 불과한 것이리라. 마음이 가난한 나는 단지 시라고 하는 성전과 그 성전을 짓는 사도들을 향해 한없이 달뜬 마음으로 경배드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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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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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는 자신의 불행이 강자의 무절제한 행동에 있다고 여겨 원한을 품는다. 그러나 외부를 향했던 이 폭력적 감정은 “돌발적 사태” 이후 철저히 내면화 된다. 모든 죄를 제 탓으로 돌려 양심의 가책 속에서 살아가는 약자. 도덕의 계보 제3논문에서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약자가 ‘금욕주의적 이상’이라고 하는, 삶에 반대되면서 우선시되는 경건한 가치들을 고안해내고 그러한 가치들을 통해 삶 자체를 단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금욕주의자들은, 삶을 “저 다른 생존을 위한 하나의 다리”로 간주한다. 그들은 삶을 “반박해야만 하는 오류처럼 취급”함으로써 비로소 삶을 영위한다. 삶을 부정함으로써 삶을 누리는 이러한 자기 모순적 삶의 유형에서 니체는 극심한 원한을 발견한다: “여기에는 견줄 데 없는 원한이, 즉 삶에서의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 그 가장 깊고, 강력하며, 가장 기저에 있는 조건들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기갈 들린 본능과 힘 의지의 원한이 지배하고 있다.”(481) 

금욕주의자들은 오로지 힘의 원천을 봉쇄하기 위해 힘을 사용한다. 그들은 욕망(생명력, 힘, 에너지)의 표출을 경계하고, 미의 표현이나 기쁨에 서툴며, 반면에 발육 부전, 고통이나 사고, 추악한 것이나 자발적인 희생, 자기 상실이나 자기 질책, 자기희생에 대해서는 환희와 희열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전제조건인 생리적 삶의 능력이 감퇴할수록 더더욱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의기양양해 한다. 

자기를 서서히 말려 죽여가면서 자기를 발견하는 기묘한 금욕주의자들. 이들은 퇴화되어가는 자신들의 삶을 방어하고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욕주의적 이상’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이상을 찬양하지만, 기실은 이상에 지배당한 채로 언제나 죽음, 권태, 피로, 종말을 향한 소망 따위와 대항하여 싸우고 있을 뿐이다.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고안해 내어 반응적인 무리를 장악하는 사람을 '성직자'로 유형화한다. 성직자는 반응적 무리를 간호하는 건강한 자가 결코 아니다. 반응적 무리와 접촉한 상태에서 이들에 감염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들을 간호하거나 치료하는 건강한 자의 존재를 상정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성직자는 반응적 무리의 필요와 요청에 의해 태어난, 가장 강력하게 반응적인(병든)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병든 무리의 구원자이자 목자이자 변호인으로서 무리를 통솔하고 지배하고 혹은 좀 더 중독시키기 위해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는 외견상으로는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을 제안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무리의 고통스런 현실을 보존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는 자이다. 

원한 감정의 내면화는 공동체의 성립이라는 돌발적인 사태에 직면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성직자의 기만술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어쩌면 ①공동체의 성립과 ②무리의 지도자로서 성직자의 출현, ③원한 감정의 내면화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역사 이후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아닐까?) 병든 무리가 자신들이 겪는 고통에 분개하며 책임자를 색출하려 할 때,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모든 고통의 책임이 오로지 너희들 자신에게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원한의 방향을 변경시킨다. 그럼으로써 공동체의 일원들은 더 이상 서로 짐승처럼 싸우지 않고 내면의 깊이를 지닌 온순한 양이 되어 저마다의 마음의 골방에 처박혀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죄의식에 너무나 시달린 나머지 죽어버리면 안 되므로 성직자는 간간이 “작은 즐거움”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베풀고 상호성을 지향하고 공동체를 수호하도록 조언함으로써 무리로 하여금 소소한 행복감에 젖도록 하는 것. 그러나 그는 진정한 구원자가 아니며, 차라리 구원자의 탈을 쓴 사기꾼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병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지 않으며, 그저 각종 위로 수단을 동원해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니체는 종교 뿐 아니라 철학, 과학, 역사 등 각종 근대 학문이 품고 있는 금욕주의적 성향을 철저히 해부한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세계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기술하려는 그 모든 학문적 노력에서 니체는 도그마에 사로잡힌 관조적 인간, 반응적 인간, 병적인 인간을 읽어낸다. 

대체 왜 인간은 현실의 저편에 금욕주의적 이상을 세워놓고 인생을 구경거리로 만드는가. 인간은 왜 고통의 축제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지 못하고, 썩은 등받이 의자에 앉아 고통의 의미나 골몰하며 생을 소진하는가. 스스로를 긍정할 줄 모르는 병든 인간은 무언가를 의욕하기 위해 먼저 제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해야만 했다. 그리고 금욕주의적 이상 속에서 고통이 ‘죄’라는 관점으로 해석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하나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드디어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금욕주의적 이상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다고 말한다. 이때의 구출된 의지란 바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하고 반발하려는 의지, “허무를 향한 의지”이다.

끊임없이 의미를 탐구하는 인간의 학문적 노력이 니체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긍정할 줄 모르는 반응적 인간의 병적 징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신이나 진리라고 하는 그 모든 금욕주의적 이상, 그것은 고통으로 얼룩진 삶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이 지어낸 강박적 환상일 뿐인가. 진리를 밝히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며 신은 처형되어야 마땅한가. 그러나 초월적이고 원대한 가치를 발견하려는, 또는 그러한 것을 지향하려는 끝없는 상승의지, 자신의 의미결핍을 극복하고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로서 온전한 실존을 찾고자 하는 욕망-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인간이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찬란한 본능인지 모른다. 도그마에 짓눌린 채 대지에서 벌어지는 삶의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인간도 가련하지만, 마음속에 그 어떤 정신적 항성(恒星)도 지니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 역시 딱하기는 매한가지 아닐까. 

탈리히는, 금욕적인 생활 속에서 존재성을 파악하려고 애써야 하는 피안의 타자로서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의 기반'으로서의 신을 얘기한다. 모든 존재의 무궁무진한 깊이와 기반에 대한 이름이 곧 신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신이란 우리 존재 전체의 궁극적인 깊이이며, 우리 실존 전체의 창조적인 기반과 의미이다. 신은 자연 위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의 '황홀성' 속에 그 초월적인 '깊이'와 '기반'으로 존재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니체가 단칼에 베어버린 독단적 권위와 도그마의 시체 위에서 우리는 그저 '허무'만을 곱씹어야 하는 것일까. 모든 자명한 것들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새롭게 재건할 수 있지 않을까. 탈리히가 정의하는 ‘신’ 개념은 이러한 물음을 풀어가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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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10-04-10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발제까지.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진심 '부럽습니다'ㅋㅎ

수양 2010-04-1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발제도 써가야 되는 빡센 프로그램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_-
 

오늘 강의 중에 흥미롭게 들었던 대목은 ‘전향’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곱씹어 보면: 

 

노예가 의식적인 훈련을 통해 주인의 경지로 ‘이행’할 수는 없다. 다만, 노예가 ‘전향’을 통해 일거에 새로운 주체가 되어 주인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전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1)사건의 체험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2)차이의 파토스 속에서 자신의 노예적 상황(?)을 준열하게 응시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다. 처절한 자기 응시가 극한에 달했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어떤 전환, 이것은 변증법과는 다른 종류의 도약이며, 이것이 ‘전향’이 될 수 있다.

 

(1)과 관련해서 더 생각해 본 것인데요. 주체를 독립적이고 고정된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의 작용(칸트 식으로 말하면 통각작용) 내지는 작용의 효과로 정의한다면, 새로운 배치 속에서 접속하는 항이 달라진 주체, 그러니까 새로운 배치 속에서 다른 ‘기계’가 된 주체 또한 전향이 일어난 주체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즉, ‘사건’이 통시적인 측면에서 각각의 어떤 상태(항)들이 계열화되는 것을 뜻한다면, 공시적인 측면에서는 ‘배치’의 문제를 주목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 경우에 직장에선 전형적인 원한의 인간이자 초특급 노예인데 공부하러 오면 그래도 좀 주인다워지거든요. 처해 있는 환경(물적 토대)에 따라서, 그러니까 어떤 배치의 장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서 힘의 발생 양식도 사뭇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능동적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만한 배치의 장 속으로 자신의 위치를 이동시키거나, 혹은 새로운 배치(환경)를 스스로 창조해낸다든지 함으로써 주인으로의 전향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배치 속에서 전혀 다른 기계가 됨으로써 말이죠. 물론 포괄적인 범주에서 보면 이 또한 '사건의 체험'일 수 있겠습니다만...

 

선생님의 답변: 사건은 통시적인, 즉 크로노스(연대기)적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이고 평평한 시간, 그러니까 아이온(영겁회귀)의 시간 속에서 생성되는 게 아닐까요? '전향', 내지 '존재변이'를 위해 우리는 통시적인 사건을 겪는 게 아니라 영원회귀적인 사건을 기다리고, 혹은 창조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또한 '배치'가 어떤 초월론적 '장'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공시적으로 보이지만 그 선험적 장에는 시간성이 내포되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래야 장의 변이(차이생성)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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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타자란 무엇인가, 타자란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타자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선생님이 던지신 화두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점점 더 엉켜가는 것 같습니다. 뭔가 복잡한 대로나마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어서 몇 자 적어봅니다. 먼저 선생님이 던져주신 화두가 갖는 문제 설정 자체에 대한 의문입니다.

 

강의 중에도 말씀 드린 바 있듯이 A라고 하는 어떤 대상을 정의(인식)하는 방법으로는, ①not A와 A 간의 차이의 정도에 의해 A를 정의하는 방법(A 외적인 것에 의존하는 방법) 외에도 ②not A라고 하는 타자를 상정하지 않고, A 내부에서 발생하는 차이(A를 존재하게 하는 A의 속성들)에 의해 A를 정의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이 아니라, 작년에 남산에서 했던 이수영 선생님의 <니체와 철학> 강의때 주워들은 거예요^^;;)

 

저는 ‘타자’라는 어휘 자체가 대상을 인식하는 ①의 방식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특수한’ 용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만약 타자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궁극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어떤 딜레마가 있다면, 그것은 ‘타자’라는 용어에 갇혀있는 인식 방법 자체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즉 ①번의 인식 방식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다른 인식 방법을 통해 극복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대상의 정의에 대한 두 가지 인식론적 방법을 응용(?)해보면, 인간의 인식 활동은 ①인식하려는 것을 타자화시킬 수 있는, 즉 대상화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가능한 부분이 있고, ②반대로 거리를 아예 두지 않음으로써, 그러니까 대상에 참여함으로써, 대상과 겹쳐짐으로써, 융화함으로써, 다시 말해 어떤 '몰아'의 상태 속에서 ‘존재론적 닮기’를 통해 가능한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수업시간에 잠깐 언급한 바 있듯이 '여행'이라는 체험을 통해서는 전자의 인식 활동이, '정주'의 체험을 통해서는 후자의 인식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날 것 같습니다.)

 

저는 ②번 역시 하나의 명백한 인식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인식의 영역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인식일 것 같습니다. 이 또다른 차원의 인식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인식의 영역에 포섭되기 위해서는 차후적으로 언어의 외피를 걸쳐야 할 것이겠죠. 언어라는 객관적 인식의 틀 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겠죠. 어쩌면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20년 동안 침묵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하고요.

 

제가 예전에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프리조프 카프라, 범양사)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는데요. 그 책에 따르면, 현대물리학에서 다루는 물질의 아원자 단위는 입자와 파동이라는 양면성을 띠는 매우 추상적인 실체입니다. 그것은 입자이면서 또한 동시에 파동이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로 더 이상 분해가 불가능합니다. 대상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아원자 세계를 탐구함에 있어 그들 '그물의 관계'들은 언제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까지도 포함합니다.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관찰되는 과정들의 연쇄에서 마지막 연결을 이루며,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단지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원자물리학에서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데카르트적 구분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원자물리학에서는 관찰에 참여하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물리학의 이런 내용이 오늘 우리의 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식이 극도로 치열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순수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현대물리학의 분야에서와 같이) 타자라는 개념 자체를 파기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생기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지점을 넘어서면 더 이상 ‘타자’와 ‘인식’이 동시에 한 문장 안에서 사유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수업 시간에 잠시 언급했던 청량리 이야기는 이런 맥락과 닿아있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담입니다. 청량리 중에서도 할렘가(?) 쪽에 첫 직장을 얻어 그곳에서 2년 반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부랑자, 노숙자, 성매매여성, 정신이상자, 술 취한 사람, 싸우는 사람, 길에서 잠자는 사람, 돈 달라는 사람, 안 씻는 사람, 신발 안 신고 다니는 사람 기타 등등을 마주하게 되었는데요. 저로서는 그런 세계(?)자체가 충격이었습니다. 그때 정말 머릿속이 많이 복잡했던 거 같아요.

 

처음에는 동정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정심이란 얼마나 위선적인 감정인지요. 동정이라는 감정의 배후에는 ‘동정을 느끼는 대상’과 ‘동정하는 나’의 처지(성별, 나이, 생활환경, 경제력, 지능, 사회적 지위 등)가 서로 다르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의 총체적 처지가 대상의 그것보다 좀 더 우월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그제야 비로소 ‘역치값 이상이 되는’ 감정이 동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지가 다른 타인에 대하여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와 내가 서로 처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히 인식하는 거밖에 안 됩니다. 동정이라는 것은 결국, 타자와 나의 명확한 선 긋기인 셈이죠. 명확한 선을 긋고, 그 선 너머를 쯧쯧 거리며 바라보는 것- 그런 것이 동정인 것입니다. 대단히 졸렬하고 저급한 수준의 감정적 이해입니다. 대상으로부터의 거리가 똑같다는 점에서 동정은 혐오의 이면이 아닐까, 그러니 동정을 베푼 대상은 동시에 언제든지 혐오의 대상으로 전복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동정과 혐오가 야누스의 두 얼굴이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기까지 딱 일 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청량리에서 근무하던 시절, 만약 제가 위선을 저지르지 않고 양심을 유지하길 원했다면, 저는 그때 그들 안에 들어가서 '부대끼는 게' 옳았습니다. '부대낀다'는 것은 저에게는 그러니까 존재론적 닮기, 동일화, 그들과의 처지가 똑같아지는 것(사고의 양태까지 모조리)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저는 카메라를 들고 사창가 골목을 돌아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며(‘사진찍기’는 결코 호기심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제가 청량리를 어떻게든 이해해 보기 위해 고심 끝에 선택한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 행동이 자기 본위로 타자를 이해하려는 대단히 자족적인 활동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심각한 폭력이 될 수도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꽤 나중의 일입니다), 청량리를 청량리라고 의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청량리 사람을 청량리 사람으로 의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저는 청량리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세수하고 이 닦고 잠자는 것에 대해 일일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요.

 

그러나 그때 저 스스로에게 ‘너는 과연 이들과 부대낄 자신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면 늘 부정적인 대답만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부대끼고 싶지 않고, 어울리고 싶지 않고, 제가 그은 선을 지우는 것이 무섭고 두렵고 싫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청량리에 적을 두는 동안 제가 도달할 수 있었던 한없이 초라한 사유의 최종점이었고, 그 결론이 보다 일진보할 만한 어떤 새로운 기회를 갖기도 전에 다른 사정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뭔가 해소되지 못한 꺼림칙한 마음으로 청량리와는 영원히 작별하고 말았습니다.

 

'타자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타자란 무엇인가, 타자란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타자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라는 오늘 선생님 물음에 제일 먼저 떠오른 타자는 저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청량리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량리라는 타자는 저로서는 아직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어쩜 아마도 저에게는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계속해서 따끔거릴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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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 랜덤 시선 39
박진성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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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디 장미가 아르바이트로 피던가 일용직으로 계약직으로 피던가 십 년 거치 십 년 상환으로 피던가 월세 삼십만 원으로 꽃망울 터뜨리던가 작문연구 교양국어로 일렁이던가 박사논문 시간강사로 출렁이던가 // 꽃이면 그냥 꽃인 게지 아라리인 게지 제 질 자릴 보고 언제 장미가 피던가 흐르는 피여, 비화(飛火)하는 혼이여, 오늘밤은 언어들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 입가에 피 묻어서 장미처럼만 넋이 붉어져야겠다 너는 장미의 남방한계선으로 나는 장미의 북방한계선으로 꽃 피우러 가자 붉고 서러운 아라리로 불 지르러 가자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박송이 너는 <장미, 불꽃 아라리-박송이에게> 中에서

아라리가 난 거랑께 의사 냥반, 까운에 환장허겄다고 달라붙는 햇살이 아라리가 나서 꽃잎을 흔들자뉴 오메 발병 원인은 불안 강박 우울 공황 발작, 이런 게 아니라 아라리가 나서 그렇탕께 왜 심전도는 찍자 그러는규 술판서 언 눔이 아리랑을 불러 재끼는디 아라리가 헉 하고 피를 토해내능규 복분자가 요강을 뒤집어엎는 것맹기루 아라리가 내 몸도 이렇게 뒤집어서리 환장허겄다고 나도 아라아리가 나아안네 부르고 있는디 내 몸이 꽃이파리마냥 바르르 떨고 있는디 그 냥반들이 응급실에다 나를 처넣은규 숨이야 아라리가 쉬겄지 심장이야 지 혼자 팔딱팔딱 하는 거구 긍께 의사 냥반 이 담에 병원 와서 불안하고 우울하담서 뒤집어 자빠진 사람 있으믄 아리랑 한 번 불러주슈 아라리 땜시 잠시 잠깐 그랑깅께, 저 꼰잎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는 아라리 몸 좀 보소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믄 아라리 한번 재껴부리믄 돼쥬, 나 갈라유! <아라리가 났네> 전문

우리가 낱말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시인이야말로 궁극의 권력자가 아닐까. 오로지 시인만이 낱말을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낱말을 채집할 뿐 아니라 독점한다. 독점한 낱말에 자신을 새겨넣으므로써 시인은 그 낱말이 사어가 되는 날까지 불멸한다. 시(詩)는 특정 시인의 소유가 되어버린 낱말을 더 이상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 구태여 언급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낱말의 소유주를 의식해야 한다. 마치 보이지 않는 로열티를 지불하듯이. '딱딱한' 것이 기형도 시인의 것이고, '동백'이 송찬호 시인의 것이라면, '아라리'는 박진성 시인의 소유다. 그 누구도 '아라리'에 관해서라면 박진성 시인만큼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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