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얼마나 예리한 침(針)인가. 그것은 세계를 요란하게 분해하지 않고도 그저 단 몇 마디의 소곤거림으로 본질에 도달해버리는 것이다. 시는 세계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아니, 차라리 시는 세계를 인식하기보다 세계에 조응한다고 하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시는 얼마나 겸허한가. 그리고 또한 그것은 얼마나 보드랍게 세계를 만지는가. 시에 몹시 빠져들었던 무렵에는 시 아닌 모든 텍스트들이 심지어 더럽게마저 느껴졌다. 정말이지 더러워서, 시 아닌 모든 것들이 한동안 읽기 싫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최승자 시인의 말처럼 “시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무슨 말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슨 할 말도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도 시는 여하튼 존재한다는 배짱 혹은 체념 혹은 위안에서가 아니라, 그러나 시에 대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시는 매번 그 자신을 새롭게 '시'이도록 함으로써 시로서 존재할 뿐이다. 시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 자신뿐이리라. 시에 대해 무어라 얘기하는 지금 이 글 역시 결국은 시에 대한 모독에 불과한 것이리라. 마음이 가난한 나는 단지 시라고 하는 성전과 그 성전을 짓는 사도들을 향해 한없이 달뜬 마음으로 경배드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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