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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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는 자신의 불행이 강자의 무절제한 행동에 있다고 여겨 원한을 품는다. 그러나 외부를 향했던 이 폭력적 감정은 “돌발적 사태” 이후 철저히 내면화 된다. 모든 죄를 제 탓으로 돌려 양심의 가책 속에서 살아가는 약자. 도덕의 계보 제3논문에서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약자가 ‘금욕주의적 이상’이라고 하는, 삶에 반대되면서 우선시되는 경건한 가치들을 고안해내고 그러한 가치들을 통해 삶 자체를 단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금욕주의자들은, 삶을 “저 다른 생존을 위한 하나의 다리”로 간주한다. 그들은 삶을 “반박해야만 하는 오류처럼 취급”함으로써 비로소 삶을 영위한다. 삶을 부정함으로써 삶을 누리는 이러한 자기 모순적 삶의 유형에서 니체는 극심한 원한을 발견한다: “여기에는 견줄 데 없는 원한이, 즉 삶에서의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 그 가장 깊고, 강력하며, 가장 기저에 있는 조건들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기갈 들린 본능과 힘 의지의 원한이 지배하고 있다.”(481) 

금욕주의자들은 오로지 힘의 원천을 봉쇄하기 위해 힘을 사용한다. 그들은 욕망(생명력, 힘, 에너지)의 표출을 경계하고, 미의 표현이나 기쁨에 서툴며, 반면에 발육 부전, 고통이나 사고, 추악한 것이나 자발적인 희생, 자기 상실이나 자기 질책, 자기희생에 대해서는 환희와 희열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전제조건인 생리적 삶의 능력이 감퇴할수록 더더욱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의기양양해 한다. 

자기를 서서히 말려 죽여가면서 자기를 발견하는 기묘한 금욕주의자들. 이들은 퇴화되어가는 자신들의 삶을 방어하고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욕주의적 이상’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이상을 찬양하지만, 기실은 이상에 지배당한 채로 언제나 죽음, 권태, 피로, 종말을 향한 소망 따위와 대항하여 싸우고 있을 뿐이다.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고안해 내어 반응적인 무리를 장악하는 사람을 '성직자'로 유형화한다. 성직자는 반응적 무리를 간호하는 건강한 자가 결코 아니다. 반응적 무리와 접촉한 상태에서 이들에 감염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들을 간호하거나 치료하는 건강한 자의 존재를 상정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성직자는 반응적 무리의 필요와 요청에 의해 태어난, 가장 강력하게 반응적인(병든)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병든 무리의 구원자이자 목자이자 변호인으로서 무리를 통솔하고 지배하고 혹은 좀 더 중독시키기 위해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는 외견상으로는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을 제안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무리의 고통스런 현실을 보존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는 자이다. 

원한 감정의 내면화는 공동체의 성립이라는 돌발적인 사태에 직면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성직자의 기만술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어쩌면 ①공동체의 성립과 ②무리의 지도자로서 성직자의 출현, ③원한 감정의 내면화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역사 이후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아닐까?) 병든 무리가 자신들이 겪는 고통에 분개하며 책임자를 색출하려 할 때,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모든 고통의 책임이 오로지 너희들 자신에게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원한의 방향을 변경시킨다. 그럼으로써 공동체의 일원들은 더 이상 서로 짐승처럼 싸우지 않고 내면의 깊이를 지닌 온순한 양이 되어 저마다의 마음의 골방에 처박혀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죄의식에 너무나 시달린 나머지 죽어버리면 안 되므로 성직자는 간간이 “작은 즐거움”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베풀고 상호성을 지향하고 공동체를 수호하도록 조언함으로써 무리로 하여금 소소한 행복감에 젖도록 하는 것. 그러나 그는 진정한 구원자가 아니며, 차라리 구원자의 탈을 쓴 사기꾼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병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지 않으며, 그저 각종 위로 수단을 동원해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니체는 종교 뿐 아니라 철학, 과학, 역사 등 각종 근대 학문이 품고 있는 금욕주의적 성향을 철저히 해부한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세계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기술하려는 그 모든 학문적 노력에서 니체는 도그마에 사로잡힌 관조적 인간, 반응적 인간, 병적인 인간을 읽어낸다. 

대체 왜 인간은 현실의 저편에 금욕주의적 이상을 세워놓고 인생을 구경거리로 만드는가. 인간은 왜 고통의 축제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지 못하고, 썩은 등받이 의자에 앉아 고통의 의미나 골몰하며 생을 소진하는가. 스스로를 긍정할 줄 모르는 병든 인간은 무언가를 의욕하기 위해 먼저 제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해야만 했다. 그리고 금욕주의적 이상 속에서 고통이 ‘죄’라는 관점으로 해석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하나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드디어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금욕주의적 이상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다고 말한다. 이때의 구출된 의지란 바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하고 반발하려는 의지, “허무를 향한 의지”이다.

끊임없이 의미를 탐구하는 인간의 학문적 노력이 니체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긍정할 줄 모르는 반응적 인간의 병적 징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신이나 진리라고 하는 그 모든 금욕주의적 이상, 그것은 고통으로 얼룩진 삶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이 지어낸 강박적 환상일 뿐인가. 진리를 밝히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며 신은 처형되어야 마땅한가. 그러나 초월적이고 원대한 가치를 발견하려는, 또는 그러한 것을 지향하려는 끝없는 상승의지, 자신의 의미결핍을 극복하고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로서 온전한 실존을 찾고자 하는 욕망-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인간이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찬란한 본능인지 모른다. 도그마에 짓눌린 채 대지에서 벌어지는 삶의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인간도 가련하지만, 마음속에 그 어떤 정신적 항성(恒星)도 지니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 역시 딱하기는 매한가지 아닐까. 

탈리히는, 금욕적인 생활 속에서 존재성을 파악하려고 애써야 하는 피안의 타자로서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의 기반'으로서의 신을 얘기한다. 모든 존재의 무궁무진한 깊이와 기반에 대한 이름이 곧 신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신이란 우리 존재 전체의 궁극적인 깊이이며, 우리 실존 전체의 창조적인 기반과 의미이다. 신은 자연 위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의 '황홀성' 속에 그 초월적인 '깊이'와 '기반'으로 존재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니체가 단칼에 베어버린 독단적 권위와 도그마의 시체 위에서 우리는 그저 '허무'만을 곱씹어야 하는 것일까. 모든 자명한 것들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새롭게 재건할 수 있지 않을까. 탈리히가 정의하는 ‘신’ 개념은 이러한 물음을 풀어가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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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10-04-10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발제까지.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진심 '부럽습니다'ㅋㅎ

수양 2010-04-1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발제도 써가야 되는 빡센 프로그램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