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타자란 무엇인가, 타자란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타자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선생님이 던지신 화두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점점 더 엉켜가는 것 같습니다. 뭔가 복잡한 대로나마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어서 몇 자 적어봅니다. 먼저 선생님이 던져주신 화두가 갖는 문제 설정 자체에 대한 의문입니다.

 

강의 중에도 말씀 드린 바 있듯이 A라고 하는 어떤 대상을 정의(인식)하는 방법으로는, ①not A와 A 간의 차이의 정도에 의해 A를 정의하는 방법(A 외적인 것에 의존하는 방법) 외에도 ②not A라고 하는 타자를 상정하지 않고, A 내부에서 발생하는 차이(A를 존재하게 하는 A의 속성들)에 의해 A를 정의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이 아니라, 작년에 남산에서 했던 이수영 선생님의 <니체와 철학> 강의때 주워들은 거예요^^;;)

 

저는 ‘타자’라는 어휘 자체가 대상을 인식하는 ①의 방식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특수한’ 용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만약 타자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궁극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어떤 딜레마가 있다면, 그것은 ‘타자’라는 용어에 갇혀있는 인식 방법 자체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즉 ①번의 인식 방식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다른 인식 방법을 통해 극복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대상의 정의에 대한 두 가지 인식론적 방법을 응용(?)해보면, 인간의 인식 활동은 ①인식하려는 것을 타자화시킬 수 있는, 즉 대상화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가능한 부분이 있고, ②반대로 거리를 아예 두지 않음으로써, 그러니까 대상에 참여함으로써, 대상과 겹쳐짐으로써, 융화함으로써, 다시 말해 어떤 '몰아'의 상태 속에서 ‘존재론적 닮기’를 통해 가능한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수업시간에 잠깐 언급한 바 있듯이 '여행'이라는 체험을 통해서는 전자의 인식 활동이, '정주'의 체험을 통해서는 후자의 인식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날 것 같습니다.)

 

저는 ②번 역시 하나의 명백한 인식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인식의 영역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인식일 것 같습니다. 이 또다른 차원의 인식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인식의 영역에 포섭되기 위해서는 차후적으로 언어의 외피를 걸쳐야 할 것이겠죠. 언어라는 객관적 인식의 틀 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겠죠. 어쩌면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20년 동안 침묵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하고요.

 

제가 예전에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프리조프 카프라, 범양사)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는데요. 그 책에 따르면, 현대물리학에서 다루는 물질의 아원자 단위는 입자와 파동이라는 양면성을 띠는 매우 추상적인 실체입니다. 그것은 입자이면서 또한 동시에 파동이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로 더 이상 분해가 불가능합니다. 대상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아원자 세계를 탐구함에 있어 그들 '그물의 관계'들은 언제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까지도 포함합니다.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관찰되는 과정들의 연쇄에서 마지막 연결을 이루며,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단지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원자물리학에서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데카르트적 구분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원자물리학에서는 관찰에 참여하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물리학의 이런 내용이 오늘 우리의 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식이 극도로 치열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순수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현대물리학의 분야에서와 같이) 타자라는 개념 자체를 파기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생기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지점을 넘어서면 더 이상 ‘타자’와 ‘인식’이 동시에 한 문장 안에서 사유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수업 시간에 잠시 언급했던 청량리 이야기는 이런 맥락과 닿아있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담입니다. 청량리 중에서도 할렘가(?) 쪽에 첫 직장을 얻어 그곳에서 2년 반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부랑자, 노숙자, 성매매여성, 정신이상자, 술 취한 사람, 싸우는 사람, 길에서 잠자는 사람, 돈 달라는 사람, 안 씻는 사람, 신발 안 신고 다니는 사람 기타 등등을 마주하게 되었는데요. 저로서는 그런 세계(?)자체가 충격이었습니다. 그때 정말 머릿속이 많이 복잡했던 거 같아요.

 

처음에는 동정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정심이란 얼마나 위선적인 감정인지요. 동정이라는 감정의 배후에는 ‘동정을 느끼는 대상’과 ‘동정하는 나’의 처지(성별, 나이, 생활환경, 경제력, 지능, 사회적 지위 등)가 서로 다르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의 총체적 처지가 대상의 그것보다 좀 더 우월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그제야 비로소 ‘역치값 이상이 되는’ 감정이 동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지가 다른 타인에 대하여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와 내가 서로 처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히 인식하는 거밖에 안 됩니다. 동정이라는 것은 결국, 타자와 나의 명확한 선 긋기인 셈이죠. 명확한 선을 긋고, 그 선 너머를 쯧쯧 거리며 바라보는 것- 그런 것이 동정인 것입니다. 대단히 졸렬하고 저급한 수준의 감정적 이해입니다. 대상으로부터의 거리가 똑같다는 점에서 동정은 혐오의 이면이 아닐까, 그러니 동정을 베푼 대상은 동시에 언제든지 혐오의 대상으로 전복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동정과 혐오가 야누스의 두 얼굴이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기까지 딱 일 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청량리에서 근무하던 시절, 만약 제가 위선을 저지르지 않고 양심을 유지하길 원했다면, 저는 그때 그들 안에 들어가서 '부대끼는 게' 옳았습니다. '부대낀다'는 것은 저에게는 그러니까 존재론적 닮기, 동일화, 그들과의 처지가 똑같아지는 것(사고의 양태까지 모조리)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저는 카메라를 들고 사창가 골목을 돌아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며(‘사진찍기’는 결코 호기심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제가 청량리를 어떻게든 이해해 보기 위해 고심 끝에 선택한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 행동이 자기 본위로 타자를 이해하려는 대단히 자족적인 활동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심각한 폭력이 될 수도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꽤 나중의 일입니다), 청량리를 청량리라고 의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청량리 사람을 청량리 사람으로 의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저는 청량리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세수하고 이 닦고 잠자는 것에 대해 일일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요.

 

그러나 그때 저 스스로에게 ‘너는 과연 이들과 부대낄 자신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면 늘 부정적인 대답만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부대끼고 싶지 않고, 어울리고 싶지 않고, 제가 그은 선을 지우는 것이 무섭고 두렵고 싫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청량리에 적을 두는 동안 제가 도달할 수 있었던 한없이 초라한 사유의 최종점이었고, 그 결론이 보다 일진보할 만한 어떤 새로운 기회를 갖기도 전에 다른 사정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뭔가 해소되지 못한 꺼림칙한 마음으로 청량리와는 영원히 작별하고 말았습니다.

 

'타자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타자란 무엇인가, 타자란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타자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라는 오늘 선생님 물음에 제일 먼저 떠오른 타자는 저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청량리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량리라는 타자는 저로서는 아직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어쩜 아마도 저에게는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계속해서 따끔거릴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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