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맛을 알았다. 내가 이제까지 먹었던 게는 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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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송 송소고택에서 하루 묵었다. 9대에 걸쳐 만석의 부를 누린 영남의 대부호가 1880년경에 건축한 가옥이라고. 새벽을 여는 산새소리, 다음날 오전까지 사그라들지 않던 아랫목 온기, 온돌방 안에 가득했던 참나무 내음... 사진으로 담아낼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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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6-05-04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80년경 지어졌다고 해도 130년이 훨씬 넘은 집이네요.
산새소리, 아랫목 온기, 참나무 내음... 시각, 청각에 후각까지 자극받고 갑니다.
사진에 풍경을 담는 시각이 멋지세요.

수양 2016-05-04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사체가 워낙 훌륭해서요. 사진에 미처 다 담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예요. 정말 좋드라구요.
 

진도에서는 망자를 떠나보내는 일이 그저 엄숙하고 비장한 행사만은 아니었다. '다시래기'라고 하는 마당극과 같은 희극 공연이 엄연히 장례 예식의 일부를 구성하기도 했으니. 관을 앞에 두고 다시래기를 구경하면서 유족들은 울다가도 끝내 웃을 수밖에 없었겠다. 천둥이 몰아치는 날씨, 성경책, 십자가, 검은 우산 따위가 클리셰로 떠오르는 기독교식 장례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가 죽음조차 하나의 축제와 놀이의 장으로 승화시킨 진도 상장례를 보고 나니 신선하고도 뭉클했다. 가족과 이웃의 죽음은 분명 슬프고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진도 상장례는 죽음이라는 비극조차 생에 대한 긍정으로 치환한다. 구성진 노랫가락으로 떠난 자의 저승길을 축원하고 눈물로 얼룩진 남은 자의 삶을 다정한 해학으로 보듬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저미는 가슴으로, 하지만 또한 명랑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실제 장례식도 아닌데 이 즐거운 애도의 예술 앞에서 눈물이 다 났다. 좋았다.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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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3-23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간담은 니체를 지키고 있군요...간담의 어깨가 쳐졌습니다. ㅎㅎㅎ
서가는 곰발님 일전에 구입하신 서가와 비슷한 거 같습니다.
집구경,서재구경 잘 했습니다. ^^

수양 2016-03-25 00:49   좋아요 0 | URL
니체 앞에 서있기 벅찬가봐요^^
 

사랑은,

                  -이인원

 

 

눈독들일 때, 가장 아름답다
하마
손을 타면
단숨에 굴러 떨어지고 마는
토란잎 위
물방울 하나


아니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눈독에 머물지 않고 덤벼들어야지. 야생의 짐승이 그렇듯이, 호기심으로 빛나는 발톱을 세우고, 격정과 충동에 휩싸여 야수처럼 덤벼들어야지. 산산이 부서지는 날카로운 이슬에 온가슴이 찢기더라도 파국을 향해 용맹하게 돌진해야지. 모든 류의 관조 취미는 늙음의 표식이다. 그것이 그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되어도 결국은. 이라고 며칠 전에 썼다가 어제 우연히 어떤 책에서 (어느 일본 소설가의 작풍 변화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이런 대목을 읽었는데

 

(...) 욕망이 대상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힘을 다한 후 남겨진 것은, 언제나 쾌락의 절반은 익살맞고, 절반은 끔찍한 껍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작품이 성공한 것은 <벨벳의 꿈>(1919)이나 <인어의 슬픔>(1917)에서 주체와 욕망의 대상이 두꺼운 유리로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욕망이 불완전하게 끝나는 때이다. 욕망은 언제나 대상과의 간극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관서 지역으로 이주한 이후, 다니자키는 욕망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것, 욕망을 어디까지나 지연시키고, 그 지연을 쾌락으로 만드는 것을 선택한다. 그것은 직접성에서 간접성으로의 전환이다. 눈부신 빛에서 그림자로 가라앉는 모호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 순간적으로 부여되는 선정적인 이미지에서, 대상을 만지작거리는 맹인의 손가락 끝으로의 전환. (...) 그는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의 마조히즘을 완성하는 것이다. -158쪽, 구라카즈 시게루,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中에서

 

의도적으로 욕망의 충족을 지연시키면서 쾌락을 얻는 관조 취미는 늙음의 표식이 아니었군. 마조히스트의 생활 양식이었군. 늙은이든 마조히스트든 그런 식의 변태적 금욕주의는 나를 질리게 만든다. 사랑은 눈독 들이는 게 아니라 덤벼드는 거다. 사랑은 기투(企投f)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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