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이인원

 

 

눈독들일 때, 가장 아름답다
하마
손을 타면
단숨에 굴러 떨어지고 마는
토란잎 위
물방울 하나


아니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눈독에 머물지 않고 덤벼들어야지. 야생의 짐승이 그렇듯이, 호기심으로 빛나는 발톱을 세우고, 격정과 충동에 휩싸여 야수처럼 덤벼들어야지. 산산이 부서지는 날카로운 이슬에 온가슴이 찢기더라도 파국을 향해 용맹하게 돌진해야지. 모든 류의 관조 취미는 늙음의 표식이다. 그것이 그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되어도 결국은. 이라고 며칠 전에 썼다가 어제 우연히 어떤 책에서 (어느 일본 소설가의 작풍 변화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이런 대목을 읽었는데

 

(...) 욕망이 대상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힘을 다한 후 남겨진 것은, 언제나 쾌락의 절반은 익살맞고, 절반은 끔찍한 껍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작품이 성공한 것은 <벨벳의 꿈>(1919)이나 <인어의 슬픔>(1917)에서 주체와 욕망의 대상이 두꺼운 유리로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욕망이 불완전하게 끝나는 때이다. 욕망은 언제나 대상과의 간극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관서 지역으로 이주한 이후, 다니자키는 욕망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것, 욕망을 어디까지나 지연시키고, 그 지연을 쾌락으로 만드는 것을 선택한다. 그것은 직접성에서 간접성으로의 전환이다. 눈부신 빛에서 그림자로 가라앉는 모호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 순간적으로 부여되는 선정적인 이미지에서, 대상을 만지작거리는 맹인의 손가락 끝으로의 전환. (...) 그는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의 마조히즘을 완성하는 것이다. -158쪽, 구라카즈 시게루,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中에서

 

의도적으로 욕망의 충족을 지연시키면서 쾌락을 얻는 관조 취미는 늙음의 표식이 아니었군. 마조히스트의 생활 양식이었군. 늙은이든 마조히스트든 그런 식의 변태적 금욕주의는 나를 질리게 만든다. 사랑은 눈독 들이는 게 아니라 덤벼드는 거다. 사랑은 기투(企投f)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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