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삶 - 배우고 익히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지음, 이재만 옮김 / 유유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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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한 세기를 앞서 살았던 프랑스인 수도사가 들려주는 지혜의 말씀은, 게으르고 미욱하지만 소박하게나마 그리고 간헐적으로나마 <공부하는 삶>을 바라는 나 같은 이에게도 백 년의 간극을 넘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까닭은, 저자가 당초 이 책의 들머리에서부터, 생계를 잇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느라 "삶의 가장 작은 부분만을 본인 뜻대로 할 수 있는", "평균 정도의 자질"을 가진 지극히 평범한 독자들을 상정한 채 글을 써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오로지 내적인 필요에 의해 밤늦게 생계와 직접적 상관이 없는 책을 펼쳐드는 필부들을, 저자는 아름다운 비유로 이렇게 두둔한다. "좁은 둑 사이에 갇힌 냇물은 맹렬히 흘러갈 것이다. 가령 직업의 규율은 훌륭한 학교 같은 것이다. 우리는 속박이 있을 때 더욱 집중하고 시간의 가치를 배울 것이다."(31), "힘은 역경에서 솟아난다. 가파른 산을 지날 때 정신을 집중하고 긴장하는 법이다. (...) 더 필요한 것은 열정적인 고독이다. 그 고독 안에서는 하나의 씨앗이 백개의 낱알을 맺고, 충만한 태양빛이 모든 땅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33)

 

그러나 앎의 추구, 관념의 탐구 만큼이나 저자가 큰 가치를 부여하는 부분은 구체로서의 일상이다. 일상을 영위한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식을 탐하여 가장 엄격한 의무마저 망설임 없이 저버리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딜레탕트다."(54) "순전히 책으로만 쌓은 앎은 쉽게 허물어진다. (...) 사유하는 사람인 당신은 반드시 세상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 발이 땅을 딛듯이, 절름발이가 목발에 기대듯이, 사유는 현실에 근거해야 한다."(103) 저자는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가 현실 도피의 명분이 되는 상황을 우려하면서 우리가 지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는 매일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단언한다. 적다면 적고 넉넉하다면 넉넉한 시간이지만 확고한 의지만 있다면 기존의 생활을 크게 뒤흔들지 않고도 분초를 추렴하여 요량껏 마련해 볼 수 있는 정도의 시간임에는 틀림없겠다.

 

읽기의 첫째 원칙으로 '적게 읽기'를 꼽고 있다는 점 역시 인상적인 대목이다. 저자는 "허겁지겁 읽는 것, 자제하지 못하는 습관, 정신을 해치는 과도한 마음의 양식" 등을 "내면의 고요"를 깨뜨린다는 이유로 경계하면서, 우리가 읽을 책을 선별할 때는 마치 "현명한 소비 규칙에 따라 그날 먹을거리를 미리 정한 주부가 시장에 갈 때처럼 책에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지혜롭게 공부하는 이는 자제력을 잃지 않으면서 차분하고 명석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과 유용하게 쓰일 것만을 정신에 간직하고, 뇌를 신중하게 관리하며, 뇌에 아무 것이나 쑤셔 넣지 않는다."(214) 지적 폭식증에 걸린 듯이 마구잡이로 헤프게 읽지 말고, 내적 탐구의 방향성을 상기하며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만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읽으라는 것.

 

곳곳에 향기로운 구절들이 가득하다. "은신처는 정신의 실험실이다. 내적 고독과 고요는 정신의 두 날개다. 세상의 구원을 포함한 모든 위업은 적막한 곳에서 준비되었다."(82), "기도를 하면서 공부를 준비하는 것은 햇빛이 쏟아지는 문을 지나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137), "참된 것을 향해 내딛는 이 한걸음은 햇빛을 받으며 떠나는 소풍과 같다. 그 소풍에서 우리는 세계를 새롭게 보고, 우주 전체가 우리가 발견한 파편과 맞닿은 채 진동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203), "위생학자들은 신체를 위해 세 가지-목욕, 공기욕, 몸 안의 노폐물 배출-을 추천한다. 운동선수가 그에게는 삶 자체인 내적 운동으로 근육을 느끼고 경기를 준비하듯이 정신의 조직에 활력을 불어놓고 인성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의식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는 여기에 고요로 씻어내는 영혼의 목욕을 덧붙이고 싶다."(86)

 

고요로 씻어내는 영혼의 목욕이라! 수도사의 문장이란 이런 것일까. 검박하고 경건하며 때로는 시적이다. 이 책은 재생지로 되어 있고 표지 디자인 역시 단조롭고 투박하다. 저자가 만족해 할 만한 외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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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1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2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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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생김과 성격, 심리묘사가 거의 세필로 그린 정밀화 수준. 모르긴 몰라도 소설 장르만이 도달할 수 있는 문학적 세공의 경지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이런 부분이 아닐까. 작가의 페르소나는 용빈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비극적 에로티시즘을 보여주는 백치스런 용란이가 가장 눈에 밟힌다. 무구한 눈빛을 가진 야생의 암코양이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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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4-02-17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3때 닳도록(까진 아니지만) 봤던 수능 기출문제 지문을 십 몇년 만에 다시 읽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그 유명했던 중구영감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식물성의 저항
이인성 지음 / 열림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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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언어는 아마도, 살로 살아내고 있음을, 살아내면서 살아서 가고 있음을, 살아가면서 다른 살이 되어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실존의 실감과 질감의 언어일 것이다."(146) 그렇다면, 나는 언젠가부터 (문학의 언어가 나를 허락하기도 전에) 문학의 언어에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을 스스로 철회해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존의 구체적 양상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삶의 가장 예민한 속살을 허물없이 내보이는 일이리라. 이 ‘드러낸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나를 점점 더 침묵하게 한다. 부끄러움은, 드러내는 행위 자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드러낼 만한 내용 자체의 빈궁함 때문이기도 하다.

 

문학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익히기. 그리하여 나를 둘러싼 구체적 삶에 대해서, 즉 나 자신의 "실존의 실감과 질감"에 대해서 함구하기. 보다 차갑고 무표정한 언어로 연막을 피우기. 그렇게 스스로에게 딴청을 부리며 살기. 언젠가부터 나는 이것을 성인이 되기 위한 심리적인 훈련의 일부로 여기게 된 것 같다. 자잘하고 궁색한 비밀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토할 것 같으면서도 애써 차분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해대는 것은, 어쩌면 자존심과 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로맹가리의 말로는, 다른 모든 곳에서 실패한 자들이 마지막으로 모여드는 데가 문학이라고 하니까. 내 알량한 자존심은, 나의 실패를 아직까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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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권유 - 시골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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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은 어떻게 오는가. 장석주 시인에 따르면 "간밤의 노름판에서 판돈을 몽땅 털리고 터덜거리며 돌아오는 탕자의 빈 가슴에 쌓이는 상심처럼" 온다. 12월이 그러한데 하물며 삼십대의 첫 12월은... 판돈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 빚더미에 올라앉은 기분이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온통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들 투성이고. 이곳 서재에 소꿉질처럼 써 놓은 걸 다시 읽어보면 이 얄팍한 기웃거림의 기록이 다 무어냐 싶다. 그러나 아무튼, 시인의 글은 탄식마저도 화려하고 낭만적이다. 여전히 미모를 간직한, 때로는 소녀스러운, 그러면서도 원숙한 여배우 같은 문장들. 미문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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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문학앨범 - 존재의 심연과 회상의 형식 웅진문학앨범 10
오정희 외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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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지시 웃는 듯 마는 듯한 오정희 선생의 얼굴은 꼭 무슨 미륵보살 같으다. 그래서인지 선생의 소설들은 마치 보살이 되어가기 위한 도야의 흔적처럼 읽힌다. 천착하는 주제와 소재의 다소 답답한 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에 언제나 고개 숙이게 되는 까닭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글쓰기에 대한 태도(완벽을 기하는 지독한 정성)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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