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성의 저항
이인성 지음 / 열림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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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언어는 아마도, 살로 살아내고 있음을, 살아내면서 살아서 가고 있음을, 살아가면서 다른 살이 되어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실존의 실감과 질감의 언어일 것이다."(146) 그렇다면, 나는 언젠가부터 (문학의 언어가 나를 허락하기도 전에) 문학의 언어에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을 스스로 철회해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존의 구체적 양상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삶의 가장 예민한 속살을 허물없이 내보이는 일이리라. 이 ‘드러낸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나를 점점 더 침묵하게 한다. 부끄러움은, 드러내는 행위 자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드러낼 만한 내용 자체의 빈궁함 때문이기도 하다.

 

문학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익히기. 그리하여 나를 둘러싼 구체적 삶에 대해서, 즉 나 자신의 "실존의 실감과 질감"에 대해서 함구하기. 보다 차갑고 무표정한 언어로 연막을 피우기. 그렇게 스스로에게 딴청을 부리며 살기. 언젠가부터 나는 이것을 성인이 되기 위한 심리적인 훈련의 일부로 여기게 된 것 같다. 자잘하고 궁색한 비밀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토할 것 같으면서도 애써 차분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해대는 것은, 어쩌면 자존심과 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로맹가리의 말로는, 다른 모든 곳에서 실패한 자들이 마지막으로 모여드는 데가 문학이라고 하니까. 내 알량한 자존심은, 나의 실패를 아직까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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