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442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나희덕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 해변에 이르러서야
히히히히잉, 내 안에서 말 한마리 풀려 나온다​

 

​말의 눈동자,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가라, 가서 돌아오지마라
이 비좁은 몸으로는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이 몹쓸 놈의 시집을 넋놓고 들여다보다가 공연히 퇴근길 버스를 두 대나 놓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내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거였다. 불쌍한 표정으로 황급히 쫓아오는 내가 분명히 백미러로 보였을 텐데 시늉으로라도 속도가 살짝 준다든지 하는 가벼운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고 강직한 태도로 떠나버리는 버스는 얼마나 야속한가. 난데없는 불행에 오기가 생겨 비가 오든 말든 기필코 세 번째 버스를 기다려 반드시 타고 가리라 결심하였으나 공교롭게도 세 번째 버스에 오르는 순간 빗발이 더욱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하려면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야 하거늘 원 이런 볍신 같은 일이 다 있나 좋게 택시를 잡을 것을 이게 다 시집 때문이다 역시나 시집은 다방면으로 생활에 우환을 가중시키는구나 싶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가 다가오는데도 창밖으로는 여전히 비가 그칠 줄을 모르고 나는 왜 고작 이런 리뷰나 구상하고 있는 걸까 나의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은 언제일까 중력에 짓눌려 질척이는 뻘밭에 오도카니 처박혀 있는 게 내 가난한 말들의 숙명인가 그게 아니라면 내게도 돌아올 말이나 좀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 즈음에, 비가 좀 잦아들기 시작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7-04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스는 늘 강직하지요. / 돌아온 말을 시인은 다시 쫓아버리지 않습니까. 돌아와도 뭐.. 이렇네요.ㅎㅎ

수양 2014-07-04 17:22   좋아요 0 | URL
어우 아주 그냥 대쪽같이 가버리던데요
 
파문 문학과지성 시인선 302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이미용실

                                              김명인

 

늦은 귀가에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입구의 파리바게트 다음으로 조이미용실 불빛이
환하다 주인 홀로 바닥을
쓸거나 손님용 의자에 앉아 졸고 있어서
셔터로 가둬야 할 하루를 서성거리게 만드는
저 미용실은 어떤 손님이 예약했기에
짙은 분 냄새 같은 형광 불빛을 밤늦도록
매달아놓는가 늙은 사공 혼자서 꾸려나가는
저런 거룻배가 지금도 건재하다는 것이
허술한 내 美의 척도를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몇십 년 단골이더라도 저 집 고객은
용돈이 빠듯한 할머니들이거나
구구하게 소개되는 낯선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소문난 억척처럼
좁은 미용실을 꽉 채우던 예전의 수다와 같은
공기는 아직도 끊을 수 없는 연줄로 남아서
저 배는 변화무쌍한 유행을 머릿결로 타고 넘으며
갈 데까지 흘러갈 것이다 그동안
세헤라자데는 쉴 틈 없이 입술을 달싹이면서
얼마나 고단하게 인생을 노 저을 것인가
자꾸만 자라나는 머리카락으로는
나는 어떤 아름다움이 시대의 기준인지 어림할 수 없겠다
다만 거품을 넣을 때 잔뜩 부풀린 머리끝까지
하루의 피곤이 빼곡히 들어찼는지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저렇게 쏟아져 나오다가도
손바닥에 가로막히면 금방 풀이 죽어버리는
시간이라는 하품을 나는 보고 있다!

 

밤늦도록 불켜진 미용실은 짠하다. 꼭 조이미용실이 아니라도. 8년 쯤 전이겠다 나도 미놀타로 꼭 이런 미용실을 찍었었는데 뒤적뒤적 찾아보니 내가 찍은 우리 동네 미용실은 구찌미용실이로구나. 왜 밤늦도록 불켜진 미용실 상호는 조이 아니면 구찌인가. '변화무쌍한 유행을 머릿결로 타고 넘으며 갈 데까지 흘러'가 보기에는 그 상상력이 너무도 소박하여 자못 위태로운 상호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면 더 짠하다. 8년이 지난 지금 구찌미용실은 진즉에(당연히,라고 까지는 하지 않겠다) 망했고 미놀타 역시 급전을 마련하느라 팔아버린지 오래다. 하 수상하기도 하다 나도, 시간이라는 하품을 보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4-06-3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년 전에 '급전' 마련을 이유로 미놀타를 팔았다는 사연은,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들리네요.

수양 2014-06-30 18:02   좋아요 0 | URL
크 그닥... 영화 같지는 않았어요 ㅋㅋ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 심리여성학
진 시노다 볼린 지음, 조주현.조명덕 옮김 / 또하나의문화 / 200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융 이론을 따르는 정신과 의사이기도 한 저자가 여성이 보편적으로 보여주는 다양한 심리적 기질을 그리스 여신들의 캐릭터로 의인화시켜 유형별로 통찰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여성의 다층적인 내면에는 크게 일곱 가지 정도의 심리적 원형이 '공존'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중에 특히 아테나 여신의 성격이 도드라졌던 한 여성에게 과거 언젠가 몹시 압도적인 인상을 받고서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묵은 글을 재탕해보려는 교묘한 의도가 다소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번 옮겨보면

 

프로페셔널하고 지적이고 당당하고 성공에 대한 열망과 신념이 넘쳐흐르고 외국말도 청산유수로 하고 외모도 출중하고 행동거지도 우아하고 섹시한 건 기본이고 기타 등등 그래서 종내에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일과 사랑 모두를 쟁취해버리는ㅡ 소위 말해 패션잡지가 추구하는 여성상에 근접한 여자들을 만날 때마다 압도감을 느낀다. 그들의 자신감은 뭐랄까, 찻잎처럼 우러나는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에어컨 바람처럼 저돌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 같다. 나쁘다는 건 아니고 그냥 뭐 좀, 위력적으로 느껴진달까.

 

그들과 함께 있다보면 대개는 나의 못남이 더 두드러져 보이므로 종종 기운이 처진다. 예를 들면, 술자리에서 그런 여자들은 (술도 거침없이 잘 마실 뿐더러) 아름다운 용모와 노련한 언변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다가 귀가 시간이 당도하였다 싶으면 잽싸게 일어나서 우아한 목례를 던지고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또각또각 집에 가버리는 것이다. 술자리 맨 끄트머리에서 소심하게 히죽대다가 재수가 없는 날이면 까닭없이 너무 많이 마셔버려서 화장실에서 토하기까지 하는 나로서는, 실로 경이로운 처신이 아닐 수 없다. (09.5.16)


생산과 효율을 중시하는 경쟁 사회일수록 남녀를 막론하고 아테나 여신 같은 캐릭터가 인간의 내면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 쉬울 것이다. 다양한 권력의 전략을 사용하여 사회가 그렇게 개인을 훈육 양성하고 내면화시키는 까닭에. 그러나 특정 캐릭터가 내면에 독재적으로 군림하는 이러한 폭압적 상황은, 니체 식으로 말하면 하나의 충동(캐릭터)에게만 너무 많은 먹이를 주고 다른 충동은 굶어죽게 만듦으로서 자칫 인간 본연의 위대성을 스스로 갉아먹는 일일 수 있다.

 

모든 인간을 한쪽 구석이나 전문성에 가두고 싶어 하는 현대적 이념의 세계에 직면하여 철학자는 (...) 인간의 위대함을 (...) 바로 그의 광범위함과 다양성에, 그의 다면적 전체성에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악의 저편 中에서

 

인간의 내부를 무수한 충동과 욕구들이 서로 뒤엉켜 경합을 벌이는 긴장체로 인식했던 니체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욕망과 충동들을 관리하고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이라 여겼다. 니체의 견해를 수용하여 우리는 아테나 같은 캐릭터에게 내면의 통치권을 전적으로 위임하기보다는 인생의 국면이 새롭게 변화할 때마다 각각의 시기와 상황에 부합하는 적절한 내면의 캐릭터를 그때그때 발굴하여 능란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도모해봄이 어떨지.  

 

가령, 인도에서는 사람의 일생을 네 단계 즉, ①어려서 집을 떠나 스승에게 배우는 '학습기', ②결혼하여 가사에 종사하며 부귀공명을 추구하고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가주기', ③이후 숲에 들어가 명상과 고행을 수행하며 대자유를 얻기 위한 준비를 하는 '임서기', ④마지막으로 초탈의 경지에서 세상을 편력하는 '유행기'로 나눈다는데, 그렇다면 학습기에는 아프로디테와 어린 시절의 페르세포네를, 가주기에는 아르테미스와 아테나 혹은 데메테르를, 임서기 및 유행기에는 헤스티아와 말년의 페르세포네를 각각 우리 내부의 심리적 풍경의 전면에 배치하여 신체를 지휘하고 통솔할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계절이 바뀜에 따라 새로운 캐릭터가 통치의 주도권을 잡도록 자기변신 혹은 자기 재조정을 감행하는 것이다.

 

유연한 자기변신을 위해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우리 안의 다층적 면모들이 사회적 압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억압되고 소실되어버리지 않도록 다양한 캐릭터 종으로 이루어진 내면의 생태계를 조화롭게 보존하고 가꾸어나가는 일이겠다. 획일화되고 평면화되지 않으려는, 내면의 입체성을 유지하면서 늘 탄력있고 풍성하게 살아있으려는 노력! 이는 곧 자기소외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내면의 욕망과 충동들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챙기고 보살피는 일이리라.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을 하나하나 소환하여 각각의 특성을 정성스레 헤아리고 있는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안에 얼마나 풍부하고 다채로운 심리적 자원들이 존재하는지, 그러한 자원을 적시에 개발하고 활용하여 우리가 얼마나 무궁무진한 변신을 이룰 수 있는 존재인지 자각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쉽고, 깊고, 따스하다. 한편의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웠다. 방법이나 기술보다는 자세와 태도를 더 배운 것 같다. 글쓰기 교본으로 이보다 더 훌륭한 책을 당분간은 발견하지 못할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분홍색 흐느낌 문학동네 시집 88
신기섭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페이지씩 꾹꾹 읽어 나갈수록 심신이 극도로 혹사당하는 기분. 읽고 나니 온몸을 맞은 듯이 아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