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 심리여성학
진 시노다 볼린 지음, 조주현.조명덕 옮김 / 또하나의문화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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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융 이론을 따르는 정신과 의사이기도 한 저자가 여성이 보편적으로 보여주는 다양한 심리적 기질을 그리스 여신들의 캐릭터로 의인화시켜 유형별로 통찰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여성의 다층적인 내면에는 크게 일곱 가지 정도의 심리적 원형이 '공존'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중에 특히 아테나 여신의 성격이 도드라졌던 한 여성에게 과거 언젠가 몹시 압도적인 인상을 받고서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묵은 글을 재탕해보려는 교묘한 의도가 다소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번 옮겨보면

 

프로페셔널하고 지적이고 당당하고 성공에 대한 열망과 신념이 넘쳐흐르고 외국말도 청산유수로 하고 외모도 출중하고 행동거지도 우아하고 섹시한 건 기본이고 기타 등등 그래서 종내에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일과 사랑 모두를 쟁취해버리는ㅡ 소위 말해 패션잡지가 추구하는 여성상에 근접한 여자들을 만날 때마다 압도감을 느낀다. 그들의 자신감은 뭐랄까, 찻잎처럼 우러나는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에어컨 바람처럼 저돌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 같다. 나쁘다는 건 아니고 그냥 뭐 좀, 위력적으로 느껴진달까.

 

그들과 함께 있다보면 대개는 나의 못남이 더 두드러져 보이므로 종종 기운이 처진다. 예를 들면, 술자리에서 그런 여자들은 (술도 거침없이 잘 마실 뿐더러) 아름다운 용모와 노련한 언변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다가 귀가 시간이 당도하였다 싶으면 잽싸게 일어나서 우아한 목례를 던지고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또각또각 집에 가버리는 것이다. 술자리 맨 끄트머리에서 소심하게 히죽대다가 재수가 없는 날이면 까닭없이 너무 많이 마셔버려서 화장실에서 토하기까지 하는 나로서는, 실로 경이로운 처신이 아닐 수 없다. (09.5.16)


생산과 효율을 중시하는 경쟁 사회일수록 남녀를 막론하고 아테나 여신 같은 캐릭터가 인간의 내면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 쉬울 것이다. 다양한 권력의 전략을 사용하여 사회가 그렇게 개인을 훈육 양성하고 내면화시키는 까닭에. 그러나 특정 캐릭터가 내면에 독재적으로 군림하는 이러한 폭압적 상황은, 니체 식으로 말하면 하나의 충동(캐릭터)에게만 너무 많은 먹이를 주고 다른 충동은 굶어죽게 만듦으로서 자칫 인간 본연의 위대성을 스스로 갉아먹는 일일 수 있다.

 

모든 인간을 한쪽 구석이나 전문성에 가두고 싶어 하는 현대적 이념의 세계에 직면하여 철학자는 (...) 인간의 위대함을 (...) 바로 그의 광범위함과 다양성에, 그의 다면적 전체성에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악의 저편 中에서

 

인간의 내부를 무수한 충동과 욕구들이 서로 뒤엉켜 경합을 벌이는 긴장체로 인식했던 니체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욕망과 충동들을 관리하고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이라 여겼다. 니체의 견해를 수용하여 우리는 아테나 같은 캐릭터에게 내면의 통치권을 전적으로 위임하기보다는 인생의 국면이 새롭게 변화할 때마다 각각의 시기와 상황에 부합하는 적절한 내면의 캐릭터를 그때그때 발굴하여 능란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도모해봄이 어떨지.  

 

가령, 인도에서는 사람의 일생을 네 단계 즉, ①어려서 집을 떠나 스승에게 배우는 '학습기', ②결혼하여 가사에 종사하며 부귀공명을 추구하고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가주기', ③이후 숲에 들어가 명상과 고행을 수행하며 대자유를 얻기 위한 준비를 하는 '임서기', ④마지막으로 초탈의 경지에서 세상을 편력하는 '유행기'로 나눈다는데, 그렇다면 학습기에는 아프로디테와 어린 시절의 페르세포네를, 가주기에는 아르테미스와 아테나 혹은 데메테르를, 임서기 및 유행기에는 헤스티아와 말년의 페르세포네를 각각 우리 내부의 심리적 풍경의 전면에 배치하여 신체를 지휘하고 통솔할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계절이 바뀜에 따라 새로운 캐릭터가 통치의 주도권을 잡도록 자기변신 혹은 자기 재조정을 감행하는 것이다.

 

유연한 자기변신을 위해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우리 안의 다층적 면모들이 사회적 압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억압되고 소실되어버리지 않도록 다양한 캐릭터 종으로 이루어진 내면의 생태계를 조화롭게 보존하고 가꾸어나가는 일이겠다. 획일화되고 평면화되지 않으려는, 내면의 입체성을 유지하면서 늘 탄력있고 풍성하게 살아있으려는 노력! 이는 곧 자기소외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내면의 욕망과 충동들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챙기고 보살피는 일이리라.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을 하나하나 소환하여 각각의 특성을 정성스레 헤아리고 있는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안에 얼마나 풍부하고 다채로운 심리적 자원들이 존재하는지, 그러한 자원을 적시에 개발하고 활용하여 우리가 얼마나 무궁무진한 변신을 이룰 수 있는 존재인지 자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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