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란 무엇인가 -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위한 성sex의 초월과 명상 지혜의 연금술 시리즈 10
오쇼 지음, 손민규 옮김 / 젠토피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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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성을 억압하지 않아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자기완성을 위해서 성을 승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 오쇼가 꼽고 있는 것은 명상과 사랑이다. 여기서 사랑은 “내적 본성의 문제이지 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존재의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특정 대상이 우리에게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는 것. 대상은 하나의 계기일 뿐이며, 우리는 그러한 계기를 통해서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랑의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 오쇼가 말하는 사랑은 만물을 아우르는 무차별적인 사랑이고,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자비심’에 가까워보인다.

 

성의 승화 곧 성초월에 이르는 여정이 한결 쉬워질 수 있는, 성행위 시 견지할 만한 태도와 관련해서 오쇼는 우선 완전히 이완되고 차분한 호흡으로 섹스 시간을 늘리라고 말한다. 섹스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의식에 대한 경험을 더 많이 얻게 된다고. 아울러 섹스할 때 두 눈 사이의 지점에 의식을 집중하면 좋다. '주시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섹스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가되 항상 '주시자'가 되어라. (...) 중요한 점은 깨어있는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의식이 깨어있지 못하면 그대는 무의식의 힘에 사로잡히고, 소위 카르마, 업의 포로가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오쇼가 강조하는 것은 경건하고 신실한 태도이다. 사원에 들어가는 자세로, 성소에 들어서는 마음으로 섹스하라고.  

 

요가할 때처럼 자신의 숨소리에 집중하면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깨어있는 의식을 유지하며 섹스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듯하다. 한편으로 드는 한 가지 의문은, 자신의 행위를 주시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이미 강력한 에고의 활동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주시하면서, 그러니까 데카르트처럼 행위와 행위하는 나를 분리하여 사고하면서 어떻게 에고의 소멸을 기대할 수 있을까? 무지의 소치이겠으나 나로서는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다. 

 

이 책 읽고 나서 더욱 확신하게 되는 바는 역시 섹스와 탱고가 동일한 의미를 같는, 동일한 차원의 행위라는 것이다. 섹스와 탱고가 다를 것이 뭔가. 다만 탱고의 한계는 그것이 전적으로 불임의 운동이라는 것이겠지.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탱고는 불임의 운동이다. 탱고는 그 행위 자체로는 꼬라손 즉 오르가즘을 느끼고 상대와의 완벽한 합일을 통한 지복을 체험할 수 있을 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아무 것도 산출해내지 못한다. 아무것도 창조해내지 못한다. 아무 것도 생성해내지 못하는 유희. 탱고가 주는 허무감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

 

“삶을 제외한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 자체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삶의 기술을 터득하는 것은 곧 종교성의 기술을 터득하는 것과 같다. 이 삶의 진실을 체득하는 것이 궁극적 진리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이 삶에서 그것을 놓친 사람은 어디를 가도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 나는 종교를 ‘삶의 기술’이라고 부른다. 진정한 종교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사다리와 같다. 세상을 등지는 게 아니라 두 눈을 크게 뜨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도피가 아니라 가슴을 활짝 열고 세상을 껴안는 것이다. 삶과의 전면적인 만남, 이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섹스에 대한 이끌림은 실제로는 섹스에 대한 것이 아니다. (...) 이런 이끌림은 섹스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한 것이다. 여기엔 종교적인 의미가 숨어있다. 일상적인 삶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오직 섹스를 통해서만 그런 체험을 맛본다. 쇼핑을 즐기고, 사업을 하고, 돈과 명예를 얻고,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하지만 모든 게 표피적이다. 오직 섹스만이 우리를 존재 깊은 곳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성행위 중에는 내면 깊은 곳에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로, 오르가즘을 느끼는 순간에 에고가 사라지고 무아의 차원이 열린다. 잠시동안 ‘나’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에고가 사라지고, 그대는 자신이 존재하는지 부재하는지 잊어버린다. 잠깐 동안 존재감이 사라진다. 두 번째로, 잠시 동안 시간이 사라진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차원이 열린다.

 

무아와 무시간성, 종교적 체험의 영역에서는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이 섹스에 열광하는 것 또한 이 두 가지 요소 때문이다. 성적인 갈망은 이성의 육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뭔가 다른 것에 대한 갈망이 숨어있다. 즉 에고와 시간이 사라진 상태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에고와 시간이 사라진 상태를 갈망하는 것일까. 에고가 사라지는 즉시 영혼을 일별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시간이 사라지는 즉시 신적인 차원이 열린다. 이것이 종교적인 체험이다. 섹스를 향한 갈망 뒤에는 이렇게 영적 체험에 대한 염원이 숨어있다.”

 

“인류는 성행위를 통해 최초로 삼매와 무심의 상태, 초의식의 경지를 맛보았다. (...) 인간이 깨어있는 의식에 도달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섹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명상이다. 섹스는 자연이 준 방법이다. 섹스는 자연적 방법이다. 동물도, 새들도, 식물도 섹스를 한다. 그리고 인간도 섹스를 한다. 우리는 장구한 세월 동안 자연적 방법만을 써왔고 동물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인간의 영역은 섹스보다 높은 차원의 새로운 문이 열릴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섹스가 석탄이라면 브라흐마차리야, 즉 성초월은 다이아몬드다. 다이아몬드와 석탄은 적대관계가 아니다. 다이아몬드는 석탄이 새로운 차원으로 변형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브라흐마차리야는 섹스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브라흐마차리야는 섹스가 변형되어 완성되는 것이다. (...) 브라흐마차리야는 그대의 모든 행위가 신적인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의 삶이 신성한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이 브라흐마차리야이다. 브라흐마차리야는 곧 신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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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 관동대지진에서 태평양전쟁 발발까지의 예술 운동과 공동체 카이로스총서 35
구라카즈 시게루 지음, 한태준 옮김 / 갈무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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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생명권력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20세기 초 일본 사회에서 문화예술 방면의 개인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미학적 인식, 예술관 등을 살펴보고 있다. 전통적인 유대가 해체되고 자본주의 생활 양식이 본격화되던 20세기 초 일본 사회와, 개인이 갈수록 '벌거벗은 생명'으로 시장에 내몰려지고 있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혹독한 삶의 풍경은 일견 거울상이라 할 만한 지점이 있고, 1920~30년 당시 일본의 문화예술인들이 보여주었던 새로운 인식과 지향을 탐구하는 것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이 시대에 '생명에의 감각'을 다시금 회복하기 위한 시의성 있는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취지가 아쉽게도 이 책은 다소 난삽한 인상을 준다. 본론에서 다루고 있는 광범위한 주제들이 어떻게 '미적 아나키즘',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으로 엮일 수 있는지 충분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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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켜낸다는 것 - 칭화대 10년 연속 최고의 명강, 수신의 길
팡차오후이 지음, 박찬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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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철학적 전통을 지닌 나라는 경제성장기에 이런 책이 나오는구나. 이 또한 중국의 저력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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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 (1888~1889) 책세상 니체전집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백승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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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음악을 안 들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오늘날로 치면 바그너는 무슨 블록버스터 영화 감독 내지는 라스베이거스 쇼 연출가 같은 그런 존재였나 보다. 쇼의 대단원을 항상 위대한 구원의 레파토리로 결말 짓는. <바그너의 경우>에서 니체는 일부러 광대 같은 문체를 구사하면서 바그너의 데카당한 면에 대해 엄청나게 열폭하고 있는데 열폭이 지나쳐서 심지어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그는 바그너를 극복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그너를 물어뜯는 그는 너무나 '약자' 같다.

보나마나 바그너는 <니체의 경우>같은 건 쓰지도 않았을 텐데 아무리 니체가 강자네 초인이네 어쩌구 저쩌구 해도 자신의 사상의 일관성을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이런 표리부동한 글을 읽고 있으면 차라리 측은한 마음마저 생긴다. 자기 분열과 자기 모순. 이상적 자아와 현실 자아 간의 엄청난 괴리. 니체는, 현대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상과는 별개로 내게는, 사이코패스를 이상적 자아로 상정했으나 현실적으로는 너무나 '그리스도교'적이고 '약자'이며 '병자'인 인간의 균열적 존재론을 정초한 자로 와닿는다. 나랑 퍽 닮은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니체가 재미있게 읽히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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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발 2015-02-27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 전집을 백날 읽어도 입문서 한 권 제대로 읽은 사람보다 못하고 자의적인 오독으로 괴물만 커진다면 니체를 읽어서 무엇하리오~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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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된다. 이 원한은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대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원한이다. 고귀한 모든 도덕이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인 것이다. 가치를 설정하는 시선을 이렇게 전도시키는 것, 이렇게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되돌리는 대신 반드시 밖을 향하게 하는 것은 실로 원한에 속한다.

 

노예 도덕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대립하는 어떤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 생리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일반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이 필요하다. 노예 도덕의 활동은 근본적으로 반작용이다. 고귀한 가치 평가 방식에서 사정은 정반대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더 감사하고 더 환호하는 긍정을 말하기 위해 자신의 대립물을 찾을 뿐이다. (...) 원한을 지닌 인간은 정직하지도 순박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지도 솔직하지도 않다. 그의 영혼은 곁눈질을 한다. (...) 그는 '나쁜 적'을, '악한 사람'을 생각해내고, 사실 그것을 근본 개념으로 거기에서 그것의 잔상 또는 대립물로서 다시 한 번 '선한 인간'을 생각해 낸다. 그것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이란 무엇일까? 내가 홀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 나를 질식시키고 초췌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쁜 공기다! 나쁜 공기란 말이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내 근처로 다가오며, 내가 잘못된 영혼의 내장에서 나는 냄새를 맡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 밖의 것이라면 어떤 고난, 궁핍, 나쁜 날씨, 중병, 신고(辛苦), 고독이든 견뎌내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람은 지하의 투쟁적인 생존을 영위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일도 잘 해결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되풀이해서 세상에 나타나고 되풀이해서 승리의 황금 시간을 체험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때 위급한 모든 경우에 언제나 더 팽팽하게 당겨지는 활처럼, 부러지지 않고 팽팽하게 당겨져 새로운 것, 좀 더 어려운 것, 멀리 있는 것을 향하도록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선악의 저편에 숭고한 수호의 여신들이 있다면, 내가 한 번 볼 수 있게 해달라! 아직도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 만한 완전한 것,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것, 행복한 것, 강력한 것, 의기양양한 것을 내가 한번 볼 수 있게 해달라! 인간을 변호하는 인간, 인간을 보완하고 구원하는 행복의 경우를, 그리고 그 때문에 인간에 대한 믿음을 견지할 수 있는 경우를 한번 볼 수 있게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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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8 15: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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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8 16: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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