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티즘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24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쟁은 정치적 기도이며, 제사는 주술적 행위이고, 주연(酒宴)은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염원이다. 그러나 바타유에 따르면 단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그러한 정의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노동의 질서와 금기로 촘촘하게 이루어진 세속의 세계에서 전쟁과 제사와 주연은 인간의 억눌린 잔인성과 폭력성, 탕진과 파멸에의 충동이 정당하고도 장엄하게 분출되는 실질적 효용을 갖는다. 그리고 바로 그런 경건한 절차야말로 폭력이 인간 사회의 질서에 성공적으로 통합되는 방식이다.

 

에로티즘 역시 금기와 위반이라는 테제 속에서 설명된다. 그 또한 정교하게 기획되는 위반의 게임인 것. 에로티즘은 자연으로 회귀하여 원초적인 동물성을 무한 발산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에로티즘의 미학을 구현하기 어렵다. 위반이란 금기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금기를 한 번 걷어 올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에로티즘은 존재론적 불균형과 불안과 긴장을 수반하는, 자극적인 즐거움과 고뇌가 공존하는 상태인 것이다.

 

금기의 위반을 통해 일시적으로 강렬하게 분출되는 왕성한 낭비(=폭력, 살해, 파괴, 생식을 초과하는 유희로서의 성욕 등등)에서 전복적 진리를 발견하는 바타이유의 사유는 흥미롭다. 춤판의 속성을 떠올려볼 때 바타유가 논하는 에로티즘은 일견 수긍할 만한 점이 있는 통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시, 금기의 위반을 통해 얻는 쾌락은 찌질한 쾌락이 아닌가 하는 의문. 그야말로 노예적인 쾌락이 아닌가. 압박으로부터의 폭발, 아름다움을 더럽히는 데서 오는 파괴적 기쁨, 공포와 고통 속에서 극대화되는 도취와 희열...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억압적 에로티즘이다. 신경증적 에로티즘이다. 죽음 충동으로 가득한, 강력한 부정의 철학이다. 그가 말하는 에로티즘이 못내 협소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에고의 회로에 갇힌 신경강박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아무래도 먼저 읽은 오쇼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오쇼가 말하는 쾌락은 웅대하고 높은 차원의 쾌락이다. 노예의 쾌락이 아니야. <섹스란 무엇인가>에서 오쇼는 섹스가 단순히 생물학적 결합에서 오는 감각적인 쾌락에서 더 나아가 얼마든지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쾌락으로, 우주와 신성을 만끽하는 쾌락으로 심오하게 확장될 수 있음을 얘기한다. 이것이 바타유가 말하는 '신성의 에로티즘'이라 할지라도 오쇼가 말하는 성적 쾌락은 금기의 위반에서 얻는 쾌락과는 급이 다르다. 오쇼의 쾌락은 어떤 부정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 긍정으로 가득한, 광대한 스케일의 쾌락이다. 바타유의 에로티즘이 고뇌와 고독의 에로티즘이라면 오쇼의 에로티즘은 평화와 자유와 해방의 에로티즘이다.

 

제목과 달리 썩 에로틱한 책은 아니었다. 행간 곳곳에 스며 논지의 전제를 이루는 봉건적 여성관도 그렇고 여기저기 궤변 같아 보이는 대목들 하며. 다만 아래 옮겨 적은 대목은 곱씹어볼 만 하다. 바타유의 이론은 에로틱하지 않지만 그의 철학적 자세는 에로틱해 보인다.

 

"[헤겔 류의] 전문 작업으로서의 철학은 말하자면 하나의 노동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철학은 내가 처음에 언급한 강렬한 감동적 순간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배제한다. 따라서 그것은 가장 일차적이고도 중요한 종합 작업으로서의 가능성의 총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가능성의 총체도, 가능한 경험의 총체도 아니며, 단지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한정된 경험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 지식의 총체일 뿐이다. 전문작업으로서의 철학은 의식적으로 나아가 감정적으로 이질적인 물체를 거부하며, 아무리 강렬한 감동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더러운 것 또는 적어도 오류의 근원, 탄생, 생명의 창조 등과 결부된 것은 마치 죽음을 거부하듯이 거부한다.

 

사실 극단적 인간성, 즉 인간의 성행위와 죽음의 폭발을 외면한 채 오로지 평범한 인간성만을 설명할 뿐인 철학의 기만적인 결과에 놀라는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철학의 이러한 싸늘한 측면에 대한 반발은 키에르케고르는 말할 것도 없고, 니체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근대 철학자들의 특징을 이룬다. 당연한 일이지만 철학은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철학은 (...) 방랑이나 탈선적 사고를 용납하지 못했다. 사실 철학은 다른 데가 아닌 거기에서 심오한 정당성을 획득하지 않던가. 그러나 철학이 규율과 조화로운 노력만을 끌어들인다면, 다시 말해 철학이 어떤 극단성에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철학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종합 작업과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철학을 진정한 철학이라고 한다면, 위의 철학은 심오한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철학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 철학은 삶의 극단과 관련된, 내가 어디에선가 ‘가능성의 극단’이라고 표현한 것, 즉 철학적 대상의 극단을 끌어안지 못한 이유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 물론 철학은 죽음에 파묻힐 때, 즉 죽음의 끝인 혼미에 자신을 내던질 때만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철학은 철학을 부정할 때에 한해서, 철학에 조소를 보낼 수 있을 때에 한해서 가능하다. 정말 철학이 철학을 비웃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한 가정은 철학적 계율을 인정하는 동시에 파기를 전제하는데 그러면 이제 철학은 모든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종합 작업이 될 수 있다. 그 총체는 종합이지 단순한 더하기가 아닌 것이 왜냐하면 그곳은 인간의 노력이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이 무기력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곳이기 때문이다. (...) 나는 이처럼 밖으로 흘러넘치는 극단적 체험을 묘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p.302~303

 

바타이유는 자신이 에로티즘이라고 하는 철학적 가능성의 극단을 탐사하고는 있지만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애당초 노동과 금기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철학의 언어로 에로티즘을 규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넌센스이고 한계를 갖는다는 입장을 보이면서도, "위반 자체가 위반의 담론을 대체하는 결정적인 순간" 직전까지는 접근의 길들을 묘사하는 언어가 의미를 갖는다고 하면서 철학적 불가능에 뛰어든 자신을 변호한다. 금기의 최전선까지 나아가 끊임없이 위반을 시도하고 생명을 빼앗기기 바로 직전까지 위험에 탐닉함으로써 극도의 쾌락을 얻는 것이 에로티즘적 윤리라면- 철학답지 않은 철학, 정통적 흐름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철학, 경계의 철학, 변방의 철학, 외곽에 걸쳐있는 철학, 철학의 외연을 넓히는 철학, 사이비성을 의심케 하는 비주류 철학 따위에의 천착이야말로 철학 탐구에 있어서는 진정으로 에로틱한 길인지도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갱지 2016-07-29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해하는 철학도 이쪽 끝으로 갔다 저쪽 끝으로 갔다 중화시켰다 반발했다 하더라고요, 글 재밌게 읽고 갑니다-.

수양 2016-07-31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여러 부류가 있을텐데 성향 때문인지 저는 중화보단 반발 세력에 더 호감이 가네요 ㅋ
 
제2의 성 - 하 - 세계의문학 18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조홍식 옮김 / 을유문화사 / 1993년 11월
평점 :
절판


1 형성

유년기: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성다움의 대표적 특질인 수동성은 생물학적 여건이 아니라 사회에 의하여 강요되는 숙명이다.

 

젊은 처녀: 여성에게 있어서 청년기는 어려운 시기이다. 인간이라는 조건과 여성이라는 천직 사이에 이반(離反)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성(無性)의 어린이로서 독립하던 시절과 여성으로서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녀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분열될 뿐만 아니라, 주체이자 능동이자 자유이기를 바라는 그녀의 선천적 욕구와, 한편에서는 그녀에게 수동적 객체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적 요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타자로서밖에는 자기를 완성할 수가 없는 상황과 자아를 포기한다는 것에 대한 딜레마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그녀는 자기가 여성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하나의 객체로 만들어 자기 자신을 객체로서 자각한다. 그렇게 자아를 이중화시킨다.

 

성의 입문: 성교는 생물학적 구조상 남성(정확히는 페니스)의 의지가 없으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반면에 여성은 의식 없는 상태에서조차도 성교가 가능하며 또한 전혀 쾌감을 느끼지 못해도 임신이 된다. 남녀 간의 이러한 생리적 특징은 곧바로 성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과 도덕적 기준에 반영되고 여성의 성을 비하하고 억압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비록 성교 시 여성의 역할이 그 생물학적 조건상 수동적이라 하더라도, 남성의 정상적인 공격성이 사디즘적이 아니듯이 여성의 수동성은 마조히즘적도 아니다. 여성 역시 자기의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애무 흥분 돌입을 자기 자신의 쾌락으로 끌어갈 수 있다. 사랑의 행복한 형태는, 연애 애정 관능 속에서 여성이 자기의 수동성을 잘 극복하여 상대방 남성과 대등한 관계를 이루는 방식이어야 한다.

 

동성애의 여성: 여성 간 동성애는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으로부터의 억압을 벗어나기 위한 여성이 주체적인 태도를 취하려는 노력의 한 양상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동성애는 숙명적인 저주도 아니고 의식적인 배덕도 아니다. 이것은 상황에 있어서 선택되는 하나의 태도, 즉 동기를 갖는 동시에 자유롭게 채택된 하나의 태도이다. 모든 인간의 행위처럼 동성애도 그것이 허위와 나태와 비진실 속에 사느냐, 아니면 명철과 관용과 자유 속에 사느냐에 따라 희극과 불균형과 실패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풍부한 체험의 원천이 되는 경우도 있다.

 

2 상황
기혼 부인: 전통적으로 결혼은 여자의 유일한 호구지책이며, 자신의 생활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젊은 남자는 주체적인 선택에 따라 결혼할뿐더러 그들이 결혼에서 얻는 것은 생활의 신장과 확보일 뿐 결코 생존을 위한 권리 획득은 아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하나의 생활양식이지 운명이 아니다. 그러나 여자는 결혼함으로써 비로소 사회적으로 등록된다. 젊은 처녀에게 결혼은 집단 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여성이 자신만의 직업을 갖지 않고, 즉 자신의 노동을 매개로 하여 사회와 교류하지 않고, 가정의 울타리 안에 갇혀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된 채 살아가는 현실은 문제적이다. 남자는 직업이라는 사회활동을 통해서 자기 확대를 경험하고 미래를 향해 비약할 줄 안다. 반면에 아내는 미래나 세계에 직접 도전할 어떤 계기도 주어져 있지 않다. 그녀가 자기를 벗어나 공동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다만 남편의 중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여자가 진정한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으려면 자주적인 일을 가져야 한다.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

 

부부 사이에 성실과 우정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두 사람이 서로 자유롭고 구체적으로 평등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기생하는 여자는 필연적으로 남편의 가신이 될 수밖에 없다. 부부 간의 이러한 주종구도는 불쾌한 성생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즉 남편은 의무를 수행한다는 생각에서 냉담해지고 아내는 자기 자신에게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에게 몸을 맡긴다는 생각에서 수치를 느끼게 된다.

 

한편, 직업을 갖지 않은 기혼여성은 세계를 단념하는 대신 가정이라는 감옥을 소왕국으로 꾸민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정은 지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몫이며, 사회적인 가치와 그녀의 가장 내면적인 진실의 표시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속에서 열심히 자기를 탐구한다. 그렇게 주거를 관리함으로써 사회적인 정당화를 얻어낸다. 그러나 가사일이란,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 투쟁 속에서 끝없이 거듭되는 피로밖에는 얻지 못하는 것이다. 가정주부의 일 만큼 시지프스의 형벌과 비슷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여성이 가정 안에서 하는 일은 그녀에게 조금도 자주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그런 노동은 사회에는 직접적으로 유용하지 않다. 그것은 미래를 지향하고 있지 않으며 아무것도 새롭게 창조하지 못한다. 그저 현재를 쾌적하게 유지하는 것일 뿐이다. 노동이 그 의미를 갖고 품위를 갖는 것은, 그것이 생산이나 행동으로 사회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생활방식과 일치될 경우이다. 그런데 가사는 주부를 해방시키기는커녕 남편이나 자식에게 종속시킨다. 그리하여 주부는 남편이나 자식을 통해 자기를 정당화시킨다. 결국 가정에 갇힌 여자는 결코 스스로 실존을 형성해 나갈 수 없다.


어머니: 낙태옹호론. 모성신화의 허구성. 어떤 모성애는 아이를 향해 자학적인 헌신을 베풀며 삶의 모든 공허와 결핍의 충족을 아이로부터 구하려고 하는 기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 어머니가 완전한 한 인격체이고, 일과 집단의 관련 속에서 자기 완성을 이루는 여자이며, 아이를 통하여 억지로 그러한 것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여자여야 한다. 직업 여성은 자기 자신에게 매혹되어있지 않은 덕분에 오히려 더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가장 풍부한 개인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여자야말로 아기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다. 노력과 투쟁 속에서 참된 인간적인 가치를 획득하는 여자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육자가 될 수 있다.     

  
사교생활: 가사노동을 통해서 가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 듯이 여자는 좋은 옷을 입는 것으로 자기의 인격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사실 여자는 하나의 물체이므로 어떻게 치장하느냐에 따라서 그 본질적인 가치가 달라진다. 여자에게 있어서 화장을 하고 맵시를 가꾸는 일은 무기 관리, 간판 관리, 호신술 단련, 추천장 받기 같은 것과 같다. 여자의 화장은 재산이고 자본이며 투자다. 선망과 감탄의 시선을 얼마나 모을 수 있는가에 의해, 여자는 자기의 아름다움, 우아함, 취미, 요컨대 그녀 자신의 절대적인 확인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멋쟁이 여자의 노력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무익한 것이므로 그녀는 늘 자기의 가치가 결정적으로 인식되기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행색과 외모에 대한 남의 말 한 마디에 전전긍긍하게 된다. 괴로운 종속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사교생활은 몸단장과 자기과시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여자들 사이의 진정한 유대가 맺어지기는 어렵다. 사교는 여자를 고독에서 구하지 못한다. 여자들이 사교생활을 통해서 맺는 우정은 남자들의 대인관계와는 다른 양상을 갖는다. 남자들이 사상을 통하여 자기들 사이에 각자의 기획을 개인으로서 전달한다면, 여자들은 폐쇄된 생활이라고 하는 여자의 공통된 운명 속에서 일종의 ‘피차일반’이라는 심정에 의해 유대관계를 맺게 된다. 그녀들은 의견을 제시하거나 의논하지 않는다. 여자가 주고받는 것은, 마음속의 비밀이나 살림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들은 일종의 반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동맹을 한다. 이러한 연대가 진정한 우정으로 지향되기 어려운 까닭은 여자끼리의 관계가 개성에 의거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여자라는 일반성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와 여자는 감옥의 친구이다. 서로 힘을 합쳐서 이 감옥 생활을 조금이라도 견디기 쉽게 하고 탈출할 준비도 함께 한다. 그러나 해방자는 남성의 세계에서 올 것이다. 그러니 그녀들은 저마다 남성의 세계에 눈길을 돌리고, 그 세계의 가치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 여자의 관계에는 곧 적의라는 요소가 개입된다.

 

사교생활은 결혼생활에서 기분전환에 불과하다. 그런 것은 속박을 견디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요컨대 그것은 모두가 거짓 도피법에 불과하며 그것이 여자에게 인생을 올바로 개척할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매춘부와 첩: 성행위는 아내나 창녀 모두에게 하나의 임무이다. 전자는 유일한 남자와 종신 계약을 맺고, 후자는 각각 지불해 주는 몇 사람의 손님을 갖게 된다. 전자는 한 남성에 의해 다른 모든 남자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고, 후자는 모든 남자들에 의해 각각 배타적으로 속박되어 있다. 아내와 창녀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는 좀 더 억압을 받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 존중된다는 것이다. 반면 후자는 인격으로서의 권리를 갖지 못한다. 여성 노예제도의 모든 양상이 창녀 안에 요약되어 있다. 창녀가 양산되는 사회구조에 대한 서술.

 

최근에는 첩의 형태가 영화 스타로 나타난다. 이 두 부류의 여자들은 자기의 육체뿐만 아니라 자기의 전인격을 밑천으로 생각하고 이용한다. 이런 여자들의 태도는 자기를 초월하여 숙명을 뛰어넘고 타인의 자유에 호소하며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기생은 세계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는 인간의 초월에 아무 길도 개척하지 못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여자는 일종의 독립을 획득할 수도 있다. 그녀는 여러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지만, 결정적으로는 어느 남자의 소유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물건 팔 듯 팔아서 경제적인 자립을 확보한다. 자기 자신을 물건처럼 남자에게 맡기는 성(性)에서 출발하여 자기를 주체로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자처럼 자립할 뿐 아니라 거의 남성을 상대하여 살아간다. 그녀는 가정주부보다는 현명해지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위선 속에 싸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숙기에서 노년기로: 노년기의 여자는 손자를 키우기도 하고 직업상의 후계자를 양성하기도 하지만 그런 활동 속에서 자기의 기울어져가는 생명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다. 바느질 역시 마찬가지다. 늙은 여성의 바느질이란 무서운 권태를 얼버무리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다. 양손은 자수를 놓거나 뜨개질을 하면서 움직이고 있으나 참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자체의 무상성 속에서 순수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놀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무의미하고 불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반복적인 기계노동으로 현재를 소진시키는 활동일 뿐이다. 정신이 비어있으므로 기껏해야 알리바이(부재증명)가 되는 정도다. 초라한 심심풀이. 여성은 바늘로 그날그날의 허무를 따분하게 짜고 있다.

 

한 마디로 노년의 여성은 할 일이 없다. 할 일이 없는 여성은 이 세계에 발판을 만들기 위해 뭘 짜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권태를 달래기 위해 아무거나 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미래를 개척하지 못하는 행동성은 반드시 내재의 허무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나마 뭘 해본다고 여성들이 자선사업이네 협회네 무슨 조직을 꾸리는 것 역시 회의적이다. 이런 조직 역시 그저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의 기생적인 생활이 낳은 여가 활동일 뿐이다. 그녀들의 노력은 일관된 건설적인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소설책을 많이 사들이는 것도 이런 여성들이 주로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독서는 혼자서 트럼프 놀이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 기획에 투신하고 있는 사람이 더욱 넓은 미래를 향해 행동하는 것을 도울 때 문학은 비로소 의미와 품위를 갖는다. 그러나 여자는 책이나 예술작품을 그대로 삼켜서 내재 속에 묻어버린다. 그림은 장식품이 되고 음악은 상투어가 되고 소설은 벽에 걸어둔 모자처럼 공허한 몽상이 된다. 그녀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 어떤 건설적인 기획을 세울 만한 능력이 부재하다는 것이고, 새로운 상황을 적극적으로 창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이 기생적인 존재인 한, 그녀는 보다 나은 세계의 건설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반면, 남자에게는 생계를 잇는 일이 큰 사명이다. 그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책임과 목적과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세계 속에 던져져 결심하고 착수한다. 그러나 여자는 결혼과 함께 세계로부터 너무 빨리 은퇴해버린다. 그녀에게는 활동력, 신념, 희망, 분노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주위에서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는 언제나 자기의 숙명이었던 생활의 되풀이 속에 도피한다. 그녀는 반복을 하나의 체계로 삼고 가사 일이 요구하는 극기주의 속에 자랑스럽게 갇혀버리거나 혹은 점점 신앙에 몰입한다. 그리하여 진부해지고 냉담해지고 에고이스트가 된다.

 

여자의 상황과 성격: 여성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자기들만의 자주적이고 폐쇄적인 사회를 형성한 적이 없다. 통일된 공동체를 형성할 만한 유기적인 연대성을 만들어내지 못한 여자들은 언제나 남자가 지배하는 집단 속에 편입되어 종속적인 지위만을 얻는다. 여성은 남성의 세계 속에 편입된 동시에, 이 세계에 불신을 표시하고 있는 영역의 양쪽에 걸터앉아 있다. 전자에 의해 분명한 신분이 주어짐과 동시에 후자 속에서 갇혀 지낸다.

 

남자는 자기를 초월하여 세계를 파악하고 있으므로 역사를 하나의 생성으로 생각한다. 가장 보수적인 남자도 어떤 종류의 진화는 불가피하며 자기 행위나 사상을 거기에 적응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면에 여자는 역사에 참가하지 않으므로 그 필연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동적인 체념과 무기력의 정서에 젖어있다. 그녀는 한 번도 자유의 능력을 체험해본 적이 없으므로 해방을 믿지 않는다. 세계는 알 수 없는 숙명에 지배되어 있으며 그것에 반항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해도 그런 위태로운 길을 스스로 개척해본 적이 없으므로 열의를 갖고 달려들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에게 미래를 개척하는 체험이 한 번이라도 주어진다면 그녀는 더 이상 내재성에 매몰되어 지내지 않을 것이다.

 

여성에게는 기생적인 역할이 주어질 뿐이다. 여성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향락을 즐기기 위해 생식하기 위해 남성을 필요로 한다. 성적 서비스에 의해 남성의 혜택을 확보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녀는 완전히 착취의 도구가 된다. 남자는 여자가 타자이기를 원한다. 남성은 여성을 객체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를 객체로 만든다. 그러나 모든 실존자는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려고 해도 여전히 주체일 수밖에 없다. 그녀가 자진하여 객체가 되려고 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녀는 자유로운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여기에 그녀의 근원적인 배신이 있다. 가장 수동적인 여성일지라도 역시 의식적이다. 의식적으로 연극을 한다. 수동적인 역할을 연기한다.

 

여자가 갇혀있는 영역은 남성의 세계에 의해 권한이 주어져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남자 역시 조종을 받고 있는 어떤 정체불명의 힘이 지배하고 있다. 그런 힘에 협력하면 여성도 권력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남성에 대한 여성의 태도는 애매하고 상반되어 있다. 상반된 태도 속에서도 여자는 대개 조화를 추구한다. 조화와 평온을 추구하고 자연 속에서 초월을 발견한다. 여성은 데카르트의 철학이나 여기에 친근성을 갖고 있는 모든 사고방식을 기피한다. 그녀는 스토아 철학자나 16세기 신플라톤학파의 철학과 유사한 자연주의 철학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러한 여성에게 사회가 제공하는 최고의 보상은 종교이다. 종교는 압박을 받고 있는 자의 마음에서 모든 반항심을 질식시켜버린다. 여성은 종교를 통해서 체념을 정당화하고 희생자로서의 자기성화작업을 이루어내며 종교활동을 하면서 공허한 시간을 메운다.

 

3 정당화
나르시시즘의 여자: 거울에 비친 반영이 자아와 동일화되는 것은 특히 여성의 경우이다. 자기를 능동성, 주체성의 소유자라고 느끼고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남성은 자기 영상 따위 따위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여성은 자기가 객체임을 알고, 또 자진하여 그렇게 되므로 거울 속에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자기 숭배와 자기 예찬에 몰두해있는 나르시스트는 완전히 실패하게 마련이다. 자기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으면 의존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답답한 노예상태에 빠지게 된다. 타인의 찬동은 신비롭고 변덕스러운 권위이다. 나르시시즘의 여성의 허영심은 절대로 충족되지 않으며 애를 쓰면 쓸수록 세계와 타인의 의식 속에서 위험에 노출된 한 객체로 자기를 만들 뿐이다.

 

연애하는 여자: 연애란 남성의 인생에는 하나의 일시적 관계에 지나지 않지만 여성에게는 인생 그 자체이다. 여성이 연애에서 생각하는 단지 헌신에 그치지 않고 육체와 정신 모두를 무제한으로 완전히 제공하는 것이다. 전적인 자기포기. 반면 격정에 사로잡힌 경우에도 남성은 결코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숨을 쉬는 한 언제나 독립적인 주체로 남아있으며 사랑하는 여성은 많은 가치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런 여성을 자기들의 실존에 일체화시키려고 하며, 결코 그녀 속에 자기의 실존을 몰입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주체이며 자기 자신인 인간이라면 초월에의 고귀한 소원을 지닐 때에는 세계에 대한 행동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야심에 가득차서 행동한다. 그런데 비본질적인 존재는 자기의 주체성 속에서 절대를 발견하지 못한다. 내재를 운명으로 여기는 존재는 행위에 의해 자기를 실현하지 못한다. 의존의 영역 안에 처박혀서, 어렸을 때부터 남성의 예속물로 자랐기 때문에, 남성에게서 지배자를 발견하는데 익숙하다. 그리고 그 지배자 앞에 자기를 소멸시키려고 한다. 연애는 그녀에게 하나의 종교가 되는 것이다.

 

자기소멸의 꿈은 실제로는 존재하려는 강한 의지이다. 우상에게 자기를 완전히 맡겨버림으로써 여성은 자기의 소유와 우상 속에 요약되어있는 세계의 소유가 동시에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상숭배적 연애의 아이러니는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함으로써 세계의 전체를 얻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려는 전략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것이 완전히 자기를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 남성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때, 그를 독점하는데 실패할 때, 그녀의 나르시시즘은 혐오나 굴욕, 자기에 대한 증오로 급변하여 그녀로 하여금 자기 형벌로 이끌어간다.

 

만약 그녀가 애인을 독점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녀는 맹목적인 정열을 발휘하여 상대방을 노예로 만듦으로써 그를 사슬로 묶는다. 이것은 곧 남성 위에 전제적으로 군림하기 위한 편집증적인 헌신이다. 그녀는 남성을 자기의 수인(囚人)으로 만든다. 그리고 자기의 초월을 남성에게 위탁하여 그것을 구제하고자 한다. 초조함과 기다림, 의존의 괴로움, 질투 따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이미 자기의 존재 전체를 남자에게 투척해버린 여성에게 이제 애인을 지키는 것은 하나의 성직이 된다. 그녀는 자기의 운명을 손아귀에 쥔 인간 앞에서 벌벌 떨면서 굴욕 속에서 일생을 보낸다.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대자존재로서 존재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며, 목적을 향해 자기를 투기하고, 대리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집단을 향해 자기를 초월하며, (연약한 처지에서가 아닌) 강건한 입장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를 확립하기 위해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오면, 그때 연애는 비로소 생명의 샘이 될 것이다.

 

신비주의 여성: 신비주의에 빠진 여성은 자기의 육신을 파괴하여 자기를 없애는 데 몰두한다. 그녀들은 포기의 완벽성과 수동성의 열성적인 수락에 의해 빛나는 지고의 현존을 새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구제의 노력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세계에 대해 발붙일 기반을 갖지 못한다. 자기의 주관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의 자유는 신비화된 채로 나아있다. 자유를 올바로 실현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능동적인 행동에 의해 그것을 인간사회 속에 투입하는 것이다.

 

4 해방
독립한 여성: 여성이 현대에 이르러 사회적인 노동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기생충 인생에서 벗어나 초월을 다시 회복하고 자기 기획 속에서 주체로서 구체적으로 자기를 확립하게 되긴 하였지만 현대 여성의 딜레마는 일하는 주체가 지닌 자주적인 능동성이 전통적인 여성다움과 충돌한다는 점이다. 남성의 경우에는 남근과 초월이 일체화되어있고, 그는 인간이라는 천직과 남성이라는 운명이 완전하게 조화되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의 상황은 남성에 비해 매우 분열되어 있다.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확보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사회가 바라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구현하려는 상반된 의지로 인하여 인텔리 여성들은 종종 부자연스럽고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과 같은 독립을 획득한 여성은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남성들과 동등한 지위에서 성적 교섭을 갖는 큰 특권을 누린다.

 

현대 여성들이 보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창조자의 포부를 마음속에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자기를 하나의 자유로운 존재로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너무 치열하다고 해서 패배주의에 젖을 필요는 없다.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가장 심한 고독 속에서 고개를 쳐들어야 한다.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고독과 초월의 훈련이다. 스포츠나 모험만이 세계와의 대결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의 고독 또한 세계 앞에 맞서는 훌륭한 기폭제가 된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현실세계와 고독하게 대결해 나가는 것. 이것이 곧 하늘로의 비약이고 초월이다.

 

결론: 남성에게 있어서 여성은 하나의 위로이고 쾌락이고 반려이며 비본질적인 재물일 뿐이다. 반면에 여성에게 있어서 남성은 실존의 의미이며 이유이다. 자립하지 못한 여자는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빨아먹는 기생충의 운명을 갖는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의 무게로 남성을 괴롭힌다. 여자가 이렇게 된 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기회를 안 주고 그녀에게 아무런 책임도 지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포기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는 여성에게 자립적인 생명 조직을 제공해야 한다. 그녀가 세계와 싸우고 거기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취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의존성은 없어진다. 여성이라는 것은 문명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호르몬이나 신비적인 본능에 의해 그 기질이 항구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다. 여성에게 책임을 지우면 여성은 그 책임감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남녀가 사회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되면 섹스 역시 승리나 패배의 개념이 아니라 교환, 교류, 관계 맺기, 상호 능동성을 기반으로 한 상호증여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동등한 자로 인정하고 우애를 느끼면서 성생활을 할 수 있다. 우애가 흐르는 성생활이라고 해서 황홀과 정열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실존의 긴장, 격동, 희열, 실패, 승리 등은 역시 성본능 속에 구체화될 것이다. 요컨대 여성이 대자적으로 살아가더라도 역시 남성과 대립하여 살게 될 것이다. 서로 주체로 인정하면서 상대방에게는 어디까지나 타자이다. 남녀관계의 상호성은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는 데서 생기는 기적, 즉 욕구, 소유, 사랑, 꿈, 모험 등을 없애지 않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양 2023-06-01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숨막히는 책이다. 워낙에 뭘 주절주절 방대하게 써 놔가지고 정말 안 읽어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보부아르가 묘파한 전통사회 여성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이 내 은밀한 민낯의 정밀해부도 같아서. ‘여성으로서의 나’, ‘에로스와 성과 생식에 관한 방면에서의 나’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만든다.

수양 2016-07-02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 보부아르는 여성이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주체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 자립을 필수요소로 여기고 있지만 글쎄 나는 허영스럽게도 페미니즘보다 그리스 귀족 정신에 보다 더 경도되어서인지 사회적 노동이 비본질적 존재에서 본질적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필요 조건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오히려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날 비로소 본질적 존재로서의 내 가능성이 열릴 수 있을 거 같은데.

내 노동은 사회에 유용하다. 그러나 내 노동이 나에게 ‘사회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가? 회의적이다. 내 노동의 종류는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초월이 아니라 내재의 영역에 속한다. 확장과 창조와 번성과 기투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의 유지와 안정과 존속의 영역인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적 차원에 있어서의 가사일과 같다. 그래서 이 일을 통해서는 보부아르가 주부의 업무에 대해서 표현한 대목과 마찬가지로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 투쟁 속에서 끝없이 거듭되는 피로’를 주로 얻는다. 보부아르는 가사노동하는 주부를 시지푸스에 빗대었는데 시지푸스적인 노동을 하기로는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직업이 내게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부여하고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제공하고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게 해주는 점에 대해서는 늘 감사하다. 그래,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나는 성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하면 아무런 표시도 안 나고 안 하면 불쾌한 표시가 나는 집안일과도 같은 노동에 종사하고 있어서일까,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을 하면서도 기투를 통하여 실존하는 주체성을 확보했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든다. 여전히 비본질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만 든다. 어쩌면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전업주부가 사노예라면 대부분의 노동자는 공노예가 아닐까 하는.

아무리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이라도 노동의 주체에게 그 일이 예술적이고 창조적이고 자기초월적인 가치로 실감되지 않는다면 일을 통해 독립된 주체성을 구축하기는 요원한 일 아닐까. 반면에 GDP에서 배제되고 사회적으로 무용하게 치부되는 가사노동이라도 당사자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눈부신 창조적 가치를 발견한다면(이것은 매우 주관적 판단일 것이다) 주체적 삶의 완성이 가능하지 않을까.

여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사회적 노동을 필수로 봤던 보부아르의 견해는 이미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을 하는 중이지만 여전히 종속과 억압과 불만족과 자기소외의 기분을 느끼는 나로서는 뭔가 시원치못하게 느껴진다. 그다지 내 문제점을 명쾌하게 긁어주는 날카로운 통찰이란 생각이 안 든다. 노동도 노동 나름이지. 진정한 자기해방을 위해서는 노동의 종류에 대해 좀 더 고찰하고 분석 비판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수양 2016-08-13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 이 책도 그렇고 페미니즘 서적들을 몇 년에 한 번씩 간헐적으로 읽어보긴 하지만 내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할 수 있을 지는 글쎄, 페미니즘을 지지하느니 차라리 맑시즘에 다가가겠다. 여성 문제보다 노동과 계급 문제가 보다 더 절실하고 본질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내가 맑시스트인가 하면 그것도 아닌데. 그렇기엔 너무 염세적이고 개인주의적인데. 무슨 주의자로 분류하자면 나는 그저 먹고사니스트인 것 같다. 아니다.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무슨무슨 주의를 삶의 모토로 삼거나 지지하기에 나는 너무나 분열되어 있다. 이율배반적 가치와 지향들이 내 안에서 아무런 갈등도 없이 마치 에셔의 판화 그림처럼 터무니없이 기묘하고 정교하고 아름답게, 완성도 높게(?) 공존한다. 나이들면 자연스런 노화의 결과로 좀더 보수주의자가 될 지도 모르겠다.

수양 2016-08-13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 그야말로 방대한 책이다. 초경과 폐경, 결혼과 이혼, 임신과 출산, 육아 등 일련의 다양한 생물학적 혹은 사회적 사건들을 통과해 나가고 있는 여성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아울러 보부아르를 여성운동의 사상적 선구로만 이해하기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 이 책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이기 전에 뛰어난 인류학자이고 심리학자이며 교육가이자 풍속학자 그리고 문필가였다. 문필가로서의 보부아르는 통렬하고 날카롭다. 가차없다. 매섭다. 한편으로 드는 확신은, 페미니즘의 원리는 실존주의 철학이며 실존주의의 뿌리는 단연코 니체라는 것. 니체를 읽어야 한다. 샅샅이.
 
제2의 성 - 상 - 세계의문학 17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조홍식 옮김 / 을유문화사 / 1993년 11월
평점 :
절판


서론 서구 언어에서 남자라는 단어는 인간 전체라는 단어와 동시에 쓰인다. ‘남성’이라고 하는, 주체이자 절대이자 본질적인 존재, 인간의 절대적인 전형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남성이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 자체로서가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로서 정의한다. 남자의 규정에 따르면 여자는 우발적인 존재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며 타자이다. 그러나 이는 납득할 만하다. 어떠한 집단도 ‘타자’와 직접 대립하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주체’로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대립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며, 자기를 본질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타자를 비본질적인 객체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을 확립시켜 나간다.

 

그렇다면 응당 여자도 마찬가지로 남자를 타자로 설정하면서 자기 자신을 주체로서 구축해나가야지 않을까. 각자가 자기를 본질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의식의 투쟁, 바로 그 투쟁적인 교호작용 속에서 '적의'가 '협력'으로 변화하고 서로가 관계의 상호성을 점진적으로 인정해 나가는 그러한 부단한 경과야말로 주체가 또 다른 주체와 만나 더불어 살아가는 온당한 방식이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남녀 사이에는 한 쪽만이 유일한 본질로서 긍정되고 그 상호 관계의 상대에 대해서는 일체의 상대성을 부정하고 그것을 순수한 타성으로 정해버리는 것일까. 왜 여자들은 남성의 절대력에 대하여 따지지 않는가.

 

어떠한 주체도 단번에 자발적으로 비본질적인 객체로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기를 ‘타자’로 정하는 ‘타자’가 ‘주체’를 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주체’로서 정립하는 ‘주체’에 의하여 ‘타자’는 ‘타자’로서 세워진다. 그러나 타자가 주체로 반전(反轉)하여 되돌아갈 능력이 없게 되면 그 타자는 그런 상태의 관점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본질로서의 여자가 본질로 결코 복귀할 수 없는 이유는 자기 힘으로 그 반전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반전을 이루어낼 힘이 없을까. 여자들은 자신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현실적인 수단이 없다. 여자들은 자신에 고유한 과거도, 역사도, 종교도 갖고 있지 않다. 이해의 연대성도 없다. 여자들은 주거, 노동,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매이거나 아니면 사회적 신분에 매여있기 때문에 여자들끼리보다도 남자들 사이에서 더욱 긴밀하게 분산하여 살고 있다. 부르주아 여성은 프롤레타리아 여성보다 부르주아 남성과 연대성이 있고, 백인 여자는 흑인 여자보다 백인 남자와 연대성이 있다.

 

이는 일종의 '공모(共謀)'다. 영주인 남자는 가신인 여자를 물질적으로 보호해주고 그 생존의 도덕적 정당화를 책임진다. 그러므로 여자는 경제적 위험도 회피할 수 있고, 동시에 혼자 힘으로 자기의 목적을 꾸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위험도 회피할 수 있다. 사실, 모든 개인에게는 자기의 주체를 확립하려는 개인의 윤리적 충동과 더불어 자유를 피하여 자기를 사물로 만들려는 유혹이 존재한다. 그것은 불행한 길이다. 왜냐하면 수동적이고, 소외되고, 버려진 그 사람은 초월(超越)에서 이탈되고 모든 가치를 상실하여 다른 사람의 의지의 제물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이한 길이다. 마땅히 인수해야 할 실존의 고뇌와 긴장을 회피해버린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 우리가 채택하는 전망은 실존주의 모럴이다. 모든 주체는 투기(投企)를 통하여 자기 초월로써 구체적으로 확립된다. 주체는 부단한 자기 초월에 의해서만 자기의 자유를 완성한다. 무한히 열려있는 미래를 향하여 자기 신장을 도모하는 것 외에 목전의 실존을 정당화하는 길은 없다. 초월이 내재로 떨어질 때마다 실존은 ‘즉자 존재’로 타락하고, 자유는 사실성으로 타락한다. 이런 전락은 만약 그것이 주체에 의하여 동의된다면 하나의 도덕적인 과실이다. 만약 그것이 주체에 강제된다면 그것은 좌절과 압박의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그것은 두 가지 경우에 다 절대악이다. 자기 실존의 정당화를 희구하는 모든 개인은 이 실존을 자기 초월의 무한한 욕구로 경험한다.

 

그런데 여성의 상황이 특수한 점은,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여자 역시 매순간 투기를 통하여 자기 초월로서 실존하는 주체이면서 또 한편으로 여자는 남자들이 타자로서 살도록 강제하는 세계에서 (최초의)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여자의 비극은, 부단히 본질적인 것으로서 자기를 확립하려는 모든 주체의 기본적인 요구와, 여자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형성하려는 상황의 요청 사이에서의 갈등이다. 여성성과 인간성(내지는 주체성)이 상호 모순되기 때문에 여성은 필연적으로 존재론적 분열을 내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성의 신분에서 어떻게 인간 존재가 완성될 수 있을까? 어떻게 종속의 한가운데서 독립을 찾아내야 할까? 이 문제를 이제부터 구명하려 한다.     

 

1 숙명 생물학, 정신분석학, 유물사관에서 여성은 각각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 먼저 여성의 생물학적 조건. 생명 현상에는 영속과 창조라고 하는 서로 결합하는 두 가지 운동이 있다. 생명은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즉 생산함으로써 종을 유지하여 나가고, 또 자기를 유지해 나가는 조건에서만 창조한다. 생명의 형태가 진화할수록 생식은 이러한 양면성을 뚜렷하게 갖는데, 포유류에서 성역할을 살펴보면 보통 암놈은 생명의 연속과 양육에 힘쓰고 수놈은 분열과 생산과 창조를 야기한다. 그 결과 개체로서의 암놈은 수놈에 비해 종의 이해관계에 훨씬 더 예속되어 있고 종의 권력의지에 의해 수놈보다 훨씬 더 소외되어 있다. 그에 비해 수놈은 종의 생명력을 자기의 개적 생명에 일치시킨다. 이런 점에서 헤겔이 여성은 종 속에 갇혀 있는 데 비하여 남성에게는 주체적인 요소가 있다고 본 것은 옳다.

 

종의 연속을 위해 개체로서의 여성이 자기소외를 초래하면서까지 감내해야하는 생물학적 고난은 다양하다. 생의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되는 생리, 그로 인한 호르몬의 불안정, 고통을 수반하는 임신, 출산, 그에 관련된 각종 질환 등등. 여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와 같은 생물학적 조건은 중요하다. 육체는 세계에 대해 우리가 파악하는 도구이며, 세계는 파악하는 방법 여하에 따라서 상이한 양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생물학적 조건이 여자에 대하여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을 부여하고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 인간은 조건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현상을 만들어간다. 인간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스스로 자기를 만들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종이 아닌 역사적인 관념이고 여자는 응고된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생성이다. 생물학적 고찰만으로는 남녀의 계급을 결정하는 데 결코 충분하지 않고 또 왜 여자가 타자인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두 번째로 여성에 대한 정신분석적 견해를 살펴보자. 어렸을 때 여자는 아버지와 동화하려 하고 그 다음에는 남자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고 그러한 열등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기의 자주성을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남성화하기도 하고 아니면 사랑의 순종 속에서 지배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면서 자신의 행복의 성취를 찾아내고 대신 그 보상으로 어머니가 됨으로써 새로운 자주성을 획득한다는 식의 여성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시나리오는 그 정교함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진리로 행세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다를 바가 없다. 현상을 본질로 착각하는 이론인 것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지극히 남성중심적이다. 아울러 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이 가치를 추구하고 또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듯이 보인다. 정신분석이론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에서의 고찰만 있고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그 안에서 인간의 실존적 선택, 자유의지 이런 것에 대한 인식은 누락되어 있다. 개인에서 사회로 통하는 길이 없다.

 

마지막으로 유물사관의 입장. 유물사관 이론은 프롤레타리아와 더불어 여성 역시 해방의 전기를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물사관은 성적 특질을 고려하지 않고 여성을 노동자로 단순 환원시켜버릴 뿐만 아니라 양성의 대립을 계급투쟁에 귀결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남녀불평등 문제와 계급 갈등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노동에 있어서 노예는 주인에 대하여 자기를 의식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반항 속에서 항상 자기의 조건을 체험한다. 이렇게 해서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착취자를 위협한다. 프롤레타리아가 노리는 것은 계급 소멸이다. 그러나 여성은 성(性)으로서의 자기를 말살할 수는 없다. 여자의 상황은 프롤레타리아와 다르다. 여자는 비본질적 처지에서 본질적인 상태로 돌아가 자신의 착취자를 위협하는 것이 어려운 구조에 놓여있다. 여자는 생활과 관심이 공통적인 이유로 남자와 연대 의식을 가질 뿐만 아니라 남자와 공모를 통해서 존재하는 측면이 있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생물학, 정신분석학, 사적 유물론의 인식틀이 여성을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다. 여성은 가치의 세계 속에서, 인간 존재의 총체적인 전망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2 역사 원시 유목사회에서부터 지속되어온 일반적인 남녀의 포지션: 내재, 유지, 존속, 보존, 양육, 명맥잇기, 자기반복 vs 초월, 생산, 창조, 혁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음, 새로운 가치 창조, 세계의 외연을 넓히기, 미래를 형성해 나가는 일.


3 신화 
주체가 자기 확립을 모색하자마자 그 주체를 제한하고 부정하는 타자가 곧 필요하게 된다. 즉 주체는 자기가 아닌 이 실재를 통해서만 자기에 도달할 수 있다. 주체가 자신의 참된 존재를 완성하고, 초월로서, 목적으로 향하는 탈출로서, 투기(投企)로서 자기완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른 인간의 실존이다. 그러나 나의 자유를 확실케 하는 이 다른 사람은 또한 나의 자유와 충돌도 한다. 의식은 제각기 자신만을 최고의 주체로 인정하려고 한다. 의식은 제각기 남을 노예 상태로 전락시킴으로써 자기완성을 시도한다. 그러나 노예도 또한 노동과 공포 속에서 자기를 본질적인 것으로 느끼고 있다.

 

이 연극은 양쪽이 상대의 개체를 자유로이 인정하는 것에 의하여, 각자가 서로 자기와 상대를 객체로서, 그리고 주체로서 인정함으로써 극복될 수가 있다. 이는 부단히 형성되면서 부단히 소멸되는 투쟁의 진실로써, 인간에게 잠시도 쉬지 않고 자기 초월을 계속할 것을 요구한다. 바꾸어 말한다면, 인간은 존재를 포기하고 자기의 실존을 짊어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도덕적 태도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나의 회심(回心)이다. 회심은 부단한 긴장과 노력, 위험의 감수를 요구한다.

 

그러나 남녀 관계에서는 이러한 도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여자는 모반을 꿈꾸는 투쟁적인 노예와 달리 남자의 지배권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여자로부터 남자는 자기를 객체로 변경시키려는 반항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남자에게 여자는 결코 본질로 돌아가지 못하는 비본질처럼, 상호성이 없는 절대적인 타자처럼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여자는 남자의 실존과의 대조에 있어서 하나의 충실한 보충물적 존재로 보여서, 여자를 통하여 자기합일을 이룸으로써 남자는 자기를 달성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여자가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보충물이든 투쟁과 타도의 대상이든 여자는 언제나 남자와의 관계에서만 규정된다는 점이다. 영원한 타자인 것이다. 

 

여자라는 것의 애매성은 ‘타자’라는 관념의 애매성 바로 그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규정되는 한, 인간 조건의 애매성이다. ‘타자’란 ‘악’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에게 필요할 때는 ‘선’으로 된다. 여자는 남자를 통해서 전체에 도달한다. 그러나 여자를 전체에서 분리시키는 것도 남자이다. 남자는 무한에의 문(門)이기도 하고 여자의 유한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여자는 어떠한 고정된 개념도 구체화하지 못한다. 여자에 관해서라면 언제나 희망에서 실패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선에서 악으로, 악에서 선으로 부단한 진자 운동이 이루어진다. 어떠한 각도에서 여자를 보더라도,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이 상반성이다.

 

여자는 기만적인 이중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여자는 남자가 필요로 하는 전부이면서 남자가 도달하지 못하는 전부이다. 여자는 자연과 남자 사이의 지혜로운 중개자이다. 그런가하면 모든 지혜에 반항하는 분방한 자연의 유혹이다. 선에서 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덕적 가치와 그 반대를 여자는 육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여자는 행위의 실질이며, 행위를 방해하며, 세계에 대한 남자의 파악이며, 남자의 실패이다. 여자는 남자가 자기의 실존에 관하여 성찰하거나 그에 관해서 표현하거나 하는 경우 항상 그 근원에 있다. 남자는 여자 속에 자기가 원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사랑하는 것, 미워하는 것을 투입한다. 여자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은 남자가 여자 속에서 자신의 전부를 추구하며, 또 여자가 추상적인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현실에 있어서 여자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포착하는 데 실패하는 까닭은 여자를 늘 전체적으로 요약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성스럽거나 천하거나 하는 따위로. 이런 인식의 태도는 서로 모순되는 숱한 신화를 양산할 뿐이다. 여자를 이해할 수 없는 남자는 자기의 무지를 인정하는 대신 마치 여자를 둘러싼 신비라는 것이 있는 듯이 말한다. 설명될 것 같지 않던 모든 것들이 신비라는 이름으로 비로소 거뜬히 설명된다는 점에서, 여자에게 신비의 베일을 씌우는 일은 남자의 여자에 대한 이해 태만과 허영심을 숨기는 알리바이다. 여자가 신비스럽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여자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양 2016-06-26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보부아르의 논리에 따르면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이 규정한 타자로서의 여성상을 여성이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실존주의 모럴에 위배되는 행동이다. 그러나 젠더 권력의 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게 오늘의 여전한 현실이라면, 이 안에서 작동하는 젠더 권력 게임의 룰을 철저히 파악 숙지하여 이 게임 안에서 내가 맡은 여성이라는 캐릭터를 전략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내 권력의지를 효과적으로 관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또한 주어진 조건에서 개체가 능동적으로 자기 신장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존재의 실존을 정당화하는 일이라고, ˝자기가 동의하는 소외 속에서 자기를 본질로서 실현하는 것˝(p.113)이며 ˝자기를 기정의 피동적인 비바람에 부대끼는 것으로 파악할 때조차 그는 역시 초월과 투기로써 자기를 실현하고 있는 것˝(같은 페이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이런 생각이야말로 보부아르가 말하는 몹쓸 ˝공모˝일려나. 그러나 그런 혐의를 얻을 지언정 나는 여전히 약자가 지닌 영악하고도 건강한 교활의 힘, 반작용의 힘을 주목한다.

수양 2016-06-22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 보부아르는 왜 여성이 유적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겪는 생물학적 현상들을 비극적으로 볼까. 왜 신산하고 고통스럽게만 여길까. 생리는 비록 번거롭지만 한 달에 한 번의 거사로 인해 생식기가 자연정화되니 얼마나 좋으냐. 출산 역시 마찬가지다. 그간 축적되었던 노폐물이 태아와 함께 빠져나가고 뼈구조가 새롭게 재구축되는 등 그야말로 대대적인 정화, 재생, 재탄생의 순간이 아닌가. 잉태는 오로지 여성만이 누릴 수 있는 우주적 신비 체험이자 유사-신 체험이기도 하다. 여성만이 잉태와 출산을 통해 직관적으로 신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왜 보부아르는 생리와 임신 출산 육아를 개체로서의 인간을 예속하는 종의 이해관계로만, 기투 속에서 실존하는 주체를 좌절시키는 방해 요소로만 볼까. 보부아르한테서는 미묘한 남근 선망이 느껴진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여성성을 그다지 긍정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보부아르를 극복한, 더 큰 긍정의 페미니즘, 호쾌한 페미니즘을 만나고 싶다.

수양 2016-06-24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여자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소외된 타자에 머물 수밖에 없다. 자신의 기분 감정 욕구 생각 의견 입장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반드시 자기언어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말할 줄 알아야 하고, 말하게 해야 한다. 서툴고 낮고 희미한 목소리로라도. 그리고 또 누군가가 내는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부단히 말하기-듣기 연습을 해야 한다.

수양 2016-07-0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 탱고라는 춤에서 땅게라는 여성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몸짓과 표정, 몸매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은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성을 온몸으로 구현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이 보부아르의 표현대로 마냥 수동적이고 패배주의적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그녀들은 여성미의 극치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활력이 넘치고 관능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격정적으로 자신의 모든 욕망을 찬란하게 표출한다. 보부아르의 관점에서 보면 지독히도 한심하게 여성적이면서도 그 누구보다 싱싱하게 살아있다. 심지어 춤을 결정적으로 완성하는 임무는 땅게라에게 주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탱고라는 춤에서 전체적인 패턴을 구상하고 리드를 맡은 쪽은 땅게로다. 땅게로(남자)가 리드하고 땅게라(여자)가 팔로우한다는 커플댄스의 일반적인 규칙은 탱고에서도 엄격하게 준수되어야 할 대전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땅게라를 마냥 수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탱고라는 춤에서, 아니 모든 커플댄스에서 수동과 능동은 아주아주 모호한 것 같다. 대단히 오묘하다. 능동이지만 능동이라 할 수 없고 수동이지만 마냥 수동이라고 할 수 없다. 이걸 어떻게 해야 언어로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내 짧은 언어가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어쩌면 춤 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능동형 같기도 하다.

땅게로는 리드하고 땅게라는 팔로우한다는 규칙은 그저 임의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다. 그러한 규칙 자체가 결코 실체가 아니다. 규칙이란 어쩌면 하나의 시니피앙이고 텅빈 명분일 뿐인 것도 같다. 그렇다면 실체는 무엇일까. 춤 안에서 발생하는 실질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내 생각엔 게임의 규칙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임의적인 규칙 속에서, 그리고 규칙이 야기하는 긴장과 갈등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의도와 욕망을 효과적으로 피력하고 관철할 것인가 하는 게 실질적인 관건이자 핵심인 것 같다.

탱고를 배운다는 것은 바로 그런 걸 습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땅게라와 땅게로 모두 각자 맡은 역할 속에서 바로 그런 요령, 전략, 기술, 전술, 재주, 기예를 깨우쳐나가는 것이다. 만약 보부아르가 탱고를 배웠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녀의 페미니즘은 날카로운 호전성을 다소간 상실하고 대신 좀더 입체적이고 모호하고 난해해지지 않았을까. 여기까지 적고나서 <제2의 성> 하권을 읽는데 내 생각이 경솔했던가 모르겠다. 책은 역시 잠자코 끝까지 읽어봐야.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의지적이고 지배욕이 강한 여성은 남성과 정면으로 대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그녀는 인간의 권리요구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여성적인 성질을 손상시킬 의도도 없다. 그녀는 남성적 세계에 접촉하여 그것을 자기에게 합병시키려고 생각한다. 그녀의 강인한 감각성은 남성의 난폭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신경이 굵은 동물적인 여성은 성교의 수치 같은 것은 처음부터 느끼지 않는다. 과감한 성향을 지닌 지적인 여성은, 자기가 이길 자신이 있는 그 대결에 과감히 나선다.

(...) 남성의 종속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여성이라고 해서, 반드시 남성에게서 도망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여성은 오히려 남성을 자기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고 한다. 조건이 대단히 좋을 경우에는 (그것은 주로 상대방 남자의 인간됨에 의해 결정되지만) 경쟁의식까지도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이 남성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여성의 입장을 완전한 형태로 사는 것을 즐기게 된다.

(...) 지배욕이 강한 여성의 경우에는 동성애가 언제나 완전한 만족을 주는 해결방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여성은 승부욕이 강하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자기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그녀에게 이성애적 관계는 굴욕적인 동시에 자기를 윤택하게 하는 것도 된다. 성에 의해 강요되는 제한을 거부하면, 한편으로 자기를 제한하는 것도 된다.˝(p.62~63)

보부아르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이 그 한계 안에서 그들의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대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들은 각자 자유롭게 그것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 자유는 완전히 각자에게 있다. 다만 그 자유가 여성에게는 추상적이고 허망한 것이므로, 반항의 형태로밖에 올바로 행사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싶다.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게 열린 길이다.˝(p.367)

보부아르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역할의 한계로 인해 여자가 자신의 자유를 표현할 수 있는 범위의 최대치가 고작 `반항`의 형태에 불과하다는 점을 안타까워하면서 보다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스케일이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한 진정한 해방은 여성의 경제적인 진화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요가 수트라 - 원전 주해
박지명 지음 / 동문선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는 총 네 장(삼매의 장, 수행의 장, 초능력의 장, 해탈의 장)으로 구성되어있고 각 장마다 50개 남짓의 경구들이 수록되어 있다. 몇 개만 발췌해둔다. 

 

· 요가는 마음의 상태를 통제하는 것이다.
· 보는 자는 그의 진정한 본성 안에 살고 있다.
· 요가의 상태가 아닌 다른 상태는 상념과 동일화된다.
· 수행의 실천은 계속되는 집중을 통해 확고해진다.
· 가장 높은 무집착은 궁극적인 본질을 자각하고 외적인 현상인 ‘구나’에 집착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 질병, 나태함, 의심, 감각의 탐닉, 부주의, 게으름, 잘못된 인식, 잘못된 방향, 불안정한 마음의 상태, 이 아홉 가지의 분산된 마음들이 수행의 장애 요인들이다.
· 정신적인 혼란의 결과로 슬픔, 의기소침, 육체의 떨림, 불규칙한 호흡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 정신적인 혼란은 하나의 진리에 대한 집중을 함으로써 극복된다.
· 기쁨에 대해서는 친밀함, 슬픔에 대해서는 동정심, 미덕에 대해서는 행복, 부정적인 사악함에 대해서는 다르게 보지 않는 평온한 감정을 훈련한다. 이러한 감정을 익히게 되면 그 결과로서 마음이 정화되고 깨끗해진다.
· 마음의 평온은 호흡의 내보내는 것과 멈추는 것에 의해 얻어진다.
· 감각의 대상에 의식을 집중시킴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나아가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용될 수가 있다.
· 요기는 아는 자와 아는 과정, 아는 대상을 실현한 사람이며 생각의 흐름이 사라진 깨달은 자이다. 마찬가지로 투명한 수정처럼 그의 순수성은 오염되지 않는다. 이것이 삼매의 상태이다.
· 고행을 하고, 자신을 성찰하며, 경전을 공부하고, 신에게 헌신하는 것이 행동의 요가이다.
· 행동의 요가의 수행 실천은 고통을 줄이고 삼매로 이끄는 것이다.
· 고통의 원인은 다섯 가지가 있는데 영적인 무지, 나라고 하는 에고 의식, 집착하는 마음, 증오심, 애착 등이다.
· 고통의 작용인 생각의 움직임은 명상을 통해 고요함으로 들어간다.
· 비폭력, 진실함, 훔치지 않음, 청정함, 무소유는 야마 즉 다섯 가지 자아 통제이자 금지 계율이며 보편적인 도덕률이다.
·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는 행복은 만족함으로부터 얻는다.
· 집중된 수행으로써 비순수성은 파괴되고, 몸과 감각기관이 완벽해지고 신비한 능력을 얻는다.
· 자세는 안정되고 편안해야 한다.
· 불안정한 상태를 이완하고 무한함을 명상함으로써 아사나 자세가 완성에 도달한다.
· 자세를 하고 난 후의 호흡법은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멈추는 것이다.
· 호흡법은 외적이거나 내적이거나 멈추는 것이 있으며, 장소 길이 횟수에 의해 통제되며 연장되고 섬세해진다.
· 변형에 집중하는 니로다 파리나마흐는 생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집중할 때이다. 그것은 마음의 찰나찰나 순간적으로 그 변형된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다.
· 물질적인 몸의 완성은 아름다움, 우아함, 에너지와 단단함을 포함한다.

 

사족 1 흥미로운 점은 인도 명상 철학에서 언급되는 '삼매'의 하위 종류가 매우 여러 가지라는 것이다. 인도에서 삼매의 개념이 다양하게 세분화되어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삼매가 그들의 삶과 각별히 밀착해 있는, 일상에 구체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현상임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사족 2 요가를 반 년 쯤 꾸준히 해오면서 서서히 일어난 개인적인 변화를 몇 가지 적어보면, ①육류나 기름진 음식, 자극적인 음식을 예전보다 덜 먹게 된다. ②담배를 안 피우게 된다. (소화하기 불편하거나 해로운 것들을 거부하는 몸의 감각이 예민해진 것 같다. 요가 들어갈 때는 더욱 예민해져서 입안에 음식 냄새가 남아있거나 텁텁한 것조차도 기분이 안 좋다.) ③가슴을 펴고 항문을 조이고 단전에 힘을 주는, 탱고와 요가에서 모두 기본자세인 이 자세를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자주 하게 된다. 한참 탱고 열심히 했을 때보다도 더 자주 하게 됨. ④팔뚝과 아랫배가 단단해짐. 플랭크에서 코브라 자세로 넘어갈 때 처음엔 팔굽혀펴기를 전혀 못했는데 언젠가부터 잘 하게 됨. 아치 자세도 요즘엔 팔근육이 붙으면서 잘 됨. 요즘엔 심지어 이 자세 할 때 개운하고 좋다. ⑤이상한 경험- 딱히 그럴 만한 사건도 없었는데 뭔가 북받치는 기분에 사로잡혀 요가 도중 눈물 흘린 적이 있었다. 일종의 정신적 해독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을 찾아가는 자기돌봄 - 삶이 고단하고 불안한 이들을 위한 철학 읽기
크리스티나 뮌크 지음, 박규호 옮김 / 더좋은책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술사를 읽어가다 보면 시대를 관통한 예술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얻게 되는 진한 전율과 감동이 있다. 더 큰 자유를 위해 낯선 것을 감행하는 탐험가적 용기, 혁신과 창조에의 열정, 구태를 깨부수는 호기심과 상상력, 시각적 인식의 확장을 일궈내는 집요한 도전 정신 그런 것들. 철학자들은 예술가들과는 또 다른 감동을 준다. 그 모든 무의미와 부조리와 혼돈과 절망, 거대한 오류의 감옥 속에서도 기필코 명징하게 존재하려는 의지. 걷힐 듯 좀처럼 걷히지 않는 안개 속에서, 우스꽝스런 실패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지푸스처럼 곰곰이 성찰에 성찰을 이어가는 사유 근성, 세계를 합리적으로 규명하려는 안간힘, 올바른 인식에의 의지- 그런 게 정말로 숭고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삶의 고난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조력자가 되어줄 만한 철학자들을 여럿 소환해내는데 저자의 손을 잡고 그들의 사유를 좇다보면 지혜로운 철학적 조언과 처방으로 인하여 머리가 환해진다기보다는 차라리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철학자들이 보여주는 정연하고도 견실한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자세 때문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