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한길그레이트북스 57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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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적 지향을 가진 어느 근대 유럽 남성의 아동 교육 청사진. 18세기에 나온 책인데도 루소가 보여주는 교육에 관한 세태 인식이나 교육자로서의 고민과 문제의식 등이 그리 낯설지 않고 오늘의 우리 현실에도 여전히 울림을 줄 만한 대목이 많다. 다만 루소의 여성관은 시대상을 감안하고 읽더라도 문제적이다. 한마디로 최악이다. 이 책은 루소가 상정한 이상적인 가상의 인물 에밀이 태어나서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양육 과정을 5부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1부는 루소의 전반적인 교육관 및 영유아기 양육법에 대한 내용이다. 루소는 에밀에게 신분, 지위, 직업에 맞는 사회화 교육이나 태도 교육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교육을 하고자 한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므로 그들의 공통적인 천직은 인간이라는 바로 그 신분이다. 그러므로 그 신분에 맞게 잘 교육된 사람은 누구든지 그 신분에 관련되는 직업을 잘 해낼 수 있다.” 이러한 루소의 교육은 교훈을 가르치는 데 있다기보다는 단련에 있다. 위험이 닥치더라도 주저하지 않으며, 고통과 시련을 견뎌내고, 신체를 강화하며, 역경을 극복하고, 인생의 선과 악을 감내할 줄 아는 법을 익혀야 한다. 단련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자기 절제와 자기 조절을 할 줄 알고, 어떤 환경에서도 자생자활 하는 능력을 길러 궁극적으로는 행복해져야 한다. 이렇게 자란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가장 잘 느낀 사람”으로 살게 된다. 삶의 목적은 향유에 있으며, 이 목적을 충실히 달성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기르는 것이다.

 

2부는 5~12세까지의 시절을 다룬다. 이 시기의 에밀은 처음으로 용기에 대해 배우게 된다. “가벼운 고통을 겁내지 않고 참음으로써 단계적으로 더 큰 고통을 참아내는 법”을 배우는 시기이다. “큰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자잘한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육체가 지나치게 편하면 정신이 부패한다.” 그렇다고 체벌과 위협과 속박으로 아이를 노예로 만들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용기를 기르고 고통을 단련하는데 있어서 놀이는 중요한 수단이며 놀이에서 언제나 즐거움을 느끼고 사랑스러운 천성을 유지하도록 독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이의 신체와 감각이 발달하고 이성의 기초가 싹트게 된다.

 

한편 이 시기의 에밀은 차츰 의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원하는 걸 얻음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 아이의 자립심을 키워주려면 교사는 최소한의 관여만 해야 한다. “나쁜 짓 하는 것을 금지시키지 말고, 막는 것에 머물라. (...) 그가 요구한다 해서 무엇이든 주지 말고 필요하기 때문에만 주어라. (...) 자유롭도록 하기 위해 그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힘만 정확히 그에게 보충해주어라. 그가 당신의 도움을 일종의 모욕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당신의 도움 없이 일을 해나갈 수 있는 순간과, 스스로 제 일을 처리하는 자랑스러운 순간을 염원하도록 하라.” 교사는 아이가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타인의 도움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지 항상 경계해야 한다. 습관화될 경우 자립은 커녕 타인에 대한 지배욕과 자만심으로 가득한 비뚤어진 천성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이 시기 아이의 훈육에 있어서 중요한 방침은 거절을 남용하지 않는 것, 그리고 만약 한 번 거절하면 절대로 번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당신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조차도 잘 참고 변덕이 없으며 체념할 줄 아는 침착한 아이를 만들 것이다.” 아울러 아이를 지도하는 데 있어서 경쟁심, 질투심, 선망, 허영심, 탐욕, 비굴한 공포 등과 같은 정념을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또한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한 큰 법칙을 정하고 그 안에서 자율에 맡길 필요가 있으며, 만약 잘못을 저질렀다면 체벌하는 대신에 잘못의 결과가 빚어내는 불편한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교훈을 획득하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초기 교육은 전적으로 소극적이어야 한다. 가르치지 말고 모방하게 만들 일이다. 기억력을 연마시키고자 한다면, 알아도 되는 것은 끊임없이 보여주지만 알지 말아야 하는 것은 숨겨서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배려 정도면 충분하다. 교육적으로 적합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 사실 초기 교육은 미덕이나 진리를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다만 마음을 악습으로부터 정신을 오류로부터 지켜주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초기 교육의 목표는 타인의 관념, 기성의 스타일, 인습, 틀에 박힌 공식, 남이 가르쳐준 말, 가장된 태도에 어설프게 오염되지 않은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너절한 잡동사니들이 분별없이 주입되어 있지 않은 인간, 훼손되지 않은 인간, 건강하고 순수한 백지 상태의 인간으로 키우는 것이 초기 교육의 목표다.

 

그리하려면 가장 단순한 자극을 섬세하게 제대로 음미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유년기의 중점 교육이란 다름 아닌 오감 계발인 것. 지금 현재, 오늘 하루, 자기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기와 직접 관련된 것들을 향해 모든 감각 기관을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사물이 우리와 맺는 감각적 관계를 인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감관 훈련과 동시에 힘써야 할 것이 신체 단련이다. 단순하고 거친 운동, 날랜 짐승의 몸상태로 만들어주는 운동, 단전을 강화하고 바른 자세를 갖추게 해주는 운동을 해야 한다.  

 

위와 같은 방침에 따라 키워진 유년기 아동의 모습에 대해 루소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관념은 한정되어 있지만 명확하다. 그는 외워서 아는 것은 전혀 없지만 경험을 통해 배워 아는 것은 많다. 그는 다른 아이보다 책을 더 잘 읽지는 못하지만, 자연이라는 책은 더 잘 읽는다. 그의 재기는 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다. 그는 기억력보다 판단력이 더 좋다. 그는 한 가지 언어 밖에 모르지만, 자기가 하는 말은 이해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만큼 말은 하지 않지만, 그가 하는 말에서는 그들보다 더 잘 말한다.”

 

3부는 소년 시절(12~15세)이다. 적절한 시기에 호기심을 느낄 만한 대상을 인공적인 상징물이 아니라 자연물로서 직접 보여주고 질문하게 한다. 이때 아이의 호기심을 잘 다뤄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즉각적으로 호기심을 만족시켜주지 말아야 한다. 제 능력이 허락하는 대로 스스로 문제를 풀게 하고 스스로 이해함으로써 배우게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지식을 수동적으로 배우게 하지 말고 자발적인 탐구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깨우치도록 해야 한다. 오류를 발견하더라도 즉각 교정해주는 것을 피한다. 이 시기에는 학습을 통한 결과물의 수준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원리와 방법에 대한 자기주도적인 이해가 중요하다. 또한 단순히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판단력을 함양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판단력이 있어야 앞으로 습득하고자 하는 지식의 가치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학식을 갖추는 게 아니라, 학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을 갖춰야 한다.

 

이 시기에는 인문사회과학보다 자연과학 위주의 학습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학습에 쓰이는 모든 기구나 도구를 직접 만들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러한 능동적인 활동을 통해 보다 명료하고 확실한 관념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을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고만 있으면 우리의 정신은 무기력 속으로 침몰”한다. 학문이 아니라, “노력하여 학문하는 방법”을, “지식이 아니라, 필요할 때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루소는 이 시기의 에밀이 읽어야 할 유일한 책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꼽고 있는데 이러한 교육 방침과 무관하지 않다.) 과학 법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이론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주변의 자연 현상을 관찰하는 일부터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 일상 속에서 아이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경험들이 훗날 연역을 통해 그의 정신 속에서 하나의 원리로서 서로 연결되게 하고 그것이 이론 지식을 축적하는 데 있어서 효과적인 실마리가 되게 해야 한다.

 

이 시기의 학습에 있어서 ‘유용성’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아이가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지금 배우는 것들이 실제로 어떤 쓰임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배움에 열정이 생긴다. 아이에게는 현재 그가 그 유용성을 알아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가르쳐야 한다. 한편 이 시기의 에밀은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다. 목공과 같은 실용기술을 익혀 장인이 되어야 비로소 운명과 타인의 지배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전문 기술을 갖추고 있으면 비굴해질 필요도, 아첨하거나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인간성에 대치되는 추악한 자질의 정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건강하고 정직하게 열심히 올바로 살아갈 수 있다. 사실, 노동은 사회에 무임승차하지 않고 제 몫의 기여를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인간의 필수불가결한 의무이기도 하다. 일을 배운다는 것은 사회 관계 속에서 타인과 공생하는 법을 깨우치고 시민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소양을 개발하는 과정이다.

 

4부(15~20세)는 교육에 관한 내용 외에도 윤리관이라든가 에피쿠로스적 삶에 대한 지향 등 루소의 다양한 견해가 드러나 있는 장이다. 청년기가 되면 비로소 정념이 에밀을 에워싸기 시작한다. 정념이 꼭 위해한 것만은 아니다. 정념을 악덕으로 만드는 것은 상상력의 오류들이다. 정념의 원천은 자기애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적이다. 정념이 발달함에 따라 에밀은 타인에게 연민과 동정을 느끼고 인류 공통의 불행과 비애와 고통에 대해 성찰하며 비로소 인간애에 눈뜨게 된다. 자기애가 타인에 대한 공감, 나아가 인류애로 확대되는 것이다. 인류애를 고취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화려한 운명에 감탄하도록 하는 대신에 운명의 불행한 측면을 보여주어 그에게 두려움을 갖도록 해야 한다.” “불행한 사람들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들의 모든 고통이 자신의 발아래에도 있으며, 수많은 예상치 못한 불가피한 사건들 속으로 자신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것 등을 그에게 이해시키도록 하라. 그에게 신분도 건강도 부도 믿지 말도록 가르쳐라. 그에게 운명의 모든 유위전변을 보여주어라.” “자기 주위의 그런 온갖 심연을 보게 하라.”

 

이 시기의 에밀은 양심, 정의, 선악, 도덕과 같은 것들에 대한 개념을 내면화하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자연 속의 에밀이 아닌 것이다. 지적 이성이 발달하여 추론, 판단, 추상화, 일반화 능력이 생기고 시야가 인간과 사회로 확장됨에 따라 이제는 그 자신의 경험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학습하도록 할 필요가 생긴다. 다시 말해 이제는 역사를 배워야 할 때이다. “판단이 가장 옳은 역사가가 아닌, 가장 꾸밈없이 오직 보여줄 뿐인 역사가”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를테면 투키디데스와 헤로도토스.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려면 개인적인 삶에 관한 책도 읽어봐야 한다. 수에토니우스와 플루타르코스의 책이 도움될 것이다.

 

이 시기에는 우화 문학을 통한 도덕 교육 역시 필요하다. 우화가 주는 교훈을 통해 에밀은 “특별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의 운명을 부러워하지 않고 운명의 유희를 관조하게 될 것이며, 자신이 타인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신에 대해 만족할 것”이다. 한편, 수사학에 대한 교육은 신중히 이루어져야 한다. “수사학에 관한 모든 교육은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순전한 객설에 불과할 따름이다.”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데 말하도록 연습시키는” 꼴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청년기의 에밀이 “꾸밈없는 언어”를 사용하여 “본래의 의미로 말을 하며 오로지 자신의 말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기교적인 능변보다 더 중요하게 갖춰야 할 것은 인간을 향한 애정이다. 마지막으로 종교 문제에 있어서는 에밀이 일찍이 어떤 종파에도 소속되지 않도록 하고 훗날 그 자신의 이성에 따라 스스로 종파를 선택하게 해야 한다. 신앙을 갖게 됨으로써 에밀은 양심과 정의와 선(善)과 창조주의 사랑을 알게 된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성급히 사교계에 입성한 청년의 마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기호보다 타인의 기호에 대한 관심, 모방심, 위선, 허위의식, 허영, 질투, 분노, 권태, 회한, 자기소외 밖에 자리잡지 않는다. 인간을 알기 전에 세상을 보여주는 일은 그를 올바르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타락시키는 것이다. 에밀에게 떠들썩한 사교계의 덧없는 행복이 아니라, 변함없는 생활의 단조로움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절제된 기쁨을, 조용한 만족과 평화를 알게 해야 한다. 루소의 교육 방침에 따라 내실을 다지며 자라난 에밀은 세상에 발을 들여놓을 때 기죽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타인의 평가에 동요하지 않으며 초연하고 침착하다. 거만하거나 가장된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친절하고 인정 많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세간의 견해에 의거하여 평가하지 않는 그는, 비록 타인의 마음에 들고 싶기는 하겠지만 존경받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정중하기보다는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 될 것이며, 잘난 체하는 태도도 허식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천 번의 칭찬보다 단 한 번의 포옹에 더 감동받을 것이다.”

 

이 시기의 에밀이 힘써야 할 분야 가운데 하나는 취향(삶을 즐기는 자기만의 기준, 문화적 경험과 식견, 교양) 계발이다. 취향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교를 해보기 위해 여러 사회를 경험해봐야 한다. 뿐만 아니라, 즐겁고 여유로운 환경이 갖춰져야 하며, 불평등이 크지 않고 세간의 견해와 횡포가 강하지 않으며 허영심보다는 즐거움이 지배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자신의 견해에 따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요구된다. 사치는 좋은 취향과는 무관하다. “취향이 비용이 많이 드는 곳은 어디서나, 그것은 잘못된 취향이다.” 사실 취향이란 비싸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들에 정통하는 기술”이다. 삶의 즐거움은 바로 그런 수많은 사소한 것들에 따라 좌우되며 취향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수단을 부에서 찾지 않는다. “진정으로 관능적인 즐거움을 즐기는 고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것, 그리고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건강을 즐기며 필요물이 모자라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에서 세론이라는 재산을 제거하기만 하면 아주 부자인 것이다.”

 

5부는 스무 살을 넘긴 에밀이 반려자를 찾아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첫머리에서 루소는 에밀에게 배필을 맺어주고자 이상적인 여성상 및 여성 교육 방법론에 관해 설파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너무나 시대착오적이어서 읽기가 힘들다. 참고 읽어 나갈수록 불편함과 역겨움을 넘어 소름 돋는 충격의 대반전이다. 이제껏 참고 들어줬던 루소의 그 모든 장광설이 실상은 '인간'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남성 인간'을 위한 교육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후로는 그나마 읽을 만하다. 후반부에서 루소는 인생관과 여행관을 피력하기도 하고 사회계약에 토대를 둔 시민 사회에 대해 고찰하기도 한다.

 

에밀이 반려자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위기는 상대에 대한 애착과 욕망에서 비롯한다. 애착과 욕망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고뇌, 이것이 에밀의 행복을 위협하는 적이다. 정념의 자기제어야말로 에밀이 완수해야 할 이 시기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루소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덕이 있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정념을 다스리는 것은 이전의 모든 훈련보다 훨씬 힘들다. 자연의 속성과 반대되는, 중력을 거스르는 인간의 의지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가 우리 정념의 희생물이 되게 내버려두며, 우리의 지어낸 불행에 무릎 꿇게 내버려두며, 수치심을 가져야 할 눈물에 대해 오히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내버려둔다.” “우리가 정념을 가지느냐 가지지 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감정은 모두 정당하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를 지배하는 감정은 모두 죄가 된다.” 정념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루소는 지나친 욕망을 절제하여 능력과 욕구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고, 다시 말해 능력을 벗어난 미망에 사로잡히지 말고, 오늘 현재에 충실한 자족적 삶을 살기를 권하고 있다. 또한 주어진 조건과 자연의 섭리와 운명에 순응하고, 삶의 모든 일을 관조함으로써 초탈하는 법을 배울 것을 주문한다.

 

여행은 에밀이 거쳐야 할 교육의 최종 관문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고 배움에의 의욕을 고취시킨다는 점에서 여행은 대단히 교육적이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에밀은 정부의 다양한 통치 형태와 운영 방식 및 사회의 다채로운 풍속과 제도를 접하게 되고, 사회적인 관계에 눈뜨면서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여행은 체험을 통한 일종의 시민 교육인 것이다. 에밀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결혼식을 거행함으로써 이 교육의 대장정은 비로소 마무리를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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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역 니체의 말 초역 시리즈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시라토리 하루히코 엮음, 박재현 옮김 / 삼호미디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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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이런 말을 했나? 어떤 맥락에서 이런 말을 했나? 니체를 이렇게 읽어도 되나? 유사-자기계발서 컨셉의 말랑한 잠언집으로, 간편하고 실용적인 스타일로, 니체를 이렇게 소비해도 되나? 독서에 연속적으로 제동을 가하는 의구심 일체를 한방에 날려주는 글귀가 195쪽에 나온다. "공부나 교제, 일이나 취미, 독서 등 무엇인가 새로운 일에 맞딱뜨렸을 경우의 현명한 대처 요령은 가장 넓은 사랑을 가지고 맞서는 것이다. 꺼리는 면, 마음에 들지 않는 점, 오해, 시시한 부분을 보아도 즉시 잊어버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 모든 것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며 전체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잠자코 지켜본다. 그럼으로써 드디어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그것의 심장인지 확연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좋다 혹은 싫다와 같은 감정이나 기분에 치우쳐 도중에 내팽개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넓은 사랑을 갖는 것. 이것이 무언가를 진정으로 알고자 할 때의 요령이다." 하하하. 아무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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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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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당신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 당신이 진리이다. 만약 다른 곳에서 진리를 찾고 있다면 매번 속을 것이다.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진리이다. 예수는 이것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로 전하려고 했다. 예수의 이 말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직접적으로 진리를 가리킨다. 하지만 잘못 해석하면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예수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존재, 모든 남자와 여자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신의 존재인 그 생명에 대해 말했다. 기독교 신비가들은 그것을 ‘내면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부른다.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진아), 즉 내면에 거하는 신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 차원과 연결될 때—그 차원과 연결되는 것은 당신의 자연스러운 상태이지 특별히 기적적인 성취가 아니다—당신의 모든 행동과 관계들은 당신이 깊은 내면에서 감지하는 모든 생명과의 일체감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라고 성 어거스틴은 말했다. 언어로는 이것 이상으로 진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삶에서도 세상 속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우연 같은, 뿐만 아니라 무질서하게 여겨지는 일련의 일들 배후에는 더 높은 질서와 목적이 숨어 있다. 이것을 선에서는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눈이 내릴 때, 모든 눈송이가 저마다 정확히 자기 자리에 내린다.” 생각을 통해서는 이러한 더 높은 질서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내용물에 대한 것인 반면, 더 높은 질서는 형상 없는 의식의 영역, 우주 지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잠깐이나마 들여다볼 수는 있고, 더 나아가 그 질서에 우리 자신을 맞춤으로써 그 더 높은 목적이 펼쳐지는 데 의식적인 참여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으로 들어갈 때, 생각에 지배되는 마음에게는 주위 사방에 있는 무질서와 혼돈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삶—좋은 것—과 죽음—나쁜 것—조차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완전히 썩은 부패한 물질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에 오직 고요만이 자리하고 생각이라는 소음이 없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곳에 숨은 조화가 있고 신성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모두가 완벽한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어서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방식 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더 큰 질서를 알아차리게 된다.

-생각에 지배되는 마음에게는 조경이 잘된 공원이 더 편안하다. 공원은 자연스럽게 무성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통해 계획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질서가 있다. 원시림의 질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에는 혼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좋고 나쁨이라는 마음의 분류를 넘어서 있다. 생각을 통해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생각을 내려놓고 고요히 깨어 있으면, 또한 이해하려고도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으면, 감지할 수 있다. 그때 처음으로 숲의 신성에 눈이 열릴 것이다.

-숨은 조화와 신성을 감지하면 자신도 그 일부임을 알 수 있고, 그것을 깨달을 때 당신도 그 조화의 의식적인 참여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자연은 당신이 삶의 전체성과 다시 연결되도록 돕는다.

-꿈이 있고, 그 꿈을 꾸는 자가 있다. 꿈은 형상들의 일시적인 놀이이다. 그것이 이 세계이다. 상대적으로는 실재하지만 절대적으로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거기 꿈꾸는 자, 절대적 실체가 있다. 그 안에서 형상들은 왔다가 간다. 꿈꾸는 자는 개인이 아니다. 개인도 꿈의 일부이다. 꿈을 꾸는 자는 그 안에서 꿈이 나타나고 꿈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다.

-우주의 실체를 구성하는 두 부분, 즉 물체와 공간, ‘어떤 것임’과 ‘어떤 것이 아님’은 당신 자신의 실체를 구성하는 두 부분이다. 분별 있고, 균형 잡히고, 결실 있는 삶은 실체를 구성하는 이 두 차원인 형상과 공간 사이의 춤이다. 많은 사람들은 형상의 측면에, 감각 지각과 생각과 감정에 너무도 동일화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한 숨은 절반은 그들의 삶에 누락되어 있다. 형상과의 동일화 때문에 에고 속에 계속 갇혀 있는 것이다.

-전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세상 또는 우주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미생물에서 인간, 은하에 이르기까지 실제로는 개별적으로 분리된 물체들이나 독립된 존재들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다차원적인 그물망의 일부입니다. (...) 이 전체성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상호연결성보다도 더 깊은 차원이 있습니다. 더 깊은 그 차원에서는 모든 존재가 하나입니다. 그것이 ‘원천’이며,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한 생명’입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지성으로, 그것이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우주라는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전체는 사물의 존재와 ‘순수한 있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형상으로 나타난 것과 나타나지 않은 것, 세상과 신으로. 그러므로 전체와 연결될 때, 당신은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전체의 상호연결성의 일부가 되고, 전체의 목적의 일부가 됩니다. 전체의 목적은 의식을 이 세상에 등장시키는 일입니다. 그 연결의 결과로, 자발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들, 기회를 제공하는 만남들, 우연들, 동시에 일어나는 다발적인 일들이 훨씬 더 자주 일어나게 됩니다. 칼 융은 이 동시성을 ‘비인과적 연결 원리’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현실이라는 표면 차원에서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에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표면의 세계 밑바탕에 존재하는 지성이 외부로 나타난 것으로, 마음의 이해를 뛰어넘는 깊은 연결입니다.

-어떤 생각도 전체의 무변광대함을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 실체는 통일된 전체이지만 생각은 그것을 조각들로 잘라 놓는다. 이것이 근본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개별적으로 분리된 사물들과 사건이 있다거나 이것이 저것의 원인이라고 믿는 것이다. 모든 생각은 어떤 시각을 담고 있으며, 모든 시각은 그 본질상 한계를 담고 있다. 한계를 담고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적어도 절대적인 진리는 아님을 의미한다. 오직 전체만이 진리이지만 그 전체는 말해질 수도 생각되어질 수도 없다. 전체는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으로는 불가해한 것이다.

-세상 속으로 나타났다가 다시 나타나지 않은 상태로 회귀하는 것, 즉 확장과 수축은 우주의 보편적인 두 가지 운동이다. 우리는 그것을 밖으로 나감과 집으로 돌아옴으로 부를 수 있다. 이 두 가지 운동은 심장의 끊임없는 팽창과 수축, 호흡의 들숨과 날숨처럼 우주 전체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되고 있다. 그 운동은 잠과 깨어남의 순환 속에서도 반영된다. 매일 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의 상태로 들어갈 때 당신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타나지 않은 모든 생명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며, 그런 후에 아침이 되면 기운을 보충해 다시 나타난다.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는 충격을 받고 이해할 수 없으며 절망하고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제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동안 삶이 그들을 위해 가지고 있던 모든 의미와 목적은 축적, 성공, 세움, 보호, 그리고 감각적인 만족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외부적인 운동이고 형상과의 동일화, 즉 에고와 관계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그들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외부적인 운동보다도 더 깊은 의미가 잠재되어 있다. (...) 지금까지는 개인의 삶 속으로 영적 차원이 들어오는 것은 대개 늙음과 상실과 개인적인 비극을 통해서였다. 말하자면 내면적인 목적이 나타나는 것은 외부적인 목적이 무너지고 에고의 껍질에 금이 가서 열리기 시작할 때뿐이다. 그러한 사건들은 형상의 소멸을 향한 회귀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형상 차원에서의 잃음은 본질 차원에서의 얻음이다. 고대 문명과 전설에 등장하는 ‘눈 먼 예언자’와 ‘상처 입은 치료사’ 같은 전통적인 인물을 보면 형상 차원에서의 크나큰 상실이나 장애가 영적 차원으로의 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형상의 불안정한 본성을 직접 경험하면 다시는 형상을 과대평가하지 않게 되고, 맹목적으로 형상을 추구하거나 형상에 집착해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형상의 소멸, 그중에서도 특히 늙음으로써 나타나는 깨달음의 기회는 현대 문명에서는 이제 막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다. (...) 한 개인의 삶에서 에고가 회귀 운동과 자신을 더 이상 동일시하지 않으면 늙음이나 다가오는 죽음은 본래의 의미를 되찾는다. 영적 차원으로의 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노인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은 늙어 가면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그들의 쇠약해져 가는 형상들은 투명해져서 의식의 빛이 비쳐 나오고 있었다.

-새로운 지구에서는 늙음이 인간 개인의 의식이 꽃피어나는 높은 가치를 지닌 시기로 인식될 것이다. 그 시기는 아직 삶의 외부적인 환경들 속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늦은 귀향의 시기이고, 자신의 내면적인 목적에 눈을 뜨는 시기이다. 그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늙음의 시기는 깨어남의 과정이 강렬해져서 마침내 정점에 이르는 시기가 될 것이다.

-알아차림이 깊어지고 에고에 삶을 지배당하지 않게 되면 늙음이나 개인적인 비극에 의해 자신의 세계가 축소되거나 붕괴되지 않아도 자신의 내면적인 목적에 눈뜰 수 있다.

-에고의 기능장애로 인해 손상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은 우주 지성의 외부 팽창 주기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그 창조의 추진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형상의 창조에 의식적인 참여자가 된다. 창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를 통해 우주의 지성이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며, 따라서 행위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는다.

-반발력을 일으키지 않는 유일한 행위는 모두의 선을 목표로 한 것들이다. 그런 행동은 배타적이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 분리시키지 않고 합친다. ‘나의’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 ‘나의’ 종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 존재 속 의식의 등장을 위해, ‘나의’ 종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 가진 모든 존재와 자연 전체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행위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다. 행위는 필요하지만 우리의 외부 현실을 나타나게 하는 데는 이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창조의 일차적인 요소는 의식이다. 아무리 활동적이고 아무리 많이 노력해도 우리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 상태이다. 내부 차원에서 변화가 없으면 아무리 행동해도 차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형태만 다른 똑같은 세상을, 에고가 밖으로 투영된 또 하나의 세계를 몇 번씩 재창조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깨어 있는 행동은 외부적인 목적—무엇을 하는가—과 내면적인 목적—깨어남과 그 깨어 있음을 유지하는 것—이 조화를 이룬 행동이다. 깨어 있는 행동을 통해 당신은 외부로 향한 우주의 목적과 조화를 이룬다. 당신을 통해 의식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의식은 당신의 생각 속으로 흘러들어 와 생각들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 가 행동을 안내하고 힘을 부여한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가가 당신의 운명을 실현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하는가는 당신의 의식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 의식이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 올 수 있는, 그렇게 해서 당신을 통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올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다. 당신이 삶을 우주의 창조적 힘과 연결시키는 세 가지 방식이다. 여기서 방식이란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 와 당신의 행동을 깨어 있는 의식과 연결하는 밑바탕의 에너지 주파수를 의미한다. 이 세 가지 방식 중 어느 하나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이 하는 일은 기능장애적이고 에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 각각은 의식의 특정한 진동 주파수를 대표한다. 가장 단순한 일부터 매우 복잡한 일까지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그 셋 중 하나가 작동하도록 특별히 깨어 있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의 어느 상태에도 있지 않다면, 자세히 살펴보면 당신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받아들임의 상태에서 행동한다는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당신이 평화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평화로움은 미묘한 에너지 파동으로 당신이 하는 일 속에 흘러든다. 겉에서 볼 때 받아들임은 수동적인 상태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다. 왜나하면 이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무엇인가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 평화, 그 미묘한 에너지 파동이 의식이며, 그 의식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방식 중 하나가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는 것이다. 항복은 받아들임의 한 측면이다.

-즐거움은 ‘순수한 있음’의 역동적인 측면이다. 우주의 창조적 힘이 자신을 의식할 때, 그것은 기쁨으로 나타난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면서 그 행위를 할 때, 그리고 그 행위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닐 때, 그것이 어떤 일이든 즐거울 것이다. 사실 즐거움은 당신이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강한 살아 있음의 느낌이다. 그 살아 있음은 당신 자신과 하나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은 실제로는 ‘순수한 있음’의 기쁨을 역동적인 측면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열정은 삶(생명)과 하나이며, 열정에 의해 움직이는 행동이 아무리 역동적이어도 당신은 그 행동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다. 회전하는 바퀴의 중심에는 늘 고요하면서 강렬하게 살아 있는 공간이 있다. 모든 활동 한가운데에 평화로운 중심부가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의 원천인 동시에 그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다. / 형상의 소멸을 향해 돌아가는 운동이 시작되면, 열정은 더 이상 당신에게 봉사하지 않는다. 열정은 외부로 향하는 삶의 주기에 속한다. 오직 받아들이는 항복을 통해서만 돌아가는 운동, 즉 집으로 가는 여행과 자신을 맞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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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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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가 만들어 내는 감정들은 마음이 외부적인 요인과 자신을 동일화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물론 그 외부적인 요인들은 불안정할 뿐 아니라 어느 순간에라도 변하기 쉽다. 이보다 훨씬 더 깊은 감정은 사실 감정이 아니라 ‘순수한 있음’의 상태이다. 감정은 반대되는 것들의 세계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순수한 있음’의 상태는 흐려질 수는 있어도 반대의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순수한 있음’의 상태는 사랑, 기쁨, 평화로서 당신의 내면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온다. 그것들은 당신의 진정한 본성이다.

-앎은 받아들임이 뒤따라야 한다. 그 밖의 것들은 그 앎을 다시 흐려 놓을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순간에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느끼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의 일부이다. 있는 그것에 반론을 던질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을 깊이 안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떠다니는 다양한 사상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미아가 되는 대신 ‘순수한 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유일하게 진정한 행복인 ‘순수한 있음’의 기쁨은 형상, 소유, 성취, 사람 또는 사건을 통해 오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그 기쁨은 밖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당신 내면의 형상 없는 차원으로부터, 의식 그 자체로부터 발산되는 것이며, 따라서 본래의 당신 자신과 하나이다.

-공간이 모든 사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듯이, 또한 고요 없이는 소리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당신도 당신 존재의 중요한 본질인 형상 없는 차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단어가 잘못 사용되어 오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그 차원을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순수한 있음’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순수한 있음’은 사물의 존재에 앞선다. 사물의 존재는 형상이고 내용물이고 ‘일어나는 것’이다. 사물과 사건은 생명(삶)의 전면에 있고, ‘순수한 있음’은 이른바 생명(삶)의 배경에 있다.

-우리의 행성을 제정신으로 되돌리고 인류가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대상 의식을 공간 의식으로 균형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공간 의식의 등장이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이다. 공간 의식은 사물을 의식하는 것—언제나 감각 지각, 생각, 감정의 순서로 진행되는—과 동시에 그 밑바탕에 알아차림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다.

-형상과 더 이상 완전히 동일화되지 않을 때, 진정한 당신인 ‘의식’은 형상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자유는 내적 공간의 등장이다. 설령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이 공간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고요, 알아차리기 힘든 평화로 다가온다. 겉으로 보기에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조차도 그 고요와 평화가 그곳에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일어나는 사건들 주위에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또한 오르내리는 감정 주위에도, 심지어 고통 주위에도 공간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생각 주변에 공간이 생겨난다. 그 공간으로부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평화가 발산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형상이고, 그 평화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의 평화이다.

-이제 당신은 이 세상의 것들에 의미와 중요성을 주지 않고도 그것들을 즐기고 음미할 수 있다. 그것들은 원래 의미와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당신은 창조의 춤에 참여할 수 있으며, 결과에 집착함 없이 행동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해 “나를 만족시켜 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 주고,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줘.” 하고 불합리한 요구를 하지 않게 된다. 세상은 당신에게 그것들을 줄 수도 없으며, 그런 기대를 내려놓으면 자신이 만들어 내는 고통은 막을 내린다. 그런 모든 고통들은 형상의 과대평가와 내적 공간의 차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당신 삶에 내적 공간의 차원이 생길 때, 감각의 즐거움 속에 실종되는 일도 집착함도 없이, 즉 이 세상에 중독되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즐길 수 있다.

-내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은 그것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물건과 경험을 찾듯이 찾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영적 자각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딜레마이다. (...) 그것은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형상이 없다. 그것은 공간이다. 고요이며, ‘순수한 있음’의 달콤함인 동시에 이런 언어들을 훨씬 뛰어넘는다. 언어는 다만 그것을 가리키는 표지판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 안에서 직접 느낄 때 더욱 깊어진다. 그러므로 소리, 풍경, 감촉 같은 어떤 단순한 것의 가치를 알아볼 때, 아름다움을 볼 때,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과 친절을 느낄 때, 그 경험의 원천이며 배경인 넓은 내적 공간을 감지해 보라.

-그렇다면 ‘경험하는 자’는 누구인가? 당신이다. 그럼 당신은 누구인가? 의식이다. 의식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대답이 불가능하다.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대상을 왜곡한 것이고 그것을 또 다른 대상으로 만든 것이 된다. 전통적으로는 ‘영혼’이라 불리는 이 ‘의식’은 일반적인 의미의 언어로는 알 수 없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다. ‘안다’는 것은 모두 주체와 객체, 아는 자와 앎의 대상이 있는 이원성의 영역 안에서의 일이다. 주체인 나, 그 ‘아는 자’ 없이는 어떤 것도 알 수 없고, 인식할 수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지만 그 ‘아는 자’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형상만이 앎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이 형상 없는 차원 없이는 형상의 세계도 있을 수 없다. 형상 없는 차원은 형상들의 세계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빛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이 나의 ‘순수한 있음’의 삶이다.

-생각의 흐름에 틈을 만듦으로써 내적 공간을 발견하라. 그 틈이 없으면 당신의 생각은 어떤 창조적인 불꽃도 없는 반복적이고 활기 없는 것이 된다. 이 행성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상태이다. 그 틈의 시간적 길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몇 초만이라도 충분하다. 그 틈은 당신 쪽에서의 어떤 노력 없이도 저절로 점점 길어질 것이다. 시간적 길이보다 중요한 것은, 그 틈을 자주 가져와서 당신의 매일의 활동들과 생각 흐름의 여기저기에 그 틈이 있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호흡을 자각하는 것은 생각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내적 공간을 만들어 준다. 그것이 의식을 탄생시키는 한 방법이다. (...) 호흡은 당신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어남이고, 당신은 그것을 관찰할 뿐이다. 호흡은 저절로 일어난다. 몸 안의 지성이 그 일을 하고 있다. 당신이 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긴장도 노력도 개입하지 않는다. 또한 호흡 사이의 짧은 멈춤을 주목하라. 특히 숨을 다 내쉬고 난 뒤 다시 들이쉬기 전의 고요한 지점을.

-내적 공간은 또한 자신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필요성을 내려놓을 때마다 일어난다. 그 필요성은 에고의 필요성이다. 그것은 진정한 필요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러한 행동 패턴을 하나씩 버릴 때마다 내적 공간이 나타난다. 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에고에게는 그것이 마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려고 시도하는 몇 가지 방식들이 있다. 만약 당신이 충분히 깨어 있다면 이런 무의식적인 패턴들 중 몇 가지를 자신 안에서 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한 것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화가 나거나 마음이 상하는 것.

*자신의 문제나 병에 대해 말하거나 소란을 피움으로써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

*아무도 묻지 않았고 상황에 변화를 일으키지도 못하는데 굳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

*다른 사람 자체보다도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를 더 신경 쓰는 것. 즉, 다른 사람을 자기 에고의 반영이나 에고 강화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

*소유물, 지식, 외모, 지위, 신체적 힘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인상을 심으려고 노력하는 것.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한 분노에 찬 반응을 통해 에고를 일시적으로 부풀리는 것.

*일들을 개인적으로 해석해 감정이 상하는 것.

*마음속에서 혹은 입 밖으로 도움이 안 되는 불평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린 것으로 만드는 것.

*주목받기를 원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것.

일단 이러한 행동 패턴을 자신 안에서 탐지했다면 한 가지 실험을 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 패턴을 버리면 어떤 느낌이 들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관찰하는 것이다. 단지 그 패턴을 중단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형상 차원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덜 강조하는 것은 의식을 생겨나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자신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을 중단할 때, 얼마나 큰 힘이 당신을 통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지 발견할 수 있다.

-삶 속에서 고요와 마주칠 때마다 그 고요를 알아차리면 자기 내면의 형상도 없고 시간도 없는 차원, 생각 너머와 에고 너머에 있는 차원과 연결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의 세계에 널리 스며들어 있는 고요일 수도 있고, 이른 아침 방 안에 깃든 고요일 수도 있고, 소리와 소리 사이에 놓인 조용한 틈일 수도 있다. (...) 고요는 형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통해서는 고요를 알아차릴 수 없다. 생각은 형태이다. 고요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고요하게 멈추는 것이다. 고요하게 멈춘다는 것은 생각의 방해 없이 의식이 깨어 있다는 것이다. 고요하게 멈출 때보다 더 본질적으로, 더 깊이, 자기 자신일 때는 없다. (...) 고요하게 멈출 때 당신은 개인이라는 육체적, 정신적 형상을 일시적으로 취하기 전의 그 당신이다. 또한 그 형상이 소멸했을 때에도 있게 될 그 당신이다. 고요하게 멈출 때 당신은 일시적인 존재 너머에 있는 당신이다. 조건에 물들지 않고, 형상이 없는, 영원 그 자체인 의식이다.

-깨어남에 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인가를 하려고 해도 그것은 깨어남이나 깨달음을 가치 있는 소유물로 추가함으로써 자신을 좀 더 중요하고 크게 보이려는 에고의 시도가 될 것이다. 깨어남 대신 깨어남이라는 ‘개념’을 마음에 덧붙이거나, 깨어 있는 사람이나 깨달은 사람은 이럴 것이라는 정신적 이미지를 추가하고서, 그 이미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혹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그것은 에고가 연기하는 또 하나의 무의식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의 본질은 의식입니다. 의식, 즉 당신이 생각과 완전히 동일화되어 그 본질과 본성을 망각할 때 의식은 생각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에고의 주된 동기인 욕망이나 두려움 같은 정신적, 감정적 구조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 구조물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또한 행위와 사건에 대한 반응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곳에서도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생각, 모든 욕망이나 두려움, 모든 행위와 대응이 허구의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 허구의 자아는 ‘순수한 있음’의 단순한 기쁨을 감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 대용품으로 쾌락과 때로는 고통까지 추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순수한 있음’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래 존재를 잃은 상태에서는 어떤 성공도 지나가는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성취하든 당신은 곧 다시 불행해질 것이고, 아니면 새로운 문제나 딜레마가 생겨 당신의 관심을 모두 사로잡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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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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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는가?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은 삶의 놀이가 일어나고 있는 장이다. 삶의 놀이는 다른 곳에서 펼쳐질 수 없다.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면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라. 자신에게 무엇이 가능한지,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삶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하는지를. 삶의 예술에 대한 비밀, 모든 성공과 행복의 비밀을 전하는 세 단어가 있다. ‘삶과 하나가 되기’이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은 현재의 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삶은 춤추는 자이고, 당신은 그 춤이다.

-일단 일정 수준의 의식에 도달하면 현재의 순간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도 당신이 결정할 수 있다. 현재의 순간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적이 되기를 원하는가? 현재의 순간은 삶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과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일단 현재의 순간과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고 결정하면, 먼저 당신이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것을 향해 우호적으로 다가가,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친구답게 환영하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삶 쪽에서도 당신을 향해 우호적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협조적이 되고 상황도 협력적이 된다. 한 가지 결정이 당신의 현실 전체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 결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한다. 그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방식이 될 때까지.

-현재의 순간을 친구로 삼으려는 결정은 에고의 종말을 의미한다. 에고는 결코 현재의 순간과 사이좋게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삶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에고의 본성 자체가 현재의 순간을 무시하고, 저항하고, 가치를 깎아내리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고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에고가 강할수록 삶은 한층 더 시간에 지배된다. / 그렇게 되면 당신이 하는 거의 모든 생각이 과거 또는 미래와 관련된 것이 되어 버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과거에 의해 결정되며, 자기실현을 미래에 의존한다. 두려움, 불안, 기대, 후회, 죄책감, 분노 등은 의식이 시간에 얽매여 기능장애 상태가 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가장 나쁜 경우는, 이것 또한 매우 흔한데, 현재의 순간을 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싫거나, 상황이 불만스럽거나, 일어나고 있는 일과 일어난 일에 욕을 퍼부을 때, 혹은 마음속 대화가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로 이루어져 있을 때, 비난과 남 탓으로 흘러넘칠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지금’에 반론을 제기하고 이미 그것인 것과 다투고 있는 것이다. 삶을 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삶도 “싸움을 원하면 싸우게 해 주지.”라고 응답한다.

-자신에게 자주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다. “나는 현재의 순간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리고 그 해답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삼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장애물로 보고 있는가? 나는 혹시 그것을 적으로 취급하지는 않는가? 현재의 순간만이 당신이 유일하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이므로, 또한 삶은 ‘지금’과 분리시킬 수 없으므로, 그 질문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삶과 어떤 관계인가?”

-시간은 삶의 수평적 차원, 현실의 표면층이다. 그러나 삶에는 깊이라는 수직적 차원도 있다. 수직적 차원에는 오직 ‘현재의 순간’이라는 입구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시간을 주는 대신 시간을 제거해야 한다. 의식으로부터 시간을 제거하는 것은 에고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영적 수행이다.

 

-현재 순간의 있는 그대로를 의식 속에서 받아들이면 삶의 수직축 차원, 깊이의 차원이 열린다. 그리고 그 수직축 차원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무한의 가치를 가진 무엇인가가, 그렇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고 그대로 파묻혀 있었을 무엇인가가 이 세상 속으로 나온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인 시간의 제거이다. 심리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에고의 마음이 과거와 미래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에고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간을,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직후의 실로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에고는 현재의 순간과 우호적이 될 수가 없다. 게다가 어떤 것도 에고를 긴 시간 만족시킬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혹은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지금’이 취하는 모습들이다. 당신이 내면에서 그것에 저항하는 한, 그 모습들은, 바꿔 말해 세상은 돌파할 수 없는 장벽이 된다. 그 장벽은 모습(형상)을 초월한 당신 자신으로부터 당신을 분리하고, 형상 없는 ‘한 생명’으로부터 당신을 분리시킨다. 형상 없는 ‘한 생명’이 당신의 본래 존재이다. ‘지금’이 취하는 형상에 내면으로부터 긍정을 말하면, 그 형상이 형상 없는 세계로의 문이 된다. 세상과 신 사이의 분리가 사라진다. / ‘한 생명’이 이 순간에 취하고 있는 모습(형상)에 반발하고 ‘지금’을 수단, 장애물, 적으로 여기면 형상으로서의 정체성, 즉 에고를 강화하게 된다.

-형상에 대한 무저항을 통해 당신 안의 형상을 초월한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모두를 아우르는 ‘현존(이 순간에 존재함)’으로서 나타난다. 단기간에 소멸하는 형상 정체성보다 훨씬 더 위대한 침묵의 힘이다. 그리고 형상 세계의 어떤 것보다도 더 깊은 당신 자신이다.

-눈이 아무것도 볼 것이 없을 때, 그 ‘아무것도 없음’이 공간으로 지각된다. 귀가 아무것도 들을 것이 없을 때, 그 아무것도 없음이 고요로 인식된다. 형상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진 감각들이 형상의 부재를 만났을 때, 감각적 인식 뒤에서 모든 인식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 없는 의식은 더 이상 형상에 의해 흐려지지 않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주 공간을 명상 속에 응시하거나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 이른 새벽의 고요에 귀를 기울일 때, 당신 안에서 무엇인가가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그것과 공명한다. 그러면 당신은 공간의 무한한 깊이를 자신의 깊이로 감지하고, 형상 없는 소중한 고요가 당신 삶의 내용물을 채우고 있는 그 어떤 사물이나 사건들보다 훨씬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을 삶의 주된 목적으로 바라볼 때, 당신은 시간을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나큰 힘을 불어넣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시간을 무효화시킬 때, 당신의 내면적인 목적과 외부적인 목적이, 존재와 행위가 연결됩니다. 시간을 무효화시킬 때, 당신은 에고를 무효화시키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 당신은 특별히 잘하게 될 것입니다. 행위 그 자체에 온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신의 행위는 의식이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전화번호부를 넘기거나 방 안을 걷는 일처럼 가장 단순한 행위일지라도 당신이 하는 일 속에 깊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전화번호부를 넘기는 주된 목적은 전화번호부를 넘기는 일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이 전화번호를 찾는 것입니다. 방 안을 걷는 주된 목적은 방 안을 걷는 일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은 방 반대편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책을 집어 드는 순간, 그것이 당신의 주된 목적이 됩니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존재하고, 그것을 통해 당신이 하는 일들 속에 온전히 존재할 때, 당신의 행위에는 영적인 힘이 충만해집니다. 처음에는 당신이 하는 일 자체에 눈에 띄는 변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직 ‘어떻게 하는가’만 변할 것입니다. 당신의 주된 목적은 이제 당신의 일 속으로 의식이 흘러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은 그 행위를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 무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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