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지금 의지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슬픈 게 아니야. 너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가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것이고, 너의 슬픔은, 그 둘을 동시에 취하지 못한 데 대한 슬픔인 거야. 둘 다를 원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부득이하게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슬픈 거라고. 막연히, 네 뜻대로 하고 싶은데 못해서, 무능한 기분이 들어서 슬픈 게 아니라.

 

아무튼 너는 '능동적'으로 선택을 '한' 거야. 너의 의지는 한 번도 좌절된 적이 없어. 만약 네가 좌절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선택을 망설이다 결국 포기하기로 작정한 쪽에 대한 미안함을 덜고자 그런 게 아닐까.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기 위해 현실을 왜곡되게 디자인하고 있는 건 아닌지.

 

너의 선택이 초래한 변화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아니, 애초에 잘못된 상황이란 없어. 물이 흘러가는 걸 봐. 이쪽 방향이 뭔가 불편하다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런 움직임이고. 원망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아니지. 스스로에게 죄를 추궁하고 자기학대할 필요는 더욱 없어. 가만히 흐름을 느끼면서 너의 선택에 충실하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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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an McGinley - Dakota(Hair), 2004

 

지난 해 있었던 일 중에서는 보온병에 담아간 조니워커블루를 홀짝여가며 아시아에서 최고로 빠르다는 에버랜드의 초강력 롤러코스터를 만취상태로 연달아 여덟 번이나 탔던 게 자랑. 몹시도 요란하게 술 냄새를 풍기는 바람에 저 여자 아무래도 술처먹은 것 같다고 안전요원한테 신고당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탑승이 제지되는 불상사는 없었다. 덕분에 왜 음주운전을 하면 안 되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롤러코스터가 77도 각도에서 체감속도 시속 200km로 고공낙하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미역처럼 휘감기는 머리를 우아하게(?) 쓸어 넘기며 에버랜드 야경이 참으로 눈부시다고 실실 쪼개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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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상화 속에
그만 실수로 수염을 그려 넣어버렸으므로
할 수 없이 수염을 기르기로 했다.

문지기를 고용하게 되어 버렸으므로
문을 짜 달기로 했다.


2.
일생은 모두가 뒤죽박죽이다
내가 들어갈 묘혈(墓穴) 파기가 끝나면
조금 당겨서라도
죽을 작정이다.

정부가 생기고 나서야 정사를 익히고
수영복을 사고나면 여름이 갑자기 다가온다.
어릴 때부터 늘 이 모양이다.

한데
때로는 슬퍼하고 있는데도 슬픈 일이 생기지 않고
불종을 쳤는데도
화재가 발생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여 개혁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바지 멜빵만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는 것이다.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 나의 이솝 中에서

 

슬프다. 나의 무능이. 용기가 없다는 것. 매사에 언제나 두렵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결정적 판단을 타인에게 위임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가장 큰 무능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잘 살아가는 것 같다. 나름의 뚜렷한 신념과 주관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미추를 구분하며 기로에서 어느 하나를 명쾌하게 선택한다. 나는 늘 이도저도 아닌데. 언제나 우물쭈물하면서 겁에 질린 듯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이에 있으려고만 하는데. 유보를 위해 유보하고 회피를 위해 회피하며 시간을 벌기 위해 시간을 쓰는 식으로... 욕망은 과하나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가장 큰 무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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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안타까울 정도로 평범한 까닭은 그의 세계가 온통 남을 기준으로 해서 돌아가기 때문이지. 내가 중이병 걸린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결코 이해할 수가 없어. 왜 모든 걸 남을 기준으로 해서 사고하고 판단하냐고. 난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게 남과 똑같이 되어버리는 건데. 나의 고유성이 훼손되는 거. 난 그게 제일 공포스럽던데. 그래서 난 조카를 만나기 전에는 애 낳기도 싫었다고. 나의 2세가 태어난다는 게 생각만으로도 끔찍했어. 이 우주에 나의 아류, 나의 변종이 존재하게 된다는 거잖아. 그게 정말 불쾌했다고. 물론 조카를 보고 나선 생각이 좀 달라졌지만. 물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남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상황이 닥칠 수밖에 없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불가피한 경우이지 결코 추구해야 할 도덕은 아니라고. (...) 상대성의 회로 안에 갇힌 인간은 결국 허무를 견디지 못하고 자멸하고 말아. 인간은 반드시 절대적인 어떤 것을 기준으로 가지고 있어야 해. 남하고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거. 남을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는 어떤 거. 그것이 비록 애처로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말이야. 왜냐하면 그래야 그 자신이 살아나갈 수가 있으니까. 이유는 그뿐이야. 오로지 살기 위해서. 간신히라도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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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왜 그 친구한테 시기 질투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알러지 반응에 가까운 그런 격렬한 적대감까지도 느꼈는가 생각해 보면요. 제가 싫어하는 저 자신의 어떤 저속한 경향을 그 친구가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구현하고 있어서였던 것 같아요. 책을 장식으로 읽는 모습이요. (...) 뭔가를 취미로 한다는 건 결국엔 진실되지 못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진정성이 없는 거라는 생각이요. 허세와 시늉에 불과한 거라는 생각이요. 예를 들면 취미가 독서라는 것도 말이죠. '취미'로서의 독서 활동이라는 게 뭘까요. 심하게 말하면 삶의 귀퉁이를 장식하는 꽃무늬 레이스 같은 거 아닐까요. 삶의 모습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꾸미고 연출하기 위한 장치 같은 거요. 그런 점에서라면 철학책을 취미로 읽는다는 것처럼 역겨운 일은 없는 거 같아요. 앎의 추구를, 진리 추구를 취미로 한다는 거잖아요. 그거야말로 허영의 극치가 아니겠어요. 완전히 제대로 딜레탕티슴인 거죠. (...) 진정성은 있으나 재주가 부족한 인간은 안타깝고 측은하지요. 반면에 제법 귀여운 재주를 부리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진정성이 없는 인간은 역겨워요. 신이 유미주의자라면, 은총은 후자보다는 전자를 향할 것 같아요. 역겨운 인간보다는 가여운 인간에게 훨씬 더 미학적인 구석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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