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가 왜 자기배려라는, 그 흔한 주체라는 용어 대신 자기라는 말을 쓰는지 그거는 이제 여러분들이 이해하실 거 같아요. ‘자기는 항상 변형 가능한 것이고, 또 그 변형 속에서, 사실 자유라는 것이 뭡니까,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자기를 변형시켰을 때, 이전의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변화되는 순간의 그 반짝이는 것이 자유란 말이에요. 자유라는 것은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어떠어떠한 형이상학적인 명상을 통해서, 모든 회의를 거치고 거쳐서 아주 말끔하게 인식의 차원에서 무엇인가를 딱 얻어내면 끝나는 그런 문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한도 끝도 없는 작업이란 말이죠. 그리고 그러한 한 형태를 푸코가 고대 그리스의 주체화 방식을 통해서 발견하는 거예요. 그래서 푸코는 이제 자기와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 개인을 넘어서는 어떤 집단의 지식이라든가 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타진했고, 그러면서 한 발짝 더 나아가다가 죽음을 맞게 된 것이죠."  -심세광 선생님의 푸코 후기 사유 강의 中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금 나의 근무 환경이 업무 강도의 측면에 있어서나 급여 수준에 있어서나 이제까지 내가 겪어본 것 중에서는 객관적으로 가장 나은 편이 아닌가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직업 자체로는 무슨 조건으로 일을 해도 결코 행복하지 못할 거 같다는 확신이 든다. 뭔가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박해지네."

"완전히 다른 길을 찾기보다는 근무 시간을 조정해보는 게 어떨까. 지금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밸런스를 맞춰가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은데. 극단적 혁명이 아니라 수정주의적 조율로..."

(...)

"그래 사실 근본적으로 직장 생활이라는 건 정말 사육 당하는 돼지의 삶에 다름 아니야. 감옥이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가 내면화하게 되는 어떤 세계관이라 할 만한 게 있다면, 일이란 인간의 천형이며 인생은 출구 없는 감방이고 세계는 절망으로 가득찬 지옥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점점 더 자꾸만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생각을 가진 철학자들 책을 찾게 되는 것 같아."

(...)

"어쩌면 처음부터 창문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아니, 애초에 창문이라는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행복한지도 몰라. 창문 너머 들판을 봐버린 것이 내 고통의 시작인지도."

(...)

"<프레카리아트>라는 책 한 번 읽어봐. 일본 젊은이들의 실태를 쓴 책인데, 불안정한 노동이 어떻게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지 생각해보게 되네."

"재밌겠는데. 어떤 자율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 가능성을 일본에서 출현한 그 프리터라는 신종 노동 형태에서 발견하기도 하던데, 그러나 내가 직접 프리터로 살아본 바로는 21세기 프리터도 19세기 프롤레타리아 못지 않게 미래가 안 보이는 암담한 인생 같더구만."

(...)

"그리고 난 아직 애도 안 낳았지만 벌써부터 뭐가 걱정이냐면, 이 모든 직업적 고민=존재론적 고민=자유와 행복을 찾기 위한 고민의 방점을 자식으로 찍어버리는 것- 그래서 오로지 애를 키우기 위해, 그러니까 유전자 보존과 개체 번식이라는 지극히 생물학적 본성에 충실한 나머지 자진하여 감옥에 입소해 스스로 뇌를 제거해버리고 기꺼이 체제의 관리에 따르는 한 마리 양순한 가축이 되어버릴까봐, 좀비가 되어버릴까봐 그게 벌써부터 걱정이 돼. 그래서 난 <모성애의 발견>이랑 <어머니의 탄생> 막 이런 책들을 벌써부터 사놨어. 나중에 태어날 내 자식한테 쉽게 매혹당하지 않기 위한 자기최면으로다가. 자식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니까 면역력을 보강하기 위한 일종의 지적 백신으로서 벌써부터 미리 몇 권을 쟁여놨다고. 그 책 보면서 최소한이나마 자식과의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

"주위 여자들을 보면 확실히 애한테 빠져버리는 순간 인생 훅 가는 듯. 대부분의 향락은 시효가 지나면 대체로 빠져나오기 마련인데 애한테 빠지는 건 도무지 답이 안 나오더라. 자식이야말로 종교에 육박하는 블랙홀인 거 같다-_-;;;; 종교든 자식이든 치명적인 외간남자든 돈이든 뭐든 뭘 만나도 끝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놓치지 않으면서,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 거 같아."

(...)

"남편이든 아이든 사회 자체든 나에게 다정한 눈빛을 보내면서 특정 지위를 명명하고 역할을 기대하는 그 어떤 대상에게도 절대로 함부로 간이고 쓸개고 영혼이고 모조리 내어주지 않으면서도, 그러면서도 또한 그 모두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적당히 발란스를 맞추면서 어떻게 살아나갈 건가 하는 고민을 앞으로도 계속해봐야 할 듯. 확실히, 직업인으로서의 사회적 정체성과 가족 공동체 부양의 한 축을 담당하는 누군가의 아내라는 정체성, 그리고 훗날 누군가의 엄마라는 정체성... 이런 여러가지 다양한 외적인 자기 정체성들과 내밀한 개인적 자아를 서로 반목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한 다양한 역할 또한 나에게 명백히 성취감과 즐거움을 주고 비록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주니까. 아무튼 내가 관계 맺는 세계와 조화롭게 상생하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의 고유성을 심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동시적으로 추구해나가는 그 절묘한 방법과 기술을 모색해나갈 필요가 있는 듯."

"그래 그걸 깨달아나가는 게 성숙의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 

"남편을 보면, 남편한테는 일이 정말로 삶의 의미거든. 직장인으로서는 드문 경우겠지만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그 분야의 일을 진심으로 좋아해왔고 지금도 자기 일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근데 이 엿 같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무섭도록 효율적이고도 잔혹한 게,? 니가 그 일을 좋아한다고? 어어 그래 너 그 일 정말 좋아한댔지? 그럼 졸라 죽을 때까지 해봐.’ 이런다. 자본의 시스템이 남편을 이렇게 겁박하고 착취한다고. 그니까 심지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도 이 체제가 결국에는 개인을 최종적으로 너덜너덜하게 만든단 말이야. 근데 내가 옆에서 남편을 보면 남편도 그 안에서 여차저차해서 자기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는 게 보여. 내가 남편 보면서 느낀 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든 그게 아니든 간에 누구나 사회의 겁박은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거 같고, 때문에 자기소외를 겪지 않을 만큼의 지점을, 각자의 고유한 자기균형점을 잘 찾아나가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인 것 같아. 나중에 애 생기고 나서 더욱 더 집 문제, 교육비 문제로 허덕이고 그러면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발적으로 기꺼이 정신적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노동을 자처하게 되는 서글프고도 기막힌 상황에 봉착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럴수록 하루하루 나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려고 노력해야 할 것 같아. 결코 좀비가 되어서는 안 될 거 같아."

(...)

"가능하기만 하다면, 오로지 전적으로 창작 활동으로만 생계를 해결하는 삶이 가장 이상적일 텐데."

"그렇지. 나도 자식 낳으면 정말이지 돈도 벌면서 창작하는 직업을 갖도록 세뇌시키려고. 매뉴얼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행정직이나 기술기능직 쪽으로는 절대로 못 가게 하려고. <어머니의 탄생> 같은 책을 정신적 백신이라면서 벌써부터 장만해서 책장에 꽂아두어 놓고서는 또 한편으로 이런 정신분열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니 나도 참 딱하지만, 일단 내가 생각해놓은 직업은 피디랑 기자야. 창조적으로 글쓰고 프로그램 만들면서도 잉여가 아니잖아.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로서 뚜렷한 직능을 발휘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와 불화하지 않고 상생해서 돈을 벌잖아."

"기자도 창작하는 직업은 좀 아니지 않나-_-;;;"

"그래도 글을 쓸 수 있는 삶이 너무 부러워. 글 쓰고 생각할 수 있는 삶이... 윗선 눈치 보느라 글을 내맘대로 쓰지 못한다는 그런 푸념마저도 부럽다고. 배부른 고민으로 들린다고. 그런데 아직 애도 안 낳아놓고 벌써부터 내 욕망을 미래의 자식에게 투사하기 시작하는 나도 참 별 수 없네-_-;;; 엄마의 욕망, 이게 진짜 무서운 거 같다. 프링글스도 아니고 정말이지 멈출 수가 없네."

 

*

 

친구와 간밤에 카톡으로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비록 사적인 주제이기는 하지만, 오래도록 기억해두고 싶어서 이곳에 일부 옮겨본다. 간밤의 이런 이야기에 비하면 내가 그간 서재에 끄적여둔 영화 리뷰며 현학적인 책에 대한 요약문 따위는 도무지 삶의 주변만을 에두르는, 삶의 변죽만을 울려대는, 등 따숩던 호시절의 허영스런 소꿉질 밖에 안 되는 것이다. 팔불출 같지만 친구 자랑을 좀 하자면 카톡 주고받은 이 친구는 스무 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는데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녀의 당선 소감문이 당선 작품보다 더 근사하게 읽힌다

 

어린 나이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젊은 날에 일찍 지쳐 시들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절대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중세 영국의 사회제도는 지금의 대한민국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지만 저는 오이디푸스를 동정하고, 줄리엣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신기한 일입니다.

 

하늘이 있고 달이 있습니다. 별이 있고 바람이 있습니다. 소리가 있고 쓰레기가 있습니다. 낙엽이 있고 택배 배달 아저씨도 있습니다. 지하철이 있고 친구가 있습니다. 우정이 있고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김광섭 시인의 말마따나, 사람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모두 아름답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지금 창밖에는 아무래도 추운 바람과 차가운 공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 제가 사랑하는 사람, 저를 고마워하는 사람, 제가 고마워하는 사람, 저를 미워하는 사람, 제가 미워했던 사람, 저를 원망하는 사람, 제가 원망했던 사람, 저를 싫어하는 사람, 제가 싫어했던 사람,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어떻게든 마주쳤던 사람들, 오늘 아침 버스에서 본 해해 웃으셨던 할아버지까지, 그리고 제가 미처 만나지 못했던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모두들 행복한 한 해, 더 나아가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그러길 바랍니다.

 

두 번째 문장이 유독 아프다. 이런 아름다운 글을 쓸 줄 아는 내 예쁜 친구가 정말로, 젊은 날에 일찍 지쳐 시들어버리지 않길. 마찬가지로 나도 당신도 그러하길. 시들지 않으려면 친구의 말마따나 노력을 해야한다. 집요하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라파엘 2014-12-1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솔직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참 감사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수양 2014-12-18 18:43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한 일이지요... 이 친구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 예술적 재능... 이런 것들이 활짝 꽃피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늘 응원하는데... 옆에서 지켜보면... 등단하기도 쉽지 않지만 등단하고 나서도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더라구요...

꼼쥐 2014-12-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에게 일이 삶의 의미라기보다는 일이 없어지는 순간 자신의 삶이 완전히 무너지는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어요.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죠. 사회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을 것만 같은 불안감, 그런 게 있는 거죠.

2014 서재의 달인이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

수양 2014-12-22 07:51   좋아요 0 | URL
꼼쥐님, 저도 축하드립니다. 너무너무나요!! 벽에 가만히 귀를 갖다대고 있으면 옆방에서 나직이 말소리가 들리지 않겠어요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것만으로도 따스한 위안이 됩니다. 온기를 느낍니다. 어쩌면 그 온기로 올해도 살았던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계속 이곳 알라딘에서 동고동락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15-01-21 0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2 0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옛 친구에게: 결혼이란,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나이 서른 넘어서의 결혼이란, 근본적으로 생존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 같다. 결국 우리는, 근본적으로는 말이야, 자신의 생존에 이롭다고 판단된 자와 결혼 제도를 활용하여 전략적으로 결탁하는 게 아닐까. 너와 내가 헤어진 것은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생존에 해롭다고 파악했기 때문이겠지. 지금 하는 이 말에는 절대로 냉소가 담겨있는 게 아니다. 생존에 대해 왈가왈부할 때 감히 냉소를 머금을 수는 없는 일이지. 생존은 절대적이고 숭고하며 절박한 무엇이니까.

 

아무튼, 너의 감각을 활성화시키고 생의 지평을 확장시킬 만한, 아니다, 적어도 그러한 네 생명활동을 ‘방해’하지 않을 만한 인간을 찾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너를 (네가 미처 사전에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얼마나 방해했던가? ㅎㅎ 무엇보다도 정신과 생활의 두 영역에서, 혹은 자유와 의무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나가는 일이 중요할 것 같다. 네 고유의 생명활동을 위축시키지 않으면서 거기서 더 나아가 네 삶의 균형 감각을 적당히 증진시켜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너무 이상적인가? 하지만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장기적으로 잘 생존하기 위한 것이니.
     
2 독서를 추동하는 내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가? 혹은, 나는 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도록 형성되었는가? 한마디로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하는 의문. 여기서 ‘나’의 범주는 좀 더 확장될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인식하는 나 자신의 문제가 아닐까. 확실히 나는 불만 종자인 듯. 어쩌면 나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나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납득하고 수용하기 위해서, 책을 읽어나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도록 형성된 내 삶을 아주 오래 전부터 이미 받아들였는지도. 그리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합리화시키기 위해 책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3 "내가 사랑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에 관해서 이 사회는 철저히 무관심하지. 오로지 내가 사회적 개체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분야, 즉 체력적으로 쉽게 방전되지 않으면서 장시간을 오류와 실수없이 정확히 처리해낼 수 있는 업무의 분야가 무엇인지만이 관심사일 뿐, 내 사정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의 선호와 흥미에 사회가 화답해줄 거라는 기대부터가 유아적 망상이겠지만, 그래도 소름끼쳐. 개체의 능력을 냉엄하게 측정하고 평가해서 적재적소의 좌표에 위치시키는 이 정교한 배치의 시스템이."

 

"스터즈 터클의 <일>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7~80년대 미국에서 웨이트리스, 연주자, 야구선수, 미장이, 주식중개인 등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인터뷰를 한 책이거든. 근데 다들 그때도 판에 박힌 삶에 소름끼쳐 하고... 그나마 나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이더라, 연주자라든지 건설노동자라든지... 아니면 노동의 강도를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이거나...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최소한 쓸모없지는 않았다고 평가하더라고."

 

밥벌이의 지겨움을 주제로 친구랑 주고받은 카톡 대화 내용 중에서. 최소한 알라딘 서재에서만큼은 직업적 자아로부터 벗어나서 다른 인격체, 다른 자아, 다른 정체성으로 살고 싶다. 간절히! 블로그까지 업무 관련 내용으로 가득 채워 밥벌이 수단으로 삼는 이들을 보면 존경을 넘어 경이를 느낀다. 아니 어떻게 저토록 순정적일 수가 있지. 아니 어떻게 인간으로서 저토록 단 하나의 차원만을 가질 수가 있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돌이켜보면 철학책 읽을 때 강독 수업, 온라인 강의, 세미나 중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매개는 세미나였던 것 같다. 삽질도 많이 하지만 그만큼 남는 게 있다. 온라인 강의나 강독 수업이 뜨뜻한 아랫목에 누워 할머니가 생쌀을 꼭꼭 씹어 미음으로 만들어 준 것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기분이라면, 세미나는 허기진 친구들과 직접 야산에 올라 여기저기서 굴러 떨어지면서, 떨어지면 서로 손 내밀어 부축해주고 하면서 칡뿌리 같은 걸 캐먹는 기분이다. 무식하고 야만적이다. 험난하고. 먹고 나서도 내가 좋은 걸 제대로 먹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래도 일단 야산에 한번 올라갔다 오면 나 자신이 조금은 뭔가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야산에서의 즐거웠던 추억들- 그또한 삶의 뜻깊고 다정했던 한 시절로 영원히 마음 한 켠에 새겨지는 것이다. 생활이 안정되고 나면 다시 세미나 모임에 나가보려고 한다. 푸코를 읽을 것이다. 모임에 가보면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체제 전복을 꿈꾸는 백수, 자퇴 청소년, 대학원생, 퇴직한 어르신, 주부, 시인, 선생님, 회사원, 의사, 심리상담가, 설치미술가, 그 외 정체불명의 인물들, 그리고 나- 보르헤스의 중국백과사전에 실려 있을 법한 조합이 아닌가. 이런 어중이떠중이, 아니아니, 재야인사들과 더불어 다른 누구도 아닌 푸코를 함께 읽어나간다는 거야말로 의미있는 일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의

 

                            조연미

 

 

손바닥으로 찬찬히 방을 쓸어본다
어머니가 자식의 찬 바닥을 염려하듯
옆집 여자가 울던 새벽
고르지 못한
그녀의 마음자리에
귀 대고 바닥에 눕는다
누군가는 화장실 물을 내리고
누군가는 목이 마른지 방문을 연다
무심무심 조용하지만
숨길 수 없는 것들을
예의처럼 모르는 척 하는 일상
아니다, 아니다 그러나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몸의 뜨거움으로
어느 귀퉁이의 빙하가 녹는지
창 너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또 잊혀지는 것들이 생기는 것이다
뻔하고 흔한
세상의 신파들 사이를 질주하며
이번에는 흥청망청 살고 싶어요 소리치며
눈은 내리고
가지런히 슬픔을 조율하며 우는
벽 너머의 당신
찬 바닥에 기대어
누군가의 슬픔 하나로
데워지는 맨몸을 가만 안아본다 

 

큰 시험을 앞두고 학교 앞 고시원에서 5개월 정도 살았던 적이 있다. 내 앞방에는 동기 친구 하나가 투숙했는데 시험이 목전이라 자주 만나 수다를 떨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애가 조심히 문을 여닫는 소리, 소지품을 뒤적이는 소리, 이불 덮는 소리 그런 게 참 좋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바로 그 소리들 때문에 그토록 추웠던 시절을 무사히 잘 견뎌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수많은 블로그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고시원 같아서 외로운 사람들이 저마다 각자의 방에 오도카니 앉아 지치지도 않고 연신 무어라 끝없이 읊조리는 것인데, 손바닥으로 찬찬히 방을 쓸어보듯 나도 남의 방에 들어가 글을 읽어보다가 오늘 문득 누군가의 슬픔 하나로 나의 맨몸이 데워져서는, 오랜만에 이 시가 생각이 났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4-10-15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15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