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내가 구경하는 블로그계(界)는 크게 알라딘 서재계와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계로 양분된다.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란 쉽게 말해 텍스트보다는 이미지 위주의 ‘가정생활 생중계 블로그’라고 할 수 있다. 아낙네 블로그들의 공통적인 대서사는 결혼 준비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혼수는 뭘 했고 결혼식은 어디서 어떻게 했으며 신혼여행은 어디로 다녀왔는지, 신혼집은 어느 동네에 얻었고 내부 인테리어는 어떻게 완성하였는지, 출산은 어떻게 이루어졌고 육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오늘 차려올린 아침상의 형태는 어떠했으며 오늘 산 물건들은 무엇인지를 사진으로 낱낱이 찍어올려 현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낙네 블로그계의 문화이자 관습이자 질서이자 코드이다.
어느 계에서나 남들이 함부로 따라할 수 없는 희소가치를 선보이는 사람들이 주목받고 핵심인물이 되는 것은 공통적인 풍경이다. 알라딘서재계에서 흔히 문화자본 내지는 학적자본을 많이 가진 지식인들이 유명세를 얻는다면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계에서는 경제자본을 많이 가진 부자 아낙네들이 짱 먹는다. 아무리 표면적으로는 소소한 일상 생활을 표방한들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오늘은 화장실 변기를 청소했다면서 올리는 사진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장실 변기솔이 까마득한 금액대를 자랑하는 유럽산 무슨무슨 희귀 변기솔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건 비단 변기솔 만의 사안은 아니다.
한마디로 소소한 가정생활을 보여준다는 건 결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좀 과격하게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면 경제자본을 가진 소수가 프롤레타리아들에게 행사하는 비물질적이고 상징적인 폭력이며 의식 지배의 전략인 것이다. 폭력은 절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그리하여 폭력의 악순환이 발생한다. 과시적인 물질생활의 현시와 그걸 구경함으로써 발생하는 배아픔이라는 감정- 이것은 명백한 영혼의 상처다. 그러나 사회화 기능만 과도하게 발달한 멍텅구리 아낙네들은 이 모든 게 너와 내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거대한 폭력의 구조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텔레토비처럼 마음에도 없는 칭찬 댓글이나 달면서 속으로는 질투에 이를 간다. 좌절감과 질투심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들은 보다 더 강력하고 자극적인 (하지만 반드시 자연스런 일상생활인 것처럼 연출될 수 있는) 경제자본의 과시를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이뤄낼 수 있을지 골몰한다. 왜냐면 그렇게 골몰하여 주기적으로 경제자본의 과시를 해줘야지만 블로그를 면벽수행하지 않고 존속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일상 생활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하에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제자본의 노골적인 현시, 그로 인한 배아픔, 시기, 질투,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정신적 상처, 상대보다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좀 더 강력한 또 다른 과시의 소재를 발견하기 위한 발버둥... 이 모든 사이클이 내게는 정말이지 하나의 거대하고 슬픈 폭력의 구조로 느껴진다. 그래서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계에 오래 머물러 있다 보면 폭력적인 과시 문화 때문에 피로도가 쌓여간다.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영혼이 만신창이가 된다. 처참해진다.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 특히 부잣집 아낙네 블로그들을 구경하고 있으면 내가 아무리 물질적으로 저 여자처럼 살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점차 명백해진다. 나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내가 매니큐어 발색샷이나 다녀온 휴양지에 대한 후기, 쇼핑한 물품 사진들을 올리면서 네이버 아낙네들 스타일로 블로그질을 하지 않는 까닭은 물질욕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나의 경제자본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네이버 아낙네 스타일로 블로그질을 했다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컨텐츠가 풍부한 블로그가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게임에 뛰어들기 전에 미리 기권을 한 셈이다. 열심히 해도 바람 빠지는 놀이 따위는 애당초 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자발적으로 기권하여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질을 안 하는 것까지는 그렇다치자. 그럼 나는 왜 보고 나면 기분이 찝찝, 아니 쓸쓸해지는데도, 영혼이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부잣집 아낙네 블로그들을 염탐하는가. 내 몹쓸 관음증의 원인은 뭔가. 경제적 자본에 의한 의식 지배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굴욕과 비참과 쓸쓸함과 초라해짐을 견디면서까지 나 자신의 경제능력으로는 획득이 불가능한 별세계의 향락을 간접 체험이라도 하고 싶은 구차하고도 애절한 욕망 때문인가? 응. 그런 듯. 이렇게 쓰고 보니 나 자신이 한심해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측은하게도 느껴져서 셀프로 토닥여주고 싶네?
반면에 알라딘 서재는 허기지지는 않다. 눈에 확 들어오는 즉각적인 쾌락은 없으나 머물러 있다 보면 은근한 포만감이 생기는 것 같다. 만약에 책이라는 것도 어떤 책은 오십 만원, 어떤 책은 이천 원, 이렇게 되어버리면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계랑 똑같은 폭력구조가 형성되어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는 책값이 (그것이 주는 정신적 쾌락에 비해 터무니없이) 저렴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저렴한 책값 덕분에 알라딘 서재계는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계에 비하면 상당히 민주적인 체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누가 만 원짜리 책을 하나 읽고나서 이 책 참 재미있다고 말하면, 그럼 나도 만원 내고 사서 보면 된다. 만원이 없으면 도서관 가서 빌려 보면 되고. 확실히, 음악이나 책 분야만큼은 소비가 곧바로 계급을 반영한다고 전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알라딘 서재계에서도 당연히 문화적 지적 자본의 전시가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지적 프롤레타리아인 내가 피부로 느끼기에) 시기나 질투, 열패감 따위의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집중해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 머리의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언젠가는 독해할 수 있다는 사실, 설령 그것이 오독일지라도 나에게 지적 영감을 준다면 어디까지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오독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적 자본의 경우에는, 노력하면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향유할 수 있다는, 어떤 경험적 확신이 있기 때문에 질시가 안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애당초 근본적으로 지적 자본은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게 아니다. 누군가의 지적 자본의 현시에 노출되는 상황은 뒤집어 말하면 내가 그 지적 자본을 섭취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건 애당초 폭력이 아니라 공유(共有)이고 베풂이며 은혜인 것이다.
책이라는 것이 다른 재화에 비해 가격의 문턱이 높지 않아 의지만 갖는다면 얼마든지 그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민주적인 측면. 독점적이지 않은 지적자본 자체의 속성. 이외에도 알라딘 서재계가 보다 덜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또 하나의 원인을 생각해보면, 이 집단 만의 어떤 특수성일 수도 있겠는데, 알라디너들에게 발달한 인문학적 감수성이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책을 가까이 하는 다른 여느 식자 집단에서도 얼마든지 지적 위계에 따른 폭력, 지적자본이 폭력으로 행사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알라딘 서재계가 그렇게 피곤하지 않은 건, 그렇게 저열하고 천박하지 않은 건, 알라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인문학적 윤리감각이 기본적인 소양으로 깔려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