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철학 - 소크라테스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까지 SF 영화로 본 철학의 모든 것
마크 롤랜즈 지음, 조동섭.한선희 외 옮김, 신정근 감수 / Media2.0(미디어 2.0)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이 책이 sf에 관한 철학적 탐구인줄 알았다.  헐리우드의 상업공상영화에서 그나마 다른 이야기꺼리를 찾아 또박또박 말해주지 않을까 해서 구입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속았다.

저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를 이용했지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철학을 이야기하려고 영화를 들먹인것에 불과하다. 그가 말한 것은  <철학개론>을 읽으면 되는 것이다. 구지 영화를 들먹인것은 이목를 끄는 효과만 바란것이다.

과연..철학적으로..그리고 영화를 이용하지 않고 본다는 것은 가능할까.. 영화의 텍스트의 요소는 한가지 철학적 통찰을 말하기엔 때론 산만할 정도로 구성요소가 많을수도 있고 지나치게 상업적일수도 있다.

저자가 영화의 평으로 이렇다고 말할때는 실소를 감출수 없다. 확실히 저자는 영화에서 철학으로 빠지는 샛길을 발견하는 법은 탁월할줄 모르지만 텍스트로 비평하는 것은 기대이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보슬비 > ‘흑과 백, 점과 선’, 동양화 같은 사진들

마이클 케나의 사진은 보는 사람들에게 한 폭의 수묵담채, 즉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그는 이 동양화 같은 사진 속에 인간과 환경의 만남, 그리고 그 둘이 함께 어우러지며 남긴 섬세한 흔적을 담아낸다. 이것들은 곧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그의 주제의식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주변 환경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그리고 이 땅에 우리가 남기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가 행한 일들의 자취를 찍고 싶고, 그런 행위들로 인해 남겨진 분위기를 사진에 담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사진으로 기록된 리얼리티는 다른 예술 작품들보다 역사를 가장 가깝게 표현한다.”

그는 디지털기기나 컴퓨터를 이용해 사진작업을 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런 기기들이 사진과 실제 이미지 사이의 연결고리를 훼손하기 때문이란다. 이처럼 그는 문명시대에 애써 까다로운 방법을 쓰면서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흑백의 풍경사진들을 찍어낸다. 그리고 그 사진으로 역사를 기록한다.

특이한 점은 그가 이미지들을 때로는 과감히 생략하고 때로는 살짝만 드러내 보이면서 만들어내는, 단순하면서도 어슴푸레한 작품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각기 다른 흑과 백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같은 표현방식으로 창조된 작품들이 보는 사람들마다 밝은 분위기로도, 어두운 분위기로도 제각각 다르게 다가간다는 것.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는 최근작인 일본 홋카이도의 아기자기한 겨울풍경시리즈와 초기작품인 북잉글랜드의 잿빛 하늘과 어우러진 발전소시리즈가 함께 소개된다. 홋카이도 풍경은 한층 더 절제된 서정성을 보여주고 있고 발전소의 모습들은 강렬한 위협 가운데 짙은 여운을 던져주고 있다.


 

 

하얀 숲(White Copse,Wakkanai,Hokkaido,Japan,2004)

 

랫클리프 발전소(Ratcliffe PowerStation,Study54,Nottinghamshire,England,2000)

 

나무 열 그루(Ten Trees,Peterhof,Russia,1999)

 

언덕 위 나무(Hilltop Trees,Teshikaga,Hokkaido,Japan,2004)

 

랫클리프 발전소 2(Ratcliffe PowerStation, England,1987)

 

7개의 막대(Seven posts in Snow,Rumoi,Hokkaido,Japan,2004)

 

8각형 웅덩이(Octagonal Basin,Sceaux,France,1996)

 

밤 그림자(Night Shadow,St.Malo,France,20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산골마을 작은학교
김은주 외 지음 / 소나무 / 200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랫만에 담백하고 소박한 책을 봤다.

이 책은 사계를 쫒아 분교를 찾아가고 그 학교와 아이들, 마을사람들, 그리고 그 고장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곳에는 도시의 학교와 전혀다른 학교가 서있다.

책속의 분교는 작고 언제 없어질줄 모르는 학교이고 사람들이 바라던 정분이 있는 교육이 있고 도시와 다른 사연을 가진 순박한 아이들이 있는 곳이다. 도시인들은 세상이 빠르게 질주해서 놓쳤던 것들이 어딘가 소중히 그것도 그래로 보존되어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분교는 도시인들의 감성충전소가 아니라 대안적 교육의 장으로 다시 꿈을 꾼다. 빠르게 질주해서 놓친것을 하나씩 주어가면서 오류를 피해가는 것이다.

작은학교에서 배운것이 커서도 무가치한 것이 되지 않는 사회가 될수 있도록 하는것이 어쩌면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과제가 아닐까 싶었다. 읽은이 모두 책속의 아이들이 멀리 떨어진 아이나 나와 전혀 상관없는 아이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나부터 해서 중요한 결핍의 요소가 자연속의 소박하고 스스럼 없으며 해밝음이 아닐까 싶어  책을 덮으며 연거푸 한숨을 들이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얀능선에 서면
남난희 지음 / 수문출판사 / 1990년 2월
평점 :
품절


사실 여자라는 이유때문에 못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남난희씨는 그런 면에서 나보다 용감하고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그녀는 단독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했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속을 뚫고 말이다.

이 책은 참 순수하다. 여러사람의 주민번호가 그대로 적혀있고 80년대의 안보분위기가 깊은 산골에서도 사람을 감시하게 했었고 순박한 사람들이 늘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도 그렇치만 한때 시간과 금전이 허락하면 산을 향했던 적이있었다.  일기형식의 이책에서도 공감하는봐 지만 산에서는 공동된 체험이 사람을 기다린다.

그 체험은 사람은 자연속에 완전히 동화될수 없다는 점, 고된 산행을 하면서 드는 갖가지 생각과 후회, 자신의 의미와 무의미사이에 갈등,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독립,  야영을 하면서 드는 상념과 몇번씩의 마디잠과 예민해지는 오감, 다른 시간의 패턴 그리고 관망의 산과 산속의 산이 틀리다는.. 그런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고된 산행을 의문하고 다시 힘을 내고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왜 그 고된 일을 하게 되었나.. 내가 걸었던 길이 그녀의 길에 비해 터무니 없이 짧고 쉬운길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알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연약한 마음과 상처을 위해 굳은살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지금껏 보고 들은, 겪었던 것은 무의미하고 마음에 전혀 결을 만들지 못하고 상처로만 있었고 자신의 온전한 역사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그 역사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말이 없고 누구든지 받아들이는 산에서 말이다. 산은 두가지 면에서 굳은살을 만드는 훌륭한 장소이다.  산속에서는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고 그 끝에 관망은 위로와 시와 노래를 준다. 사람에 대해 격리시키고 다시 사람을 그리게 한다. 독립시키고 인연을 맺게한다.

이렇게 두가지 반대의 모습에서 산을 걸으면서 생기는 무늬와  낮가림으로 사람에게 분리된 사람에게 인연을 주고 자신과 비슷한, 그리고 아픔을 아는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산은 훌륭한 선생이고 주선자이다. 산행은 저자가 말하듯 고문, 죽음, 고통을 연상시킨다.  삶의 대리체험으로 풍부한 수사학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특성으로 삶에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며 산다.  사람이 아닌 산에서 그런 것을 찾는 지은이가 왠지 나와 같은 분류일까 생각해 봤다.  저자가 말하듯 사람과 함께 산을 가고 살고 싶다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열병처럼 번진 책을 읽는 것은 비단 책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었던 사람까지 생각하게 된다.

해서 일부러 나중에 읽는다.

 <칼의 노래>는 허무의 노래다. 그리고 독백의 노래다.

무수히 되뇌이는 무의미는 필연적으로 독백의 내면을 가지고 자신의 역사성을 긍정할 마지막 적을 찾는다. 작가가 이순신을 만나게 되는 것은 그래서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필연이었다.

자신의 역사성은 계속해서 무의미의 확인과 자신의 무의미의 확인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적사이에서 변증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타인은 자신의 의미를 알수 없을 만큼 알수없는 그 무엇이다.

타인은 적이되거나 알수없는 서사를 가진 내주변의 행성이 될뿐이다.  세상이 혹은 스스로 무의미의 자신이 된 사람의 거처는 어디일까?  마지막으로 숨어있고 생각할수 있고 꿈을 꿀수 있는 곳은 내면이고 그것의 독백 즉 자신의 노래이다.  자신의 노래가 누구에게라도 들을수 있게 되는 공신력을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적을 적으로 만들수 있는가. 그건 자신에게 알수 없는 적의로 몰려드는 적인데 공신력과 적의 정의사이에서 발견할수 있는 것은 이미 작가가 경험한 적이다. 모든걸 무의미하게 했었던 적이 다시 적이된다.

글은 피곤하고 나른하고 덤덤하다. 자신의 일에 감정과 생각이 온전히 집중되는 것은 없다. 이런 산만한 집중력은 독백속에는 또다른 독백이 되는데 이것이 작가의 말이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망망대해에서 개인은전투선이 되어 물결에 떠가듯 그리고 괜히 덤벼드는 적선을 격침시키고 어디선가 침몰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순신의 칼을 보며 허무의 바다에서 움직일수 있는 추진력을 얻은 것을 노래한 것이다.

단문과 쉽게 읽는 것 말고도 많은이들이 책을 읽고 번져간 이유가 혹시 자신의 고독한 내면을 위해 작은 정당성과 함께 자신만을 위해 자신만을 알고 있는 노래가 필요해서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