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
프란츠 요셉 녹케 지음 / 천주교바오로회관(재단) / 1998년 4월
평점 :
품절


<가톨릭 사상총서>를 내는 의도가 좋은것은 발견하고 지난 생각과 지금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이지 싶어 책을 들었다. 정리라 함은 아무래도 정체성을 다듬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내심 가톨릭의 <강조점>을 기대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은 분량에서 얼마나 함축적이고 색깔을 낼수 있을까..역시 대략적인 울타리와 소개가 주를 이루고 저자의 생각이 틈틈이 고개를 내민다.

많은 사람들이 <종말>이란 것을 들으면 무엇을 먼저 떠 올릴까? 지하철에서 외치는 불신지옥과 예수를 안믿으면 나쁘게 판결되는 <심판>을 말할까..천국,지옥, 심판, 부활...

비단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종말론에 관한 책을 봤던 사람들은 전작 사람들이 말하는 낙원의 천국과 불구덩이의 지옥을 그렇게 눈길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세인들에게는 종말이 왜곡되어 알려져 있고 교회내에서도 종말론에 관한 내용이 심도 있게 공표되지 않다는 걸 경험적으로 실감할 것이다.

책은 과거부터 종말과 천국과 지옥, 부활, 심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사상을 대략적으로 정리해주고 주요한 신학자들을 소개해 준다. 종말론에 국한해서 보자면 <신 스콜라 학파>부터 테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의 점진적 진화론, 불트만의 실존적 해석, 몰트만의 <희망신학>, 해방신학등을 차례로 열거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드문드문 외경도 자료로 소개하는데 학문적 접근정도로 이해했다. 더군다나 이해를 돕기위해 간단한 그림까지 있어 도움이 되었다. 학자들중 가톨릭쪽 사람들이 조금더 포진했다는 것 정도는 헤아려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런 종말론에 관한 책을 읽은다면 정말 당황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말론이 엉뚱하게도 희망과 정화와 관련이 있으며 부활과 지금과 관련이 있으며 지옥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다른 내용일수 있으며 영원히 산다는 것의 의미도 풍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는 것은 일회성의 소중한 삶의 한순간 순간이 소중하고 희망과 의미, 정화로 가득차서 인간에게 짐지어지는 억압과 위선, 폭력등을 이겨내어야 한다는 <구원>이면서 <희망>인 것을 바라봐야 한다는 걸 느꼈다. 그것은 이 책에서 잔치와 혼인등으로 비유되는 하나님의 선물이겠다.

종말론의 다른말은 아마 희망론이고 구원론이며 정화론이 아니지 싶다. 저자는 <종말론은 무엇을 희망할 수 있고 무엇이 위험한 것인지를 말하고자 하고 말해야 한다. 종말론은 여정에서 그 희망을 지시하는 것이지 그 끝에 미리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새삼 그 희망에 지금이 충만해지고 정화되고 의미있게 되고 싶다는 바램이 간절해 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엽편소설은 표정이 느글느글거리면서 웃고 있다.

즐거워서 웃고 있는 건가? 아니면 웃고 있을수 밖에 없나? 아니.. 작가는 웃는척 하면서 이야기를 할뿐이다. 왜냐하면 작가는 처절하고 냉혹한 현실에 넌더리내고 있기때문에..어떻게 보면 화내는 형식으로는 버틸수 없고..그럴 에너지도 없어 보이기때문이다.

이 소설은 웃기게 그리고는 있지만 하나도 웃기지 않는 소설이다.

작가는 인생살이의 방법도 말하면서 지금의 현실도 말한다.  현실에서 기반을 두고 사람살이를 말하지 않는 것은 폼잡는 형이상학밖에 안된다.

짧은 풍경의 공통점들을 상기해 보면 이렇다.

그것은 표면과 실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형님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한번도 누구에게 잡아줌을 받지 못했던 자들이지만 선한 사마리아 같고..<어제의 용사>처럼 얌전한 노인들은 실은 군바리정신에 충실해서 약점을 노리는 자들이고,  <훈수족>들은 선의 충고가 아니라 폭력을 일삼는 자들이다. <우리 동네 전문가>는 실상 타인것을 훔치는 사람일뿐이다.

겉모습과 다른 어이없는 실상을 가진 현재의 모습은 다름아닌 지금의 한국의모습이다. <시베리아에서 곰 잡던 시절.>처럼 엉터리로 지어낸 현실로 자신들을 위장하는 모습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이런 살벌하고 넌더리나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딸기>처럼 농약을 쳐야 먹고 사는 사회,<미안하다고 했다>처럼 상하의 관계, 선후배의 관계가 죽을때까지 따라다니고 폭력이 행사되는 모습, <속도광>처럼 빠르게 이동을 하지만 전작 중요한 것을 할수 없는 단면을 그리고 있다. 이뿐인가..사람들은 <사업 디자이너>지적 처럼 침묵도 모른다.

이런 서른여편의 단편들이 모아져서 이루어진 모자이크의 전체 그림은 어떤 모습인가??

그건 암담한 모습이고..도대체 희망이란 것을 찾을 수 없는 살벌한 사회이고 자화상이다. 그런데도 웃을수 있나?..물론 없다. 각 작은 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작가의 능청으로 웃기게 그리지만 현실의 일상에서 우리는 누구도 웃지 않고 소설속 인물처럼 화를 내면서 자기안의 발톱으로 상대를 그어버린다.  <훈수족>의 가스총을 쏘는 친구처럼 말이다.

"뭐긴뭐야. 쌔꺄. 정의의 미사일을 받아랏!"하며...

그럼 사람들은 , 작가는 어떤 고민에 빠져 있는가?  <누구를 믿을 것이냐>에서 대책4가지를 내놓는다. 작가는 은근슬쩍 하나를 고르고 독자에게도 물어보고 나서 다시 비웃어버린다.  자신도 어떤 분야의 권위자가 되어 자신의 분야에 오면 쓴맛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서로에게..계속해서.

작가는 어쩌면 소박한 꿈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고, 작은 순진한 마음을 간직하고, 드센 억척이보다 작은걸 잃어도 분해하지 않는 그런 마음을 말이다.

분명 번쩍 하는 황홀한 순간은 일상뒤에 감추어진 진실을 보는 순간이고 깨닫는 순간이다. 그리고 순간순간으로 이루어진 지난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기 하다.

그리고  그 순간은 다시 황홀한 순간을 꿈꾸길 바라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일것 같다는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1
홍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5월
평점 :
품절


한회장의 사위인 소설가 김형진은 한회장의 부탁과 주문으로 현산이란 집안어른의 일대기를 부탁받는다. 이런 일과 별개로 y군에서는 갖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현산은 한회장의 집안의 자랑이다. 독립투사이기 때문이다. 갖은 고향에서 대조적으로 서교수의 부친이 친일파로 규정짓어진 상태이고 해묵은 앙금은 대립과 송사가 벌어지게 된다. 이과정에서 일대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밝혀지지 않는 사실들이 세상에 나오고 현상의 핏줄들도 하나씩 찾게 된다.

우선 이 소설은 참 친절하다. 몇 단락이 지나면 셜록홈즈가 사건을 설명하듯 지난 일들을 잘 정리해주기 때문에 이른바 복습을 시켜준다. 그래서 복잡하게 얼힌 이야기의 인물들의 구조를 쉬게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정리가 잘 된 구조는 한회장의 일가에서 중국과 일본으로 친족의 범위가 확대되어 간다. 중국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현산의 아들과 일본의 에다는 그 전형이다.

다른 하나는 현산과 송암의 역사로..독립투사로 알려진 자의 친일행각과 친일파로 알려진 독립운동전력, 그리고 현산과 송암의 대립관계에서 친구로 밝혀진 것과 그자손들의 관계들이다.

즉 소설은 확대된 친척과 대화에서 자신과 타국의 입장을 들어보고 현산과 송암으로 자신의 역사를 돌아보는 구조로 되어있다. 타국의입장..중국의 현산아들과 에다와 그의 친구들과의 대화..그리고 전향의 과정에서 나오는 평가의 물음과 역사적 기록의 한계와 문제점을 생각해 볼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성적 접근과 상대를 받아들이는 기본적 자세도 안되는 서로간의 감정싸움에서 그 원인을 찾아보려는 같다. 읽는 이중에는 저런 변절의 모호함을 갖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묻어두는 과거를 지적할수도 있고 급히 치닫는 아시아의 민족주의등을 말할수도 있을것이다.

역사의 발굴, 재조명이 최근에 이른바 <만만하고> <명백한>것으로 포장되어지고 그것을 현재의 기반으로 삼거나 이용하려는 조류가 강한다고 느낀다.  이는 과거 역사를  비교함으로 현재의 자신을 우위론적으로  합리화는 역사자료의 도구화로 보여지는데 이는 쉽게 여러 세력에 앞잡이가 될수있다.

정적을 제게하는 수단으로, 지금의 결점을 덮어두고 안주하려는 시도로써, 그리고 자극제로써 가 그것이다.

정적을 제거하려다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면 역사는 철지난 신문기사의 가치도 안된다. 결점을 덮어두려고 밝혀지는 과거의 역사는 미래의 심판에서 벗어날수 도 없다.

해서...역사는 인간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반성하는 자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반성하는 양심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고 이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에게 양심을 허용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2차대전의 유태인학살이 반성되지만 지금의 수많은 학살이 덤덤이 자행되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한 반성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이 아니겠나..

그럼 형진의 사전답사와 그의 사학과 교수의 안목으로 역사적 양심을 깨울수없다는 말인가... 신이라도 불러 역사를 물어야 하는가..

아무리해도 안되는 인간의 한계가 있으므로..지금의 인간을 부인하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봄이 어떨까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나들이 -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1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1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아.. 이 책은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전 5권에서 첫권이고 저작연대로 보면 1971부터 75년 6월까지이다. 나보다 약간 나이가 먹은 소설이다.

읽으면서 소설이 말하는 것과 별개로 엉뚱한 상상을 해보게 되었다.

하나는 그 시절 내가 태어났으면 어떤 등장인물정도가 되었을까...하고 내 부모가 등장인물과 얼핏 동년배인데..부모에 대한 이러저러한 삶의 배경을 골몰하게 됐고 그럼에도 지금과 다른점과 같은점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점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우선 삶에서  뭔가 한두대씩 제대로 된 뜨거운 맛을 보고 실패하고 실패가 예정되어 있으며 그럼에도 묘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어떤 나들이>의  유부녀는 남편과 아들이란 믿고 의지하고 자랑할 만한 시대의 상징에서 찬밥이고 세상은 여자의 자립에 대해 먼귀로도 들은봐 없다.  <주말농장>의 농부는 농사만 짓기에는 세상을 알고 세상에서 활개를 치기에는 촌놈이며, <연인들>의 연인들은 순수하지만 연약하고 앞으로 고단하고 냉혹한 장벽에서 두려움에 움치려 떨 뿐이다.

16개의 단편들 모두 이렇게 바보같이 세상에 속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런 부조리한 세상에 반기도 들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생활의 기반을 전쟁에서 잃었거나 물려받은 것은 깊은 가난뿐이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고 아들에 대한 출세의지다. 이런 것은 열거하기가 벅차다.

그들은 이중으로 압박을 받고 있다. 이른바 <근대화>이전의 문제와 근대화 이후의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운좋게 땅부자가 되어 이런 문제를 해결할수도 있지만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소설의 인물들은 그렇치 못하다. 그래서 인물들은 이런 막강한 현실에 절망하고  고발하고 스스로 종속되어 간다.

이 소설에서 들리는 유일하게 대처방법은<어느 시시한 사내 이야기>에서 처럼 당당히 맞서는 거라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이 지금에서 읽히는 동안 생각되어진 점은 그때의 협소한 선택종류가 지금은 한층 다양해 졌다는 것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많은 실험을 하고 있으며 그 당시보다 여유있게 자라서는 모르지만 더 용감?해 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대의 한계와 문제를 근대화의 가난과 현실에 초점에 맞춰 자족할수 있나?하면 그럴수가 없다. 다양하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고 아직 열매를 기다리기에는 아직 시간이 짧다.

양극화나 자본주의 심화등을 들먹이지 않아도 지금의 한계를 단순히 70년대와 비교해 우위에 있다고 말할수 없다면 지금의 한계와 절망, 그리고 그 희망을 찾기에 대해 지금의 독자는 읽는 내내 상기해봄찍 하지않을까 싶다. 소설속 등장인물의 담대하지 못함을 탓하면서 점점 나이에 짓눌리는 것을 느낄때,,그리고 얼마후 기성세대가 될때..소설속 등장인물중 하나를 나로 바꾸는 상상을 하며 책을 덮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기의 그늘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199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황석영의 매력은 묵직하고 담백하며 바람을 정면을 맞는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한다.

이 소설은 베트남전을 그리고 있지만 몇장 넘기면 내심 기대했던 전투장면은 오간데 없고 다낭의 군수보급처로 눈을 돌린다.  전쟁이 단순히 무기를 갖고 적을 죽이는 행위로 규정지을수 없음을 이 책을 읽어가는중에 깨닫는다. 수많은 창고와 막대한 물품,  듣도보지도 못한 상품의 묘사는 전쟁의 다른면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읽으면서 왜 작가는 전투장면을 그리지 않고 이런 전쟁의 물품에 대해 쓸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나름대로 작가가 베트남전에 참가했으니 자전적 성격을 강하게 부여받지 않았나 싶었고 한국전쟁이 끝난 지금의 한반도의 정세를 살펴보기에는 이런 배경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구호품으로써 지원이 아니라 그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점령의 첨병작업은 < 레이션>으로 상징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나.

암시장은 마치 전쟁에서 벌어지는 규정할수 없고 의미를 밝힐수 없는 혼란의 전형으로 보인다. 그곳에 한국과 미국, 베트남인은 저마다의 목적으로 움직이는데..미국과 베트남정부의 모습, 한국의 모습과 반군의 모습의 비교는 의미하는 봐가 깊다.

미국은 물품을 융단폭격을 하듯이 쏟아낸다. 미국의 제품으로 이 모든것이 이루어져 있고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들이 적을 만들고 적을 입히고 다시 적을 죽이는 모습은 지금의 한국을 보는데 유효하다.

한국인들은 미국이 펼쳐논 곳에서 장사를 하고 연줄을 되어 먹고사는 이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값으로 고향의 꿈을  사고 일본제 가전제품을 산다.

 책을 읽는내내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사람의 회고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두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무지막지한 미국의 물량에 아연한 기억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베트남 땅에 내렸을때 이길수 없겠구나하는 허무함이다.

그것은 아마도 책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민간인 학살장면과 엉뚱하게 연결이 되었다. 강력한 무력과 물품으로 당분간은 미국인처럼 살수는 있겠지만 그땅과 사람을 살수도 사랑할수도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깨닫지 못하거나 거부한 핵심이 아니겠나.

소령의 한국여자처럼 지금의 한국도 미국를 따라서 몸을 팔고 죽어가는 것을 못보고 마약이란 환각에 취해 전쟁을 지지하고 따라다니는 그리고 수많은 물량의 반출을 기다리는 미국보다 더 타락한 부분이 없는지 반성해야된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베트남부터 이라크, 지금도 계속되는 테러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란 존재는 근본적으로 스스로 구원할수도 없으며 진보하지도 않으며 자기중심적 사고에 벗어나지 못하다는 걸 새삼 믿게 해준다고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