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 - 행동하는 성자 피에르 신부의 분노의 휴머니즘
아베 피에르 지음, 김용채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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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이론을 말하면 진부하거나 특정이념을 가진사람들이 늘 부르짖는 어구일까? 이념을 말하기 위해 2:8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실존안에 자각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피에르 신부는 지금 전지구적으로 맹렬히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에 따른 폐해를 지적하고 있는데 그가 지적하는 위치를 책을 읽는 동안 역추적하게 한다.

그는 명백히 현 자본주의의 성격을 반대하고 부정한다. <돈, 사회적 성공. 영리적인 활동>은 삶의 본질이 아니라 하며 삶의 본질은 <다른 방식으로 생활하고 시간을 쓰면서...>활동하는 영리적이지 않지만 <인간적인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 말한다.

그는 실업에 처한 사람,  올갈때 없는 사람, 시간을 마냥허비하는 젊은이에 주목한다. 그들은 어그러진 세상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하고 방치되고 무관심으로 절망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절망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세상은 <무엇보다도 돈벌이와는 관계없는 비영리적인 활동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되겠다.  이 예로 피에르 신부는 연극단을 소개하고 있는데 한국의 직업교육을 읽는 동안 연상을 하게 했는데 오히려 이런 연극이란 활동을 통해 스스로 자각하고 자신감을 회복 하면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개척하고 또 이를 도와주는 것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이것은 <함께함>이라 피에르 신부는 말하는데 이것은 두가지면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넘어진 상대를 일으켜주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야하는 이유>를 서로에게 제공해주는 것이다.

살아야하는 이유는 <베풀고 사랑하기 위해>서 이며  사람은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그것을 넘어서도 이를 실천하게 한다. 그런데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겠다싶었다. 사랑. 베품, 함께함이란 듣기좋은 말을 하는 것도 좋치만 또한 실제 피에르 신부가 활동하는 곳은 그렇치만 지금 내안에서 그런것이 가능한가? 나와 어떻게 관련이 있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내가 변할때 세상은 변한다>라는 소제목이 위 의문에 대한 피에르 신부의 답일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는 자가 되어 일상적이고 영적인 싸움을 통해 헌신적인 사랑,용서,동정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속한자가 되어 내가 변하고 그것은 변신의 단 한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동안 이와 반대되는 것들과 지속적인 싸움의 과정이 벌어지고 이것은 세상을 변하시키는 것으로 향하게 된다는 뜻일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것은 그렇게 모호하지도 않고 단정적이지도 않으며 나약한 것도 아닌것 같다. 피에르 신부는 사랑이란 그렇게 완고하고 강팍한<자신을 벗어나는 것>으로 말하면서 그것은 고통받는 타인과 교류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강팍한 자신이 자신을 벗어나 고통당한 타인과 교류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그가 어떤 이론이나 도덕의 당위적 행위를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안에 벌어지고 있는 행위를 하나하나 풀어서 말한것이라는 거다.

그렇니까 <나>란 사람은 <하나님>을 통해 변하고 그것은 바로 영적인 싸움을 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이것의 다른면은 변한 나의 특징으로 고통받는 타인이 교류되는 총제적인 모습을 그렸다는 것이다.

피에르신부는 이런 총제적인 내면, 변화된 삶으로 어려운 사람을 돌보고 나누며 살아온 사람이다. 이런 삶은 그가 말한대로<수많은 말보다도 사랑을 몸소 익히고...작은 행동을 더해가는>삶이다. 인간적인 세상만들기란 결국 신앙의 본질과 실천이고 이것이 바로 삶의 본질이라 역설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읽는 내내  실재하며 실행된 <왕국>의 사람으로 증언한 그의 권면이 자신이 평생투신한 그 진실된 <왕국>으로 들어와 변화된 삶을 살 것을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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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계절, 청춘 - 근현대일본 거장단편집 1
다자이 오사무.오에 겐자부로 지음, 이유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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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에 보면 고단샤란 출판사가 문예문고<전후단편소설재발견> 시리즈중1,2권이 이 책이라 말한다. 젊은세대의 평론가가 단편소설중에 性과 청춘의 테마를 잡고 선고했다고 한다. 좋게 생각하면 잘 선정된 단편들을 한번에 볼수 있는 것도 되고 다르게 보면 일본에서 좋은반응이 있어 한국에 건너왔다고도 볼수 있다.

익히 보온 작가들이 다수 포함된것도 위의 두가지 시각에서 볼수 있겠다. 개인적으론 일본소설을 접하기 시작하는 독자라면 괜찮은 소설집이라 여겨진다. 책 뒤에 작가의 간략한 설명도 있어 대략적인 맵이 잡힌다고 할까..

다지아 오사무, 오에 겐자부로, 요즘 주목받고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 마루야마 겐지, 소설말고도 유명한 나카자와 케이등 이름있는 소설가들의 단편들이 포진하고 있다.

소설들의 면면을 보면 다양하다.  순진하고 맑은 젊음을 말한 다자이 오사무나 사내들의 성을 통한 성장과정을 말한 미야모토 테루, 무책임한 혼란과 순응을 꼬집는 겐자부로등 각기 주제의식이나 말하는 봐도 각양각색이다. 읽고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각 단편의 평가보다는 작가의 궁금증, 작가의 다른작품, 자신이 선호하는 소설등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런면에서 보면 훌륭한 일본소설입문서요,잘 편집된 소설상품이다.

단편소설얘기를 좀 하자면 오사무와 겐자부로가 대비된다고 느겼다. 어떤 감정이나 감성에 한계를 두지않고 발하고 흡수하는 것이 다자이 오사무라면 오에 겐자부로는 철저하게 파고들어 사색하는 작가였다.

마루야마겐지는 그 중간쯤 작가라 생각하면 어떨까..약간은 무리일까.. 완전한 유희의 인물이 왠지 이시하라의 지금모습의 암시가 아닐까.. 여성의 감성이 뚝뚝 묻어나는 이리에를 넘어도 괜찮게 봤다.

청춘이라는 것을 왜 이리 사람들이 주목하고 작가들은 말하고 있는 걸까.. 작가들이 말하는 청춘은 순진하면서 한없이 악할수 있는 허점이 있으며 어떤 완벽한 사랑을 찾아헤매이면서도 성적욕구에 쫒기는 것이며 기성세대를 비판할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극복못하고 한없이 부족함을 향해 달리고 다시 절망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죽음과 지금의 한숨과 무력함이 점점 압도해가는 사람들에게 그 시절 청춘은 지금을 구원해줄 위안, 가나안으로 생각하는 걸까..아니면 청춘을 맞이하고 지나간 이들 모두 그것을 되돌아봄이 인생에 중요한 깨달음을 갖고 있는 시간이여서 일까..

아무래도 청춘이라고 하더라도 인생의 한부분이고 사람을 떠나서 생각할수 없음에 작가들이 쓰지 않겠나.

아직 청춘인지 아니면 지나서인지 고개만 끄덕일뿐.. 젊은 사람처럼 가슴을 때리는 단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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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네르의 비극
샤를 페르디낭 라뮈 지음, 이원하 옮김 / 나무와숲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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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좋아해 시간과 돈만 허락된다면 다른 재미꺼리는 잠시 잊고 산에 가는 편이다. 나에게 있어 산은 시간과 돈에서 상당한 발언권이 있는 셈이다. 산악소설이란 광고때문에 보게 됐는데..약간은 난감하다고 할까..

책 뒤에 보면 산악소설은 두가지로 구분된다고 적혀있다. 하나는 등반에 관한 소설이다. 이런식의 소설은 영화로도 많이 접했을거라 본다. 다른하나는 산에 관한..그러니까 산을 포함한 생명이나 자연을 그린 소설이 있다고 한다. 사스네르의 비극은 후자에 속한다.

수십년전 비극이 있던 고산의 목초지인 사스네르를 마을사람의 필요로 인해 다시 개발되고 이로 인해 마을에 저주와 비극이 벌어지는 내용인데..소설자체가 좀 오래된 것이어서 그런지 익히 보아온 소설의 문체나 표현법 전개방식과 달라 눈이 잘 안붙었다.

노인들의 고언이 어떤 근거가 있는지가 궁금한 나는 그 장치가 단순히 궁금증이나 소설의 속에 공포를 위한 장치쯤 보였고 중반이후까지 장치의 역할이 힘이 없어보여 시큰둥해졌다.

어떤 자연법칙의 인과로써 비극을 납득하는 현대인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직 모르는 영역의 지식과 기술의 미비로 막연한 공포심이 가득한 소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비극의 본질은 내가 보기엔 인간의 욕심이었다. 의지를 갖고 있는 산보다는 왠지 인간의 지칠지 모르는 욕심이 사고와 사건의 연속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거대한 산속에서 메아리처럼 묻혀진 이야기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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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가들과 함께 세상읽기
권영길 외 지음 / 책벌레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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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가 개최한 토론회에서 내용을 간추려서 만든책이다.

여러 사람들이 짧은글로 자신의 입장, 시각을 아주 간략히 정리한 책이니 이들의 아주 대략적이고 가지고 있는 생각을 압축해서 말한 거라 보면 되겠다.

권영길부터해서 아무래도 민주노동당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김수행교수등 이른바 좌파,진보계열사람들도 포함되어있다. 고등학생이 읽거나 대학교신입이 읽어도 무방한 책이다.

대부분의 내용은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환경문제등 우리가 익숙히 듣던 주제이고 주장이다.

한가지 궁금한것은 <다함께>라는 조직인데 민주노동당에서 상당한 조직을 갖고 있고 부분적으로는 마찰도 있다는 것이다.  토론회를 개회하는 <다함께>의 소개부터 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부터 알리는 것이 좋치 않을까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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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체험
오에 겐자부로 지음 / 소학사(사피엔티아)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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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의 현실은 부족함으로 가득채워진 상태이다.  아내는 히미코처럼 성적인 서비스도 이해력도 없거니와 도히려 강요와 요구만있는 여자이다. 그의 주변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장인과 장모는 버드의 알코올에 대한 전력을 알고있으면서도 술을 주거나 위로는 커녕 말끔히 아이를 처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버드는 오래전부터 아프리카에 가고 싶은 사람이다.

실제로 버드는 그곳에 갈수 있다. 아내보다도 상냥하고 이해심많고 성적서비스가 풍부한 그녀와 함께 갈수도 있다. 또한 그녀가 원하다. 현실에는 머리가 괴상한 아이가 버드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모두들 아이에 대해 말할수 있고 해야한다고 말하지만..버드만이 가장 직접적으로 아이를 살리거나 죽이거나,,무시하거나 모른척 알수 있다.

이 소설에서 버드가 가장많이 되뇌이는 말은 아마 "부끄럽다."라는 말과 의무형의 생각일것이다.  이와 비슷한 말도 포함해서 무수히 많이 이 단어가 등장한다.  단순히 아이가 부끄러운 것일까?...

부끄럽다, 창피하다라는..특정감정의 표현에 있어 감정의 진실은 보다많은 심리적, 상황적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부끄럽다 할때 그것은 <체면이 낮아졌다. 부정하고 싶다, 책임감이 무겁다, 나의 단점이 노출되었다, 내가 약한 존재다. >등등의 무수히 많은 것의 교차점에 나온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자기자신의 대한 평가적 감정성격이 강한 것이라면... 버드는 아이가 이상하다는 현실에서 얻은 메세지는 아이의 책임감과 자신의 아프리카의 대한 열망의 포기, 주위의 압력 그리고 자신의 약한 모습이 혼합되어 아기라는 거부할수 없는 생명체로 단시간에 이 모든 갈등을 정리하고 풀어가야할 것으로 다가온것이 아니겠나...

소설에서는 누구나 버드처럼 삶에서 거부할수 없는 상황의 강요를 받는 사람이 나오고 그들은 도피해 있다. 그들은  히미코와 게이바를 하는 기쿠히코이다.

히미코는 자살한 남편의 압력에서 해방하고자 밤마다 스포츠카를 몰고 여러남자와 섹스를 즐긴다. 기쿠히코라는 인물이 흥미로운데 그의 이름을 아기에다 갖다붙인 정황이다. 이미 예전에 그를 한번 버린적이 있는 전력에 눈길이 간다. 그를 버리면서 얻은것은 죽은시체뿐이고 훗날 버드는 그를 버리지 않았으면 게이가 안될수도 있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는 다시 아기 기쿠히코를 어떻게든 선택해야 한다. 예전의 버드의 선택은 훗날 보다 나은 선택을 하지못했음을 증명했고 그런 선택의 원인은 책임감과 배려의 부재였다. 버드의 자유의 무게는 다른 작은 배려의 선택의 무게보다 너무 터무니 없이 가벼운 것이었다.

할까 말까의 기로에서 버드는 지금껏 서 있지도 않았다. 선택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선택의 순간이 왔을때 문제는 전혀 다르게 버드에게 다가왔다. 버드가 살고 있는 세계는 야생의 아프리카이다. 누구도 믿을수 없고 의지할수 없는 곳이다. 결말부분에 실망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괜찮게 보았다. 그리고 버드가 아기를 점차 동일시 하는것 또한 흥미로운 설정이다. 오에의 다른책<나라는 소설가 만들기>에 보면 추천의말에서 다른정보도 생각해 볼만하다.  이미 <하늘의 괴물 아구이>에서 뇌헤르니아의 아이가 나오는데 그 소설에선 아기와 자신도 자살하는 것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폭피해자를 만남으로 변화가 생긴점을 알려준다. 책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견디며 끝까지 살려고 애쓰는 피폭환자들을 보면서 오에는 "그들에게서 용기를 얻고 유리관 안의 내 아들때문에 빠져가던 일종의 노이로제, 퇴폐의 뿌리를 도려내는 고통을 감수하고 굴욕과 수치를 수용한 채 공허하게 죽을 타입인 나 같은 사람도 언젠가 자기 존엄성을 지키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까? 라는 지점까지 나아가게 된다.>

희망은 정해져있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이런 결말이 우스워 보이겠지만 버드가 득의있게 건달과 비교되는 장면은...문제를 직시하고 마주선 사람의 자부심과 그 상황에 그만이 볼수있는 길이라 여겨지기 때문에 수긍이 갔다.

버드가 보는..그 세상의 날카로움에 문득문득 놀라는 것도 이 소설의 매력이다. 문제를 직시하고 헤쳐나간 사람만이 이런 글을 쓸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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