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 울력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 내면의 흐름을 심도있게 파고드는 글은 인기가 없고 지루하다.  무질은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 혹시 저주를 하지 않았을까.. 망명생활과 생활고에 다그치면서도 <특성없는 남자>를 미완으로 남겼으니..

일종의 편견임인데 독일소설작가중 이름좀 알려진 작가들은 예외없이 <성장소설류>의 작품을 하나씩 쓰는 것 같다. 헤세도 그렇고 토마스만의 <토니오 크뢰거>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물론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이 성장소설이 아님은 작가가 공공연하게 말했으니 접어두기로 하고...

아무래도 무질이 군사학교를 다녔으니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베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질의 문학관을 살펴보면 이 책이 성장소설이나, 당시 문제있는 교육기관을 고발하는 소설이 아님은 명백해 진다. 더구다나 무질 스스로도 체험소설이니 성장소설이란 말을 듣고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소설에서 비중있게 나오는 인물은 역시 퇴를레스, 바이네베르크, 라이팅과 바시니 정도이다. 공간도 한정되어 있다. 사관학교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대부분이고 더군다나 다락방이 집중적으로 부각된다.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고 수평적이다.  무질은 이야기로써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라이팅은 현실적 관계에서 권력을 탐하고 행사하려는 인물이고 바이네베르크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비적 심령술을 행하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의지가 박약하고 점점 궁지로 몰리는 바시니, 그리고 끝없이 무엇을 사색하는 퇴를레스가 소설의 구조로 기능한다.

퇴를레스는 라이팅이나 바이네베르크와 어울리지만 자신이 점점 원하는 것이 그들에게서 찾을수 없음을 알아간다. 그것은 수학에서 나오는 허수의 개념으로 제시된다. 완벽하게 체계를 이루고 명확한 진리로 받아들이는 수학에서 <무한>과 <허수>는 모순되고 명확히 제시될수 없는 것임을 직감한 퇴를레스는 <오감>이나 <명백한 진리> 로 말해지는 것 이외것이 삶에서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간다. 수학교사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지만 수학교사는 퇴를레스에게 만족할 답을 주지 못한다.

바시니가 점점 심한 폭력에 노출되어 가는 과정은 퇴를레스에게 라이팅의 현실적 지배세계, 힘의 세계와 바이네베르크의 신비적 사상에 대해 밑천이 없으며 기대할 것이 없는 것을 밝혀준다.

바시니의 일이 폭로되었을때 퇴를레스는 교사들 앞에서 약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자신의 이런 생각 즉 수학적 원리로 표현되는 이성적이거나 오성적, 진리적 세계와 또 다른것이 삶에 분명존재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의미한다고 강변한다.

무질은 정리되고 인식된 세계를 넘어선 것을 말해야 하고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작가임을 감안한다면 이 소설의 전반적 맥락이 정리될 것 같다.

무질의 소설은 이야기가 잘 진행되지 않는다. 그의 서술은 마치 융합반응처럼 끝임없이 사람속을 파고들고 묘사한다. 그래서 익숙히 봐 왔던 소설과 달리 소설을 다읽기가 약간은 힘들었지만 읽고나니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서술시점에 대한 생각인데.. 등장인물의 감정이나 생각을 잘 묘사하는 방식이 1인칭 시점이라면 이소설은 3인칭시점을 사용함에도 1인칭의 특징을 능가한다는 점이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퇴를레스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과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하는 방식의 차이점과 특징등을 감안해서 읽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사족인데..무질의 대표작 <특성없는 남자>가 아직 번역이 안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새삼 땅덩이가 넑이로 좁음을 느끼는것이 아니라 이런  책이 아직까지 출판되지 않았다는 것에서  좁다라는 낭패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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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5-06-08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 책 읽어봐야지 맘만 있었지 아직 읽어보진 못했는데, 상당히 어려울 것 같군요. ^^; 오즈님은 상당히 좋은 책들을 많이 읽으시네요. ^^
 
정은 늙지도 않아
이경자 지음 / 문이당 / 1999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은 현재와는 다소 시간차가 있는 배경으로 되어있다. <새마을 운동>이니 자식을 볼려고 첩을 들이는 사람이 요즘 어딨냐는 소설속 말처럼 소위 <근대화>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등에 업고 있다.

이 소설은 세명의 인물에 집중하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넉넉한 살림을 배경으로 젋어서 부터 <오입>깨나 하고 살고 여러첩을 두지만 전작 자식복이 없는 <도철>과  도철과 궁합과 금실은 유별나게 좋은데 자식을 못낳은 본처<필례>, 도철의 제대로 된 사랑도 못 받고 본처 필례에게도 구박받지만 나중에 아들을 생산하는 <영실>이 그들이다.

이 세인물들은 제각기 마음의 양지와 음지가 확연하다. 작가는 이런 인물들의 내면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속내, 푸념, 대화, 추억들을 징검다리 건너듯 이동해 생생히 전한다. 이런 과정에서 들어나는 <필례>와 <영실>의 하소연은 한치도 물러설수 없이 확고하고 때론 질투와 시기로 나타나고 가끔은 행복한 꿈을 꾸기도 한다.

필례와 영실의 한과 설움은 현대와 근대이전의 여성이 겪는 고초범위에 닿아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이른바 대를 이을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는 여성, 신체가 온전히 <정상적>이지 못한 여성, 가족과 남성중심에서 배려받지 못하는 여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을 낳지못해 수없이 첩을 들이는 필례의 마음과 신체의 온전치 못함과 여자라는 가치때문에 첩살이를 시작하고 다시 아들과 자식을 못난다는 이유로 냉대를 받았던 영실은  표면적으론 필례와  앙숙관계지만 그들 스스로는 나름대로 합리화 할수 있는 이유와 호소력을 갖고 있다. 계속해서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주고 질투하고 감시하지만 이것을 둘만의 시기심이나 질투로 보기에는 상황이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것이다.

필례와 영실은 도철을 서로 독차지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이런 상황과 자신에게 헤어 나올수 없어 궁지에 몰린다. 이런 연장선에서 소설은 가족이란 틀속에서 부부라는 것에 눈길을 주고 결국 남녀관계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情이라는 원동력을 보여준다.

소설속의 정은 인간본성에서 나오는 사랑받고싶어하는 것이고 또 그것의 환타지이며, 당시 현실적인 유일한 공유수단인 섹스를 통한 것이며, 자신을 무장해제하는 순수함의 발견이고 이 순수함을 나누고 마음을 의지하는...삶의 원동력이자 뼈대인 것이다. 이것은 개인사가 덧붙여 나중에 이르면 돌이킬수 없는 그자체의 인생살이의 모습이 되어버린다. 이때의 원동력으로써 정은 지금 굳건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의 신과 온갖 학문과 미디어 설파하는 개인의지나 권리이전에 차지하고 있던 자리로 보인다.

가족과 남녀의 관계는 점차 변하고 있다. 이제는 남아선호의 풍토와 자식이나 가족이란 틀때문에 사랑없는 관계가 비판받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여러시각도 존재한다. 온전히 사랑을 쏟는 가족의 일원을 강조하기도 하고 사랑이 없다면 가족이나 부부의 틀에서도 이탈할수 있는 것도 말해진다. 이 소설은 당시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풍경을 생생히 들려주고 있어서 지금의 우리의모습도 필례나 영실 혹은 도철처럼 지금, 현재를말하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이외에도 확실히 구수한 사투리와 욕설은 이 소설을 살아있게 하는데 긴밀했고 감정표출의 대화나 독백또한 이 책에서 말하는 바와 호응했다고 본다.

어찌보면 필례와 영실은 답답하고 옹졸하게 보이고 때론 순수하게도 보이는 것이 지금의 현대인의 어떤면과 비교되어 그렇게 보일까 생각하게 했다. 그런면에서 보면 필례와 영실의 악다구니와 현대인의 냉혹함이 비슷한 면도있는것이 아니겠나...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분명 살비비고  의지하면서 사는것이 이치이지만 믿고 신뢰할 것이 과연 사람일까라는생각을 하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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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선배중 하나가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한 사람이 있었다. 결국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을 감출수가 없어 유학까지 다녀오고 영화판에 전전했는데..최근소식은 잘 듣지 못해 모르지만 영화와는 동떨어진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당시 선배는 교회에서 영화제를 열고 재밌고 시간가는 줄 모르는 영화대신 이름좀 알려지고 평론가들한테 별좀 딴 영화를 보여주곤 했다.

그래서 그럴까...한동안 나도 영화를 자주보고 책도 사보면서 영화와 친해지려 했다. 전함포템킨이나 분노의 주먹등 보지도못하고 재미도없는 영화를 동경한 것도 그당시 시절이었던 것 같다. 사설이 상당히 긴데..후로 솔직해 지자라는 마음으로 단순하고 터지고 재미있는 영화만 일부러 봤다. 그러다 최근에 더이상 돈과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예술영화든지 무슨영화든지 괜찮은 영화를 찾아다녀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생각해 보면 그시절로 인해 영화보는 연습을 많이 했던것 같다. 참고 인내하면서 영화보는 훈련..그리고 잠시라도 그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의문을 품는 것..

이런 과정중에 비디오 가게에서 주말에 빌려 본것이 <자연의 아이들>이란 영화다.

아이들이 제목에 나와 유년시절을 다룬것이 아니라 노년시절을 다뤘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됐다. 이상히도 노년과 노인들이 나오는 영화가 머리속에 오래 남는 것이 그 동안의 행적이었다.

줄거리도 단순하다.  양을 팔고 개를 죽이고 딸에 집에 갔지만 냉대를 받다 양로원에서 고향친구를 만나 고향으로 돌아가는..그런 줄거리이다.

영화는 상당히 침묵하고 조용하다. 그리고 급격하게 변하는 것도 없고 후반들어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장면이 삽입된다.  아들이 없는데 있다고 믿고 갑자기 죽는노인, 도로옆 차앞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장면, 갑자기 차가 사라지는 장면, 포스터에 보이는 유령과 엔딩장면에 사라지는 장면은 감독이 인생의 각 장면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향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나오는 범상치 않는 풍광은 아이슬란드라고 하는데 상당히 인상이 깊었고 그안에 사람이 들어서자 도시에서는 발견할수 없는 인간의 한정됨이 새삼느겼졌고 고향친구를 묻어주는 장면에서는 아..저렇게 사람은 살다죽는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닐까 싶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런 죽음... 새삼 삶의 끝에서 관찰되는 지금의 시간은 그렇게 절망적이지도 엄숙하지도 않지만 군살을 제거하는 시선으로도 느겼다.

자연과 삶과 죽음은 영화에서 나오는 그 멋진 풍광처럼 아득하고 자연스럽고 스쳐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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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만 고바디감독의 전영화 <취한말들을 위한 시간>을 보지 못해 아쉬었는데 이번에 개봉된 <거북이도 난다>가 개봉되어 내심 꼭 보리라 다짐을 했었다. 아는 몇사람에게 토요일날 보자고 했더니 대부분 토요일에는 약속이 잡혀 있었고 시간이 있어도 이란영화라는 점과 내용의 무게감때문에 한사코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이라크와 터기의 국경접경지대에는 쿠르드족의 난민촌이 이 영화의 배경이다. 그 마을에는 <위성>이라는 소년이 살고 있다. <위성> 위성안테나를 구해 뉴스도 나오게 하고 아이들을 인솔해 포탄껍데기를 쌓고 나르는 일도 하고 미국이 매설한 지레를 제거하는 일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 마을에 <아그린>이 들어온다. <아그린>은 전쟁중에 부모를 잃고 군인들에게 집단윤간을 당해 큰 상처와 앞이 안보이는 아기를 갖은 소녀다. 그 오빠는 두팔을 잃었고 예언하는 능력이 있다.

<위성>은 <아그린>을 처음보는 순간 반하게 되어 <아그린>을 쫒아 다니고 잘 보살필려고 한다.

생계를 위해 지레를 제거하는 아이들,, 그 일거리 마저 부족해 일거리를 찾아다니고 또 그 아이들중 상당부분 팔이나 다리를 잃은 아이가 많다.

삭막한 자연과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안보이는 난민의 생활중 <아그린>은 자주 죽음을 꿈꾼다. 하지만 <아그린>에게 앞이 안보이는 아기는 사랑과 증오의 이중적 모습일수 밖에 없다. 아기의 눈에 좋다는 <빨간 물고기>를 <위성>은 구할수 없지만 대신 거북이를 구해 <아그린>을 위로하지만 <아그린>은 아기를 안개가 몰아치는 곳에 묶어 두고 떠난다. 이 시점부터 보는 이는 감당할수 없는 무게와 슬픔을 스크린에서 접하게 된다.. 자꾸 마음속에서 이러면 안되는데..안되는데..되풀이 되다..결국 아기가 지레밭 한가운데어서 <위성>의 구조를 기다리는 장면까지 가면 차마 스크린을 볼수가 없다.

전쟁영화를 볼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영화를 보는내내 총성한발, 작은 폭탄,지레한발이 그렇게 가슴을 치고 섬뜩하고 오싹할수가 없었다.

<아그린>과 아기의 운명이 결론지어질때 마음은 다시 한국에 사는 나에게 돌아왔다.  왠지 저들에게 미안하고 사는것이 죄책감이 들었던 까닭이다. 고작 할수 있는 것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집을 향할수 밖에 없었지만 영화라는 것이 저렇게 현실을 알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돌아볼수 있게 함에 여운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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