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속에서 버마 노동자들은 타이 노동시장의 최하부 공동화를 땜질해왔다. 타이 경제를놓고 보면 버마 노동자들이 빼앗은 일자리가 아니라 떠받친 일자리였다. 허울뿐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같은 거창한 말을 하려는게 아니다. 그저 버마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박해의 뿌리가 타이 노동자란 사실에 치를 떨었을 뿐.
닭장차에 실려 온 버마 노동자 수백 명이 경찰 몽둥이에 휘둘리며 모에이강 둑에 무릎 꿇고 추방을 기다리던 그 새벽녘 쓰라린 풍경은 여태 내 심장에 박혀 있다.
- P284

샨해방투쟁이 60년째다. 뒤집어 말하면 버마 정부가 정규군 40만에다 온갖 화력을 투입하고도 지난 60년 동안 산을 무릎 꿇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앞으로 60년 뒤에도 버마 정부가 무력으론 결코 산을 지배할 수 없다. 그 증거가 이 로이따이이다." 못석 말은 우스개가 아니다. 버마 정부군이 총을 내리고 평화를 향해 가야 하는 까닭이다. 그게 소수민족 자결권과 자치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버마연방이다. 그게 버마 정부가 죽어라고 외쳐온 연방제다. 버마 정부는 1948년 독립 뒤부터 30여 개 웃도는 크고 작은 소수민족 무장세력을 단 한 번도 무력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결과는 이렇게 뻔히 나와 있다. 선택은 오롯이 버마 정부 몫이다. 소수민족해방조직들은 언제든 총 내릴 준비가 되어 있다. 버마 정부가 총을 거둔다면,
- P306

고백건대, 이게 ‘동무‘가 돼버린 버마전선 취재 30년이 내게 안긴 고민이기도 하여 기사를 쓸 때만큼은 그 얼굴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온 까닭이다. 그렇다고 내 고민이란 게 사실을 꾸미거나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감추는 따위가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내 고민은 적과 동지를 또렷이 구분하는 일일 뿐이다. 기자로서 내게 ‘중립‘ 이란 건 없다. 나는 객관성‘으로 위장해 자본과 권력을 좇는 상업 언론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다. 오직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내 심장이 내린 명령을 좇을 뿐이다. 하여 내게 진실은 오직내 발에 채인 현장일 수밖에 없다.
기자로서 내 직업적 한계는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산 사람들 판단과 샨 역사에 맡길 수밖에.
- P313

그 시절 영국은 까렌, 까레니, 까친, 친 같은 소수민족을 무장시켜 이른바 분할통치로 다수 버마족을 지배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립을 미끼로 그 소수민족들한테 도움받았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약속도 책임도 저버린 채 사라졌다. 여기가 바로 상호 불신감과 적개심을 걷어내지 못한 채 오늘까지 이어지는 버마 민족분쟁의 출발지였다. 영국 식민주의가 낳은 저주의 유산이었다.
- P321

"다시 태어나도 버마가 안 변하면 또 총 들 수밖에. 까레니로 태어난 내 운명이고 내 자존심이고 내 명예야." 까레니 해방투쟁을 이끌어온 비투는 "어제는 오늘이고, 오늘은 내일이다. 1948년 독립 뒤부터소수민족 무력으로 짓밟아온 버마 정부 안 믿는다."고 딱 잘라 말한다.
"지금껏 맺었던 숱한 휴전협정 누가 깼어? 그게 내 답이야."
믿음 없는 버마 현대사, 평화는 아직 멀기만 하다.
- P332

까렌이 바깥세상에 알려진 건 비극의 현대사를 통해서다. 가렌과까친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앞세워 다수 버마족을 지배한 영국 식민주의자의 이른바 분할통치가 그 비극의 씨앗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립 보장을 미끼로 소수민족들을 총알받이로 써먹고는사라져버린 영국 식민주의자의 배신이 그 비극의 싹이었다. 1948년독립한 버마가 소수민족의 자치와 자결 약속을 깨트리면서 줄기를뻗은 그 비극은 이어진 군인독재정부의 탄압 아래 무럭무럭 자라 결국 버마 전역을 뒤덮은 분쟁이라는 나무가 되었다.
- P335

눈여겨보면 그 국경 충돌이 달아오른 2009년은 타이와 캄보디아 두 정치판이 모두 뒤틀리던 때였다. 방콕에서는 군사정부에 이어군부 도움받아 집권한 민주당이 합법성 시비에 휘말렸고, 프놈펜에서는 장기집권해온 훈 센이 총선 들머리에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게 두 정부가 민족주의를 앞세워 쁘라삿쁘레아위히어를 정치적재물로 삼았던 배경이다. 걸핏하면 국경 긴장을 정치적 연장으로 써먹는 타이와 캄보디아 정치판의 해묵은 수법이었다.
- P409

이 지뢰밭이 외진 국경이 아니라 방콕이라면 어땠을까? 방콕 사람들이 지뢰 밟아 죽어나가도 못 본 척했을까? 방콕에 박힌 지뢰라면 전쟁 끝나고 33년이 지나도록 내버려뒀을까?
이게 국경 현실이다. 이게 국경 사람들 삶이다.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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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니 받거니 기분 좋은 담배질 끝에 화제를 바꾼다. "그나저나이 마을 내력은?" "여기도 몽족 마을이야. 무장투쟁 접은 1983년, 반롬화파몬Ban Rom Fa Pha Mon 이라고, 라오스 국경과 걸친 도이파DoiPhamon 산기슭에서 여기로 옮겨왔지." "그럼 라오스 사람이구먼?"
"우린 대대로 산속에 살았고, 더구나 그 시절엔 국경선이란 것도 또렷잖았으니, 어디가 타이고 어디가 라오스인지도 몰랐지. 알 필요도 없었고."
- P168

되돌아보자. 지도부나 엘리트 출신 당원들은 먹을거리도 없는 가난한 옛 동지들 심장에 대고 "영혼을 팔아먹었다."며 욕질할 자격이없다. 조직 해체 명령이 없어 총을 놓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조차 헷갈린 전사들만 덩그러니 산악에 남겨둔 채, 앞다퉈 제 살길 찾아 떠난 이들이 지도부였고 엘리트였다. 그렇게 떠난 이들은 머잖아 정치인으로, 학자로, 예술가로, 사업가로 이름 날렸다. 잘난 것 없는 타이공산당 경력을 적당히 흘려가며 떵떵거리고 살아왔다. 그이들이 못배우고 가난한 옛 동지들 사회복귀나 보상 위해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 P201

그놈의 나라‘가 불러 나라‘ 위해 목숨 걸고 15년 동안 반공전선 달린 마 와릿한테 떨어진 건 꼴난 버스비와 병원비 반값이다.
버스도 없고 병원도 없는 이 깊은 두메산골에서.
라오스와 국경을 맞댄 이 산골에서는 전직 자경단도 전직 공산당도 시민 대접 못 받긴 다 마찬가지다. 파묻어버린 타이 현대사의 그 밖들일 뿐.
- P215

한참 만에 사하이 사완이 말문을 연다. 1970년대 무장투쟁 시절 이 산악을 타고 다녔지. 다 지난 이야기지만, 세상은 아무도 몰라.
짓누르면 또 일어날 수도 있고, 좋은 세상 못 만든 우리 세대 탓이지만.." 그이 얼굴에 깊은 회한이 묻어난다.
- P251

"당신처럼 라오스에서 태어나 타이에서 살아온 국경 사람들은 두 나라 다툼에 심사가 복잡할 텐데?" "우린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면 돼. 우리 같은 국경 사람들한테 국적이니 국제법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겠어. 도시 사람들한테나 필요한 건진 몰라도, 어차피 우리야 짊어지고 살아야 할 의무만 있지 권리란 게 없으니까." "두 나라가 여기 땅을 놓고 서로 내 것이라 우겨왔는데, 본디 어느 쪽 영토인지?" "여기 국가란 게 어디 있었어. 서로 전쟁하기 전까진 타이도 라오스도 눈길 한 번 준 적 없었는데, 우리를 봐. 나만 해도 저쪽 라오스에서 여기 타이 쪽을 마음대로 건너다니며 살았잖아. 지금이야 막혔지만."
- P252

그렇다면 롬끌라오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국가 중심의 비무장지대를 시민 중심의 평화지대로 바꾸는 길 밖에 없다. 기술적으로 영토분쟁지역을 공유할 뿐, 두 나라가 영토주권을 포기할 일도 없다.
현실적으로 두 나라는 서로 잃을 것도 달라질 것도 없다. 그동안 두정부의 전략이란 것도 사실은 현상유지정책이었고, 특히 아세안에묶인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 가능성도 사라진 상태다.
. 더구나 교통마저 없는 첩첩산중 이 비무장지대에 경제적 이권을다툴 만한 건더기도 없다. 평화지대로 바꾼들 서로 손해 볼 일이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세계 최초‘로 영토분쟁지역에 평화지대를 창설함으로써 명분도 얻고 이문도 낼 수 있다. 무엇보다 타이와 라오스 정부가 죽기 살기로 매달려온 관광산업에도 그만이다. 그 평화지대는 고유한 전통문화를 지녀온 국경 사람들 중심으로 꾸리면 된다.
이 멋들어진 산악에다 그만 한 관광상품이 어디 있겠는가?
- P253

"전선에서 같이 싸워보니 어땠어요?" "본디 우린 학생이나 지식인 안 믿었어. 그이들은 잠깐 왔다 가는 거니까. 1965년부터 목숨 바쳐 싸운 우리하곤 달랐지.
근데, 나중에 보니 그이들이 타이공산당 상징처럼 되어 있더군, 무슨 지도자나 된 것처럼," "1970년대 학생운동 이끈 지도자로 타이공산당 무장투쟁에 참여했던 섹산 쁘라서꾼(탐마삿대학)과 티라분미Thirayut Boonmee(쭐랄롱꼰대학) 말하는 건가요?" "그 둘뿐 아니라숱하잖아. 난 그런 이들 관심 없어. 땅에 발 디딘 공산주의자 아니니까. 많이 배운 그이들은 머리와 입으로 혁명 외쳤지만, 우린 심장과발로 혁명전선을 달려왔어."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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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6-04 14: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공부가 많이 될 것 같네요.
마지막의 글을 읽으니 역사 왜곡, 이 떠오르네요. 많은 역사가 왜곡되었을 걸로 추측합니다.
싸움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 것처럼 보이듯이, 역사 또한 진술하는 측이 유리하게 작용할 듯합니다.

바람돌이 2021-06-04 15:17   좋아요 2 | URL
저기 인터뷰하는 분들 모두 정부가 너무 빼앗아가서 굶어죽을 수가 없어 저항을 시작했던 분들이에요. 이런 분들의 역사가 타이에서는 전부 다 묻혔다고 합니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죠. 독립운동사조차도 묻힌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동남아시아의 현대사를 보면서 우리나라보다 더 가혹하고 복잡한 역사에 마음이 많이 착잡해지네요.
 
리멤버 홍콩 - 시간에 갇힌 도시와 사람들
전명윤 지음 / 사계절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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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대한 단상은 두개의 시기로 나뉘는 것 같다.

우산혁명 이전의 홍콩과 이후의 홍콩


내게 우산 혁명 이전의 홍콩에 대한 기억은 모두 영화속 홍콩이다.

중학교 시절 성룡의 영화에 열광했던 것에서 시작해 홍콩 영화의 계보는 그 시절 우리 모두를 열광하게 했었다.

천녀유혼 속에서 충격적일 정도로 예뻤던 왕조현과 장국영, 주윤발을 시작으로 한 홍콩 느와르영화의 전성시대, 그리고 왕가위감독의 중경삼림, 해피투게더....

이 시절을 지나 온 이들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홍콩영화에 대해 얘기하라고 하면 끝도 없이 떠들 수 있는 내공 한자락쯤은 모두 장착하고 있을만큼 홍콩은 영화속 세상이었다.


우산혁명 이후의 홍콩은 이런 판타지속의 홍콩을 느닷없이 현실로 내 앞에 훅 갖다놓았다.

사실상 내게 있어 홍콩의 현실 역사란 딱 홍콩역사의 시작점인 아편 전쟁과, 1997년의 중국 반환이라는 이 두 지점으로만 기억되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도 현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어려움을 겪고 일상을 영위하고 있을 터인데 그 중간지점은 온통 판타지로만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판타지를 걷어내고 아편전쟁 이후부터 지금까지 홍콩이 걸어온 역사와 그곳에서 살고 있는 현실의 홍콩인들을 보여주고자한다.

홍콩에 대한 역사서술 속에 지금의 홍콩인들을 만나면서 들은 얘기들, 그들의 생각들이 같이 어우러져 진짜 홍콩을 만나고 대면할 수 있는 책이다.

서슴없이 별 5개를 이 책에 주는 이유가 바로 그 현실감과 홍콩에 대한 저자의 애정에 있다.

저자는 홍콩의 송환법 반대투쟁 시기에 취재를 위해 몇번이나 홍콩으로 가서 그들의 투쟁의 현장을 직접 겪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경험을 이 책 속에 녹아내었다.

정식 기자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여행가이드로 살아가면서 정말로 홍콩이라는 땅과 그 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게 책의 곳곳에 녹아있다.


관광지로서의 홍콩, 영화속의 홍콩이 아니라 현실의 홍콩을 만나는데 더없이 좋은 책이다. 

또한 인구가 186배나 많은 너무나 버거운 저항대상-중국이라는 나라와 싸워야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지킬 수 있는 곳. 

코로나때문에 저항운동이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국가보안법(우리나라 국가보안법과 거의 비슷한 수준)을 통과시켜 홍콩의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시켜 그야말로 중국체제에 편입되어버린 땅.

자신이 중국인인지 홍콩인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새로운 세대들.


식민지는 단순히 국가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신의 자율적인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가로막는 그 모든 것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지금의 홍콩이다.

책 속에서 "한국은 어떻게 이겼어요?"라고 묻는 홍콩 소녀에게 "한국도 항상 이긴것만은 아니야. 항상 졌어. 항상 지면서 다시 용기를 내서 계속 싸운거야"라는 말이 그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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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6-03 15: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홍콩의 민주화 ,,,,,
코로나로 인해 홍콩 시민들 중국에 짓밞히고 있는데도
어떤 국가도 관심 없이
이제는 각자 도생 ㅠ.ㅠ

바람돌이 2021-06-04 10:20   좋아요 0 | URL
코로나로 인해 모든 곳이 고통받고 있지만 홍콩에겐 더 치명적이었던것 같아 마음이 아팠어요.
코로나로 인해 시위가 중단된 틈에 국가보안법 통과라니.... 에휴 ㅠ.ㅠ
 

조슈아 웡은 2017년 일본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진격의 거인〉과 홍콩 시위를 이렇게 정의했다. "거인은 인류가 사는 벽을 파괴하려 하고, 인류는 벽을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합니다. 하지만그 벽은 거인이 만든 깃에 불과했죠." 벽 안에 사는 인류는 일국양제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는 홍콩 시민을, 거인은 중국 혹은중국 공산당을 상징한다. 홍콩이 일국양제를 파괴하려는 중국공산당과 싸우고 있는데, 알고 보니 일국양제를 만든 게 중국인상황도 애니메이션의 설정과 닮았다. 이처럼 우산혁명은 일국양제라는 벽이 중국에 의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현실을 홍콩인에게 각인시켰다.
- P148

첫날 애드머럴티 역에 내렸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태어나서 처음 봤어.
막무가내로 시위대를 밀어붙이는 경찰을 붙잡고 울면서 설득하는 사람이 있었지. 경찰에게 ‘당신도 홍콩 사람이다‘라고 하더라고, 홍콩 사람? 홍콩인? 난 한 번도 내가 홍콩인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더라. 텐트에 있는 내내 ‘홍콩 사람이란 뭘까? 나는 홍콩 사람인가?‘를 고민했어. 어느 날 그곳에서 만난 테레사 언니가 ‘우리가 우리의 홍콩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해줬어. 지금 생각하면 별 얘기가 아닌데, 그때는 갑자기 사명감이 생겼던 거야."
- P151

 이제 우리는 사법 정의의 실현으로 비칠수도 있는 송환법 개정에 홍콩 시민들이 반대한 까닭을 알 수있다. 가장 큰 이유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시민들은 코즈웨이베이서점 납치 사건을 보면서 자신도 언제든지 납치, 불법 구금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송환법 개정은 납치와 구금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일이다. 과연 누가 이런 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 P190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이들은 그저 집회를 주최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이번 홍콩 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지도부가 아예없다는 점이다. 2014년의 경험 탓에 사회적 명망가에 대한 불신이 상당했고, 만약 카리스마적 리더를 세울 경우 그가 부재할때 집회를 이어나갈 결속력이 약해진다는 단점도 있었다. 따라서 2019년의 시위는 그 누구도 지도부를 자처하지 않는 모델을만들어냈다. 이들은 ‘여러 단체와 모임은 상황에 따라 각자 행동하고, 학생 시위대의 자율권을 존중한다‘는 대원칙을 정했다.
- P213

원 할아버지는 그게 위안이 됐는지 입을 열었다.
"홍콩 사람들처럼 기구한 운명을 가진 사람도 없을 거야. 나는 1967년 영국 놈은 물러가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는데, 지금손주는 유니언잭을 들고 영국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고 있으니 말이야."
- P238

원 할아버지는 중국을 조국이라고 생각한다. 원 씨는 중국의지배는 어쩔 수 없는 순리지만 중국이 홍콩에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집을 나간 손자는 자신을 홍콩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뭘 할아버지가 골수 친중파인 것은 아니다. 그저 현실에 순응한 사람일 뿐이다. - P238

한마디로 무소불위의 국가보안법이 탄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국은 기존의 법률이 국가보안법과 충돌할 경우 국가보안법을 우선 적용한다고 부칙에 명시했다. 그렇게 2020년 7월1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정확히 23년 만에 항인치항, 고도자치, 일국양제가 막을 내렸다. 사방에서 중국이 홍콩을 병합했다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 P299

다시 싸움을 시작한 미얀마 사람들이 부럽고 존경스러워.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정부와 싸우잖아. 돌이켜보면 우리는 홍콩 행정부와 싸우지 않았어. 우리는 인구가 홍콩보다 186배나많은 중국을 상대로 싸워야 했지. 네 책의 추천사를 쓰지 못해서 미안해. 이제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신분을 드러내고 말할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해줘. 어디에서든 널 다시 만날 수있다면 좋겠어. 그때까지 잘 지내."
"그래 메이야, 너도 잘 지내, 나의 도시 홍콩에게도 인사를전해줘. 길을 가다가 원 씨네 가게 문이 열려 있으면 들어가서탕위엔 한 그릇을 시키고 안부를 전해줘. 나도 너희들이 보고싶다. 언젠가 우리가 모여서 2019년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면, 그 장소는 분명히 홍콩일 거야. 그때까지 무사해줘, 꼭 다시만나자."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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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6-02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홍콩에 딱 한 번 다녀오고 (하지만 짝사랑은 80년대 부터 품고요)
여행 중 bgm은 그 시절의 영화음악이었고요,

그러나 이젠
홍콩 정치 뉴스에 가심이 아픈 나날입니다. .... 꼭 다시 만나자, 홍콩아.

바람돌이 2021-06-02 10:48   좋아요 0 | URL
그래도 다녀오셨네요. 저는 못가봤습니다. 이 책을 끝까지 보고 나면 살짝 그 시절의 홍콩은 이제 끝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목도 리멤버 홍콩인듯하구요. 마음이 많이 아프고, 홍콩인의 마지막 말에 가슴이 많이 아프더라구요.
 

1961년 무렵 홍콩에서 태어난 홍콩 거주민은 전체 인구의절반이 안 됐다. 만약 성인만 따로 분류한다면 홍콩 출신자의비율은 더 줄어들 것이다. 이 말인즉, 홍콩은 그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가 아니라 실향민들의 도시였다는 뜻이다. 고향으로돌아가지 못하고 갇혀버린 이들, 혹은 공산당을 피해 고향을 떠난 이들의 땅. 그들의 고향은 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중국이었고,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 P36

국공내전과 중국 공산화의 여파로 수많은 중국인이 홍콩으로 왔다. 과거와 다른 점이라면 중국 공산화 이후의 난민은 단순한 피난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중에는 중국 제일의 상업 도시인 상하이와 닝보 출신의 자본가와 금융 전문가가 많았다. 대륙이 빠르게 공산화되는 가운데 재산은 챙겨오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경험을 홍콩으로 옮겨왔다. 그들은 홍콩에 ‘시장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했다. 그러자 홍콩 경제에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제조 공장과 은행이 문을 열더니 금융업이 날로발전했다. 오늘날 홍콩이 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경제와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 배경에 바로 이 중국 출신의 자본가들이있다.
- P40

1967년 이전에도 개혁을 논의했지만 늘 자본가의 반대로지지부진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본도 개혁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좌파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전투적 노조운동은 쇠퇴했다. 그리고 이것이 다음에 올 비극을 잉태했다. 앞으로 개혁이 정체되고 사회가 보수화될 때 다시 변화를 추동할 세력이 깡그리 사라졌기 때문이다.
- P55

‘전통문화의 계승자‘라는 홍콩인의 문화적 우월감을 본토의중국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홍콩인을 수전노로 취급하는데, 사회주의 중국이 수십 년간 망가뜨린 전통을 지켜낸 곳이영국의 식민지인 홍콩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P58

홍콩인은 특유의 사고방식 홍콩 사회에 기여하지 않은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나쁜 버릇 을 공유하고 있다. 영주권 인정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로 인한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1948년 1차 이민 붐 때 넘어온 이들은 주로 유산계급이라 금붙이라도 싸매고 왔다면, 이번에 온 이들은 몸뚱이하나뿐인 노동 계층이었다. 홍콩 시민들은 신계 일대에 거대한슬럼이 생긴 것도, 저소득 계층의 삶이 더욱 궁핍해진 것도, 교통질서가 어지러워지고 거리가 지저분해진 것도 모두 중국 이민자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중국인을 질서를 해치는 이물질로 여겼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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