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그날이다. 바로 벌초 가는 날. 조금전 8시쯤 저녁에 미리 출발한다고 우리집 서방 집을 나섰다.
결혼전 친정에서야 나야 딸이어서 그런지 별로 벌초 따라오란 말도 없었고, 어쩌다 따라가도 할아버지 할머니 같이 나란히 놓여있는 무덤 두개 달랑 아버지 엄마가 벌초하고 나는 싸간 도시락 맛나게 먹고, 그리고 오랫만에 자연산회로 배 빵빵 불리고 돌아오는게 다였다.
근데 결혼하고 첫해 시집의 이 벌초라는걸 따라갔었다.
우리 시집은 장손집이다. 시아버님이 8대 장손이고, 시아버님 형제만 9남매다. 그것도 지질이도 없는 집안에 장손이라는건 이익될 건 하나도 없고 지질이도 고생만 한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시골에 땅이라도 좀 있고 그런대로 살만하다면 모르겠지만, 우리 시집은 정말 가난했다. 그리고 사실은 지금도 가난한데 그나마 다행히도 엇나간 자식없이 다들 제자리 잡고 사는 바람에 그런대로 지금은 지낼만해졌다고나 할까...
어쨌든 장손이니 뭐니 이런거에 아무 생각이 없던 나에게 결혼하고 첫 벌초행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 전날 밤에 가서 시골 작은 할아버지 댁에서 잠시 자고, 새벽 5시면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밥먹고 일을 시작하더라. 그 때 벌초 따라간 사람만 해도 남자만 10명, 집안 대 출동이다. 예초기 들고 낫들고 새벽부터 시작한 벌초가 끝날 기미가 안보였다. 나는 무덤마다 가서 절하고, 그 다음에는 구석에서 놀란다. 낫질해봤자 도움도 안돼고.... 그래서 역시 도움안되는 시삼촌 한분과 밤줍고 놀았다.
무덤이 한군데 모여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저기 산마다 흩어져있는걸 이동해가며 하는데, 지금은 그래도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다 새로 나서 덜 힘든거란다. 한 2년 전만 하더라도 차가 못들어가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진짜 산 몇개씩 넘어 다니며 했단다. 그때는 예초기도 없었고....
어떤 무덤에 갔더니 옛적에 참판 벼슬까지 지내면서 잘나갔던 분이란다. 당연히 자리 좋은 곳에 무덤이 놓여있겠지.... 세상에 무덤이라고 갔는데 안보인다. 그냥 조그만 동산이다. 그 동산 전체의 풀을 다 베고 나니까 비로소 무덤의 형체가 보인다. 옛날에 잘나갔으면 후손들한테 좀 잘해주시지... 무덤자리 너무 양지바른데 해서 벌초가 장난아니다.
이날 내가 한 일, 밤 무지 많이 줍고 군데 군데서 감도 따먹고, 그리고 벌초한 무덤 갯수 세기. 모두 29개였다.
벌초 마치고나니 해는 뉘엿뉘엿.... 부산까지 갈일이 아득해진다. 하지만 전부 다음날 출근이니 그래도 바로 출발...
그다음부터 나 벌초 절대 안따라간다. 그리고 혼자서 벌초가서 땡볕에 생고생할 서방을 불쌍해 할 뿐....
요즘은 시댁어른들도 모두 연세들이 많으시고, 또 형제들도 이래 저래 빠지는 일이 잦아지면서 갈수록 일손은 줄어드는데 벌초할 무덤은 안 줄어들고....
근데 참 대책이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해오던 일이고 여전히 조상 모시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큰일이라 믿는 시부모님이 계신한 이 벌초는 아마도 계속되리라. 그리고 그 후라 하더라도 요즘 보기드문 효자에다 장손의 의무에 충실한 시아주버님 역시 한번도 군소리 안하고 이 일을 하고 계신다. 늘 궁시렁거리는건 막내인 우리집 서방뿐.... 하지만 우리 시집처럼 위계질서가 확실한 가정에서는 우리집 서방의 궁시렁은 그저 철없는 소리일뿐 아무도 안 먹어준다.
그나마 난 내가 아들이 없음을 감사한다. 딸의 의무나 이런거에 대해서는 우리 시집은 정말 기대하는 것이 없다. 딸은 시집가면 남이라 생각하고, 우리 시어머님도 시집의 행사는 사돈의 팔촌까지 챙기게 하시면서, 지난번 시외할머니 돌아가셨을때는 '너희들이 출근해야지 어찌 오겠냐, 안와도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물론 남편과 나는 말도 안된다고 직장에 특휴내고 장례식장에 가서 나는 이틀있다가 아이들때문에 돌아왔고 남편은 삼일장을 다 치르고 왔다. 아버님의 어머님께 할 도리가 있다면 당연히 어머님의 어머님께도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게 우리 생각이지만 이 부분에서 시집의 생각은 도저히 내가 뚫을 수 있는 벽이 아니다.)
우리집 두 딸은 우리 시집의 이런 의무에서 자유로울수 있을테니 그나마라도 감사해야지 하지만 시집의 달마다 돌아오는 제사와 벌초와 묘사라는것 등 온갖 전통이라는 이름의 부담들은 며느리인 내 입장에서는 정말로 부담일뿐....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해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만 하는 우리집 서방에게도 부담이 될 뿐인데....
결혼 몇년 후 직장동료 중에 한 분이 자기가 아는 사람이 장손집 며느리였는데 정말 제사가 너무 싫어서 이민갔다는 얘기를 하는걸 들은 적이 있다. 솔직히 처녀때였다면 그래도 좀 심하군 생각했겠지만 그 때는 그 심정이 솔직히 이해가 갔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민까지 가고싶다는 건 아니지만.....
그저 대책없는 넋두리일뿐이다.